[신작 영화 리뷰] <페어웰>
여기 독특한 삶의 이력을 가진 영화배우가 있다. '노라 럼'이라는 본명을 가진 아콰피나가 그녀이다.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에 거주하고 있지만, 서양 아닌 동양의 피가 흐른다. 중국계 미국인 아빠와 한국 사람 엄마를 뒀는데, 4살 때 엄마를 여의고 바쁜 아빠를 대신해 할머니 손에서 키워졌다. 그녀의 혈통은 엄연히 중국과 한국에 걸쳐져 있지만, 할머니와 아빠의 절대적 영향으로 중국계 미국인 문화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성인이 되어 비로소 한국에의 정체성도 찾아갈 수 있었다.
10대 초때부터 랩을 시작했고 '아콰피나'라는 예명도 10대 중반에 만들었다. 실제하는 생수 브랜드 이름에 '거북하다, 서툴다'의 뜻을 가진 영단어를 결합·변형시킨 말장난으로, 그녀의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시니컬하고 예민하기도 한 복잡다단의 정체성을 드러낸 예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12년 여성의 성기를 소재로 한 자작 랩이 유튜브에서 크게 히트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이후 꾸준히 곡을 내고 TV와 영화에 출현하다가 2018년 <오션스 8> 주연으로 발탁되어 또 한 번 크게 이름을 알렸다.
2018년 이후 아콰피나의 필모는 그야말로 쾌속질주, 특히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페어웰> <앵그리버드 더 무비 2> <쥬만지: 넥스트 레벨> 등에서 활약했고, 앞으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상치 앤 레전드 오브 텐 링즈> <인어공주> 등의 메이저 영화 등에서 활약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2020년에는 <페어웰>을 통해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아시안 최초의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았다. 21세기 할리우드 최고의 아시안 스타로 우뚝섰다. <페어웰>이 어떤 영화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할머니를 위한 하얀 거짓말
빌리는 뉴욕에서 중국계 미국인 이민자 가족의 딸로 살아간다. 중국에 사는 할머니와 자주 통화를 하는 걸로 봐선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까지 할머니 손에 키워진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할머니의 여동생, 즉 빌리의 이모 할머니한테서 소식이 전해진 듯한데 할머니가 폐암 4기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드리고 바로 할머니를 뵈러 가야 한다는 빌리를 만류하는 부모님, '사람을 죽이는 건 암이 아니라 공포'라는 이유였다. 그리고 표정 관리가 안 될 빌리는 가지 말고 부모님만 가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큰아들의 아들이 결혼한다는 걸 핑계 삼아 가족들이 모여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뵙기로 했다. 결혼한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가족들만 모여 조촐하게 보여주기 식으로 치르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가족들이 모이기 전에 이미 다 예약해 놓고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결정했다.
할머니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보내고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고자 모인 가족들은 난감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게 되었지만, 할머니의 뜻을 거스를 순 없었다. 호기로운 할머니의 성격도 한몫했지만, 티를 내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주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가 25년 이상 산 빌리는 이 상황이 점점 불편하게 느껴지고 가족들과 소소하게 부딪힌다. 할머니가 본인의 몸 상태를 알게 될 수 있는 위기 상황을 겪기도 한다. 그들은 무사히 가짜 결혼식을 치르고 거짓말을 끝까지 지켜 낼 수 있을까?
경계에서 난감한 고민을 이어가다
영화 <페어웰>은 중국계 미국인 룰루 왕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는데, 영화 속 빌리가 그 자신이 아닐까 싶다. 그런가 하면, 빌리 역을 맡은 아콰피나의 실제 삶과도 이어지니 좋은 각본과 좋은 연기가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그걸 반영한 듯 영화는, 전 세계 영화제에서 자그마치 157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33관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영화 <미나리> 논란과 같은 맥락으로 <페어웰>도 미국 영화로 인정받지 못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뜨는 어리둥절한 메시지, '실제 거짓말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가 재밌고 신선하게 다가왔다가 영화가 끝나면서 되새겨 보면 슬프게 다가오는데 이쯤 되면 고민의 영역으로 확장될 터다. 부정의 기운이 다분한 '거짓말'이지만 할머니를 위한다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입장과 선의의 거짓말도 결국 거짓말이라는 입장이 대립하고,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양과 중국·일본(할머니의 큰아들은 일본으로 이민)으로 대표되는 동양의 의견이 충돌하며, 무엇이 진정 할머니를 위한 길인가를 고민한다.
제목 'farewell'은 '작별(인사)'의 의미를 가지지만 'fare well'은 '잘 해나간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가족 입장에서는 할머니께 작별 인사를 건네지만 할머니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와 다름 없이 잘 해나가고자 할 뿐이다. 할머니도 가족들에게 그리고 자신의 삶과 작별 인사를 하고 싶지 않을까? 그렇게 하는 게 법적으로든 도의적으로든 맞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몸은 미국에 속해 있지만 마음만은 중국으로 향하는 빌리로선 경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난감한 고민을 이어가는 게 역력하다.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영화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소소하게 대립하고 충돌하는 의견과 사상과 문화들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거나 치우쳐 옹호하지 않는다. 나름대로의 합당하고 확고한 이유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에 충분하게 마련되어 있다. 하여, 둘다 이해하지만 또 둘다 이해하지 못하는 빌리의 고뇌가 일리 있게 다가오며 공감을 얻는다.
'글로벌' '지구촌'이라는 단어를 내세우기에도 엄할 정도로 모든 방면에서 매우 밀접해진 지구이지만, 나름의 역사와 언어와 문화가 존재하는 나라와 지역권이 존재하기에 파생되는 고민들이 있다. 과연, 완전히 정반대의 이해 관계와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가치가 대립하고 충돌했을 때 서로를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게 다름 아닌 '가족' 내에서였을 땐 더욱 어려울 테다.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묻어 버리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여, <페어웰>은 '알콩달콩' 또는 '티격태격' 정도의 외형을 가진 가족 이야기로 비춰지지만 그 이면엔 참으로 풀기 힘든 거대한 이야기가 함축되어 있다. 매우 유머러스한 이야기로 재밌게 즐길 수 있지만, 매우 어려운 이야기로 심각하게 고민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추구하고 또 던지는 질문의 형태와 똑 닮아 있다. 규정하지 않고 제단하지 않으며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나름의 답을 고민해 보게끔 하는 것. 정답 없는 질문에 당신은 어떤 해답을 추려 볼 것인지? 감독은 답을 내리기 힘들다던가 답을 내릴 수 없다는 답 또한 상정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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