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속물들>
영화 <속물들> 포스터. ⓒ(주)삼백상회
유명 팝아트 작가 찰스 장의 작품을 대놓고 차용한 '차용미술'로 당당하게 활동하는 미술가 선우정, 제목도 <표절 1> <표절 2> 등이다. 참신하다면 참신하달 수 있는, 나름의 전통과 계보가 있는 미술 방법이랄 수도 있겠지만, 누가 봐도 모사이고 표절이고 베낀 것이다. 결국 그녀는 어렵게 잡은 전시회에 방문한 찰스 장을 가격해 고소를 당한다.
한편 그녀는 애인 김형중와 동거 중인데, 사실 돈이 없어 얹혀사는 거나 다름 없었다. 고소를 당하든 말든 주저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녀 앞에 유민 미술관 큐레이터 팀장 서진호가 나타나 촉망받는 신진 작가들 특별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받아들이는 선우정, 그들은 잠자리까지 갖고 가까워진다. 와중에 느닷없이 선우정의 고교 동창 탁소영이 나타나 선우정, 김형중, 탁소영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유민 미술관 총감독 유지현은 서진호를 내치고 그 자리에 후배 김형중을 앉히려 한다. 기자로 일하고 있는 김형중은 그 제안을 받아 들인다. 서진호는 극구 버티며 김형중과의 기묘한 투 팀장 체제를 이어간다. 선우정은 찰스 장과의 재판에서 패하며 전시회도 끊겨 서진호에게 기댈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하필 서진호와 경쟁하는 이가 애인 김형중이라니... 탁소영은 김형중을 유혹하고, 선우정은 유지현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려 하는데... 이 5명 안에 도사린 욕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 관계의 앞날은?
신정아 사건을 모티브로
영화 <속물들>은 신아가, 이상철 감독 콤비의 2번째 장편영화이다. 2011년 <밍크코트>로 장편 데뷔를 한 그들은, 이듬해 박정범 감독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 <어떤 시선>을 내놓고 실로 오랜만에 뭉친 것이다. 독립영화 치곤 꽤 이름이 있는 배우들이 이름을 올렸는데 유재명, 유다인, 송재림, 심희섭 등이 그들이다. 영화를 향한 신뢰요소를 상당 부분 충족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영화의 모티브가 되는 사건 또한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2007년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신정아 사건'이다. 동국대 교수였던 그녀는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며 '미술계의 신데렐라'로 불렸는데, 하루아침에 학력 위조와 공금 횡령과 정계로비 스캔들로 무너져 모든 걸 잃고 감옥에 간다. 석방 후 자전 에세이 <4001>을 써내 다시 한 번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영화 속 선우정이라는 캐릭터가 신정아에서 나왔을 것이다. 큰 틀에선 미술계 이야기이지만, 다른 건 선우정은 큐레이터가 아닌 미술작가라는 것. 오히려 실제보다 범죄에 중하는 짓을 한 가지 더 붙여놨다. '차용미술'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용미술은 엄연히 존재하는 방법론이자 사조이다. 단, 그 과정의 끝에 명명백백한 새로운 가치가 생겨나야 하겠다. 영화에선 선우정의 일방적이고 무가치한 주장으로 보인다.
진짜 속물은 누구인가
영화는 차용미술이라는 이름의 표절 작가 선우정의 우여곡절 치열하고 아득바득 치졸한 욕망의 무분별한 발산과 그녀를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보다 더럽고 비열한 욕망의 분출이 큰 두 축을 이룬다. 선우정을 향한 이해불가의 물음과 인색한 조롱의 시선이 점차 여타 인물들을 향한 한숨과 욕지거리로 변하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스레 진짜 '속물'은 누구인가 찾게 된다.
사실 영화에서 차용미술이니 표절이니 하는 건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능력이 모자란 미술작가 선우정이라는 캐릭터가 욕망을 발산하는 방법의 하나로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리라. 그녀의 목적은 오직 하나, 미술계에서 살아남아 명성을 얻고 돈을 많이 벌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발버둥 치는 모습이 남일처럼 느껴지거나 보이지만은 않는다.
비록 방법은 잘못 되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도와줄 사람도, 끌어줄 사람도, 꽂아줄 사람도 없이 그저 열심히 하며 버티고 있을 뿐, 다른 방도가 없다. 하여, 현실적으론 선우정을 비호할 수 없기는커녕 강력히 매도해야 하지만 영화적으론 왠지 짠해 응원하고 싶어진다. 태생부터 대놓고 속물인 그녀가 다른 속물들보단 차라리 낫지 않겠나 하면서 말이다.
욕망으로 점철된 인물들의 면면
'약자' 선우정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면면을 들여다 보면 가관도 아니다. 두두러지진 않지만 속물의 최종보소와 같은 유지현은 진정 '나쁜 놈'이 아닐까 싶다. 그는 저 위에서 모든 걸 좌지우지하며 본인 손엔 똥도 피도 묻히지 않는다. 성인군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잘 숨겨왔던 선우정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듯한 탁소영 또한 한몫하는 속물이다. 선우정이 본인 스스로 속물임을 드러낸다면, 탁소영은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두고 속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다. 하여, 선우정의 욕망은 탁소영을 향하지 않지만 탁소영의 욕망은 선우정을 향한다.
여기 은근슬쩍 속물인 두 사람이 있다. 선우정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듯하지만, 유지현에게 놀아나기도 한 김형중과 서진호이다. 그들은 선우정과 연인과 내연 관계로 얽혀 있지만, 사실 유지현의 대변인이자 적대 관계로 얽혀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유지현의 유민 미술관 팀장 자리를 두고 척을 둔 두 사람은, 유지현의 미술 권력 유지 대리전을 치르는 것이다.
영화는 진중한 드라마로 욕망의 치열함을 최대한 발휘시키는 대신, 블랙코미디 요소를 적절히 섞어 욕망의 치졸함을 최대한 발휘시킨다. 고로,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지 않으니 의도는 성공적으로 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허무하면서도 찰진 대사와 보는 사람만 웃기게 하는 무표정한 표정이 압권이다. 욕망이란 게 하등 진지할 것 없이 이리도 하찮은 것이구나 하고 저절로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린 누구나 속물일 테지만 누구도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지 않나. 이 욕망의 화신인 속물들의 면면들을 재밌게 대하며 은근히 인지하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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