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밤의 문이 열린다>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 포스터. ⓒ씨네소파
도시 외곽 동네, 공장에서 일하는 혜정은 3명이 방 한 칸씩 사용하며 쉐어하는 집에서 지낸다. 그녀는 민성한테 고백을 받는다. 그녀는 연애나 결혼엔 관심이 없다. 일만 해도 피곤하고 혼자가 편하다. 10월 10일 그녀는 잠에 들고 깨어 보니 유령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후 그녀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한다. 10월 11일이 되어야 하는데, 10월 9일이 되는 식이다. 그렇게 추석 당일인 10월 4일까지 역행한다.
"내일이 없는 유령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왔던 길을 반대로 걷는다. 잠들어 있던 모든 어제의 밤을 지켜본 후에야 걸음을 멈출 수 있다. 멈춰선 끝에 유령은 문 하나를 만난다. 언제든 열 수 있었지만 열지 못했던 밤의 문을." 그녀는 여전히 유령인 채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지만 점차 진실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이 유령이 된 이유, 즉 삶과 죽음 사이에서 헤매게 된 경위를 훑는다. 그에 얽혀 있는 사람들의 사연도 알게 된다. 그러며 혜정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혜정과 한 집에서 사는 지연과 그녀의 동생 효연이 있다. 효연도 혜정처럼 가난하지만, 효연은 혜정과는 달리 삶에의 욕망이 엄청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사채업자 광식에게서 많은 사채빚이 있다. 그녀는 어느 날 우연히 혜정에게 상당한 돈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가 하면, 동네에 어슬렁거리며 아빠를 찾는 소녀 수양이 있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그녀는 폐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어느 날 사고를 당한다.
한국 독립영화 소빅뱅 틈바구니에서
지난 8월, 한국 독립영화가 소빅뱅을 이루었다. <우리들>로 독립영화계의 히로인이 된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과 정식 개봉 전 전 세계 유수 영화제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김보라 감독의 <벌새>가 일주일 새로 개봉해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낸 것이다. <우리집>은 5만 명을 넘겼고, <벌새>는 10만 명을 넘겼다. 독립영화로선 특출난 성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틈바구니에서 먼저 개봉한 한국 독립영화가 있다. 다수 단편영화들로 이름을 알려온 유은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밤의 문이 열린다>로, 지난해 치러진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장편 관객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혜정과 효연의 두 주연 캐릭터를 맡은 한해인 배우와 전소니 배우가 눈길을 끈다.
한해인은 데뷔한 지 얼마되지 않는 배우로 주로 단편영화에 출연하다가 이 영화를 계기로 장편에 진출했다. 안정적인 연기, 열정적인 출연으로 앞으로가 기대된다. 전소니는 메이저 영화 단역으로 출발해 메이저 영화 주연까지 꿰찬 배우이다. <아저씨> 이정범 감독의 <악질경찰>이 그 작품인데, 작년 독립영화계를 수놓은 작품인 <죄 많은 소녀> 주연으로도 얼굴을 비춘 적이 있는 전소니 배우의 인상적인 연기를 기대한다.
미스터리 판타지 드라마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는 미스터리 판타지 드라마 장르를 표방한다. 생전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유령처럼 지냈던 혜정이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고선 유령이 되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며 자신과 효연과 수양의 일을 목격하고 행동한다. 살아 있을 때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들이 유령이 되어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다.
유령이 된 혜정이 거꾸로 시간을 거스르는 이유는 영화의 처음과 끝의 내레이션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내일이 없는 유령, 생각해 보면 실제 유령에게 내일은 없을 것이지만 영화 속 유령처럼 살아온 혜정에게도 내일이 없다. 유령에게 내일은 사라짐과 같다. 하여 시간을 반대로 걷는다. 그 끝에 다다른 유령이 만난 밤의 문은, 혜정에게 자기 밖의 세상이다. 아무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혜정이 관심을 두게 되는 세상.
그 세상에는 살아생전 바로 옆에 있었고 조금만 관심을 두었다면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고 또 죽지 않았을지 모를 효연과 수양이 있다. 혜정은 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의 현실에서 벗어나 유령이 되어서야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으로서의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가 우리에게 던지는 바는 비인간화되어 가는 인간에의 안타까움이다. 혜정을 보고 있노라면 확실히 전해진다.
비안간화되어 가는 인간, 그리고 환경
영화는 비인간화되어 가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환경에의 서글픔도 비춘다. 효연을 보고 있노라면 사무치게 전해진다. 재개발 지역에 살며 빛 더미에 앉은 해체된 가족상의 단면을 그리며, 그런 환경에선 절대 살 수 없는 욕망 어린 개인의 단면이 담겨 있다. 그는 잘못한 게 없다. '500만 원'이 없어서 사채를 썼고 오랫동안 갚지 못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뿐이다.
그런가 하면, 수양은 순수하고 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이다. 세상 때가 묻지 않은 어린이들은 인간 아닌 동식물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영화에서 수양은 유령이 된 혜정의 이야기를 듣고 볼 수도 있다. 이는 한편 혜정이 살아생전 수양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수양은 혜정의 말을 들어주는,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류시화 시인의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은 제목이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이 제목이 발하는 안타까움과 성찰을 영화로 변형 또는 승화시키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스터리 판타지 장르의 속성을 띄면서도, 먹먹한 여운이 오래토록 남는 드라마로도 손색이 없다.
영화는 마지막 즈음 처음으로 돌아가 다르게 진행되는 혜정과 민성의 대화를 통해 궁극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들의 대화에서 피어난 조그마한 희망의 불씨를 살려 널리 퍼뜨릴 수 있으면 좋겠다. "몰랐는데, 많이 힘들었겠어요. 워낙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서 누구한테 힘이 되어주지도 못하고." "괜찮아요. 혜정 씨 매일 자기 자리에서 되게 한결 같이 일하시잖아요. 혜정 씨를 보고 있으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내 삶이 초라하고 헛된 게 아니라는 살아가는 게 그냥 그 자체로 빛이 나는 거구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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