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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모든 엄마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헌사, 하지만 끔찍한 현실 <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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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툴리>


영화 <툴리>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마를로(샤를리즈 테론 분)는 두 아이를 키우는 임산부다. 큰딸은 의젓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리기에 관심과 사랑을 주어야 하고 챙겨주어야 한다. 둘째 아들은 조금 특별하다, 조금 다르다. 예민한 게 정도를 지나칠 때가 많다. 와중에 그녀는 이제 곧 세 아이의 엄마가 될 운명이다. 육아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셋째가 태어나자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전쟁에 돌입한다. 큰딸을 최소한으로 챙기고 둘째 아들에게는 여전한 관심을 쏟는 와중에, 정녕 밤낮 없이 셋째 키우기가 계속된다. 와중에 남편은 아이들과 적당히 놀아주고는 게임 삼매경이다. 끝이 없을 것 같고 변함도 없을 것 같다. 사소한 것부터 큼직한 것까지 모든 게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나'라는 존재는 없다. 


마를로의 오빠는 자신들이 야간 보모의 손에 키워졌다며 마를로에게 야간 보모를 권유한다. 어떻게 되든 아이는 엄마 손에 키워져야 한다고 생각해 완강히 거절하는 마를로, 하지만 나날이 지쳐가며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가는 것 같다. 결국 그녀는 오빠의 권유를 받아 들인다.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 분)가 등장한다. 


툴리는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가 케어해줄 거라 말한다. 이 당돌함 또는 당당함이 처음에는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졌지만 점점 믿음직하게 와닿는다. 마를로는 툴리에게 마음을 열고 아이를 맡기며 한껏 여유로운 나날을 만끽한다. 하지만 툴리의 정체는 가히 궁금하다. 그녀는 누구이길래 마를로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마를로 본인까지 육체적, 정신적으로 케어할 수 있는 것인가? 


끔찍한 현실을 그려낸 다큐멘터리


끔찍한 현실을 그려내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 <툴리>는 모든 엄마에게 보내는 아름다운 헌사이자 끔찍할 수 있는 현실을 끔찍하리만치 여지없이 그려낸 다큐멘터리이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치열했던 그때 D-Day를 지극히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찬사를 받았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육아 전쟁' 편을 보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툴리>의 그것이 더 끔찍했다. 


데뷔 후 쉬지 않고 열일 중인 샤를리즈 테론이 세 아이의 엄마 역을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22kg나 찌우는 투혼을 불살랐던 게 이슈가 되는 와중에, 이 영화의 제작도 한 그녀는 <몬스터>의 에일린, <매드맥스>의 퓨리오사를 잇는 대반전 변신 캐릭터로 분했다. 이 영화들에서 그녀가 공통적으로 변신 공력에 맞먹는 연기 공력을 선보였듯, <툴리>에서도 활약을 펼쳤다. 


수없이 많은 드라마, 영화에 얼굴을 비치며 '찌질남'의 대명사처럼 인식되는 론 리빙스턴이 마를로의 남편 드류로 희한하게 중심을 잡는 와중에, 툴리 역의 맥켄지 데이비스는 특유의 저음과 표정으로 샤를리즈 테론과 훌륭한 짝을 이룬다. 


한편 감독 제이슨 라이트맨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여전히 젊은 나이이지만 10대 때 연출 데뷔를 한 만큼 다수의 연출작을 보유한 그는, 우리에게 <주노> <인 디 에어>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코미디가 가미된 드라마에 특화된 그는, 지극한 현실의 치명적일 수 있는 부분들을 잘 캐치해내어 건드려 내보인다. 그의 영화들을 보고는 생각지도 못한 점을 인지하게 되며 감탄을 금치 못할 때가 많은데 <툴리>도 그러하다. 


참담, 경악, 슬픔을 수반시키는 엄마의 모습


엄마의 모습은 참담, 경악, 슬픔을 수반시킨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남자, 남편으로서 아직 아이는 없지만,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지만 이 영화에서 마를로로 보여지는 엄마의 실질적인 모습들을 보고 참담, 경악, 슬픔의 감정을 복잡다단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전쟁 같은 아이들 돌봄의 광경은 참담함을 야기시켰고, 밖으로 드러내기 힘든 엄마의 모습은 경악을 불러일으켰으며, 반전을 통해 보여준 여자, 엄마, 아내의 복합적인 자장에서는 슬픔이 밀려왔다. 


내 한 몸 온전히 건사하기 힘든 게 세상사는 이치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와 차라리 아무것도 못 했으면 좋겠는 아이와 그래도 아이는 아이인 세 아이를 온전히 키워낸다는 건 한없이 불가능의 영역에 수렴된다. 매일같이 한시도 쉼없이 똑같은 전쟁을 치르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이루 말할 수 없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담 그 자체이다. 영화의 시작은 참담이다. 


영화는 점차 그 참담함을 들여다본다. 디테일들은 경악이다. 물론 아는 사람들에게는 평범함의 일환일 테다. 그럴수록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경악일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줄 젓을 짜는 유축기 사용 장면은, 사용자 엄마의 태연하고 하릴 없는 모습과 대비해 충격을 준다. 제때 젖을 짜주지 않아 가슴 아파하는 엄마의 모습도 그렇다. 실로 많은 걸 배운다. 충격과 경악은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슬픔을 수반한다. 


이 영화가 주는 슬픔은 말할 수 없는 반전과 함께 온다. 말할 수 없지만 영화를 보면 2/3 지점에서 갑자기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나올 때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바로 그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가장 이해되고 가슴에 와닿게 된다. 그러며 세 아이의 엄마가 여자이자 아내라는 걸 한순간에 깨닫게 된다. 


치유와 위로의 긍정적 목적


영화는 치유와 위로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영화 <툴리>의 한 장면. ⓒ리틀빅픽처스



영화의 참담-경악-슬픔의 감정라인은 당사자에겐 치유, 보는 이들에겐 위로의 궁극적 목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장치이다. 당사자인 주인공 마를로, 마를로로 대변되는 '엄마'는 자신의 엄마로서의 모습을 누구한테고 보여주기 힘들다. 거기에 부정이나 긍정, 무관심을 보이는 모든 사람들의 대응이 어떤 식으로든 상처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마를로는, 샤를리즈 테론은 가감없이 대신해주었다. 그 자체로 치유다.


보는 이들이 이 영화에, 마를로의 모습에 마냥 감동 종류의 감정을 느끼긴 힘들 것이다. 그런 현실은 애써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맞대면 했을 때는 나서기 힘들기에 어떤 식으로든 외면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비록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져왔다시피 했지만 '영화'로서의 함의를 잊지 않고 보는 이로 하여금 위로의 감정 영역에 들게 한다. 아무리 가까워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이 영화가 대신해주는 치유의 역할에 묘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조금은 이기적인,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위로. 


사실, 이 영화의 대상은 엄마가 아닐 것이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엄마에게 이 영화는 또 하나의 현실일 뿐이라서 공감 어린 끄덕끄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혹은 끝나지 않더라도 엄마는 아이를 보러 가야 한다. 


반면, 당장의 엄마가 아닌 모든 사람은 이 영화를 반드시 봐야 한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실상을 한순간, 한 장면의 디테일을 통해서라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달라진다. 달라져야 한다. 엄마를 보는 시선이. 나아가 아내를 보는 시선이. 궁극적으로 여자를 보는 시선이. 더 이상 '여'전사(女戰士)는 없다. 전사(戰士)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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