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저니스 엔드>
영화 <저니스 엔드> 포스터. ⓒ(주)스톰픽쳐스코리아
지난 11월 11일은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던 유럽의 강대 제국들이 벌인 가장 야만적이고 처참했던 전쟁,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의 협상국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의 동맹국 총합 사상자가 4000만 명에 육박하는 세계 대전이었다.
지금의 우리에게 전쟁이라 하면 걸프전쟁, 베트남전쟁, 6.25전쟁, 2차 세계대전 정도가 당장 떠오른다. 1차 세계대전은 너무나 먼 일처럼,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이 전쟁에 대해 아는 거라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자국 황태자가 세르비아 왕국의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되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전쟁 기간 대부분을 참호에서의 밀고 당기는 참호전으로 일관했다는 정도이다.
이는 전쟁에서 '전장'과 '전투'에만 시선을 국한시켰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일 수 있다. 전쟁엔 이밖에도 다양한 시선들이 담겨 있다. 1차 세계대전 콘텐츠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소설이자 영화가 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이 그것인데, 독일의 시선으로 전쟁에 희생된 어린 병사들의 전장 일상을 담았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영광의 길>도 있다. 전쟁에서 영광 따윈 있을 수 없다는 역설을 담았다.
<저니스 엔드>는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에 즈음에 개봉한 전쟁 영화이다. 1차 세계대전을 기억하고 반추하는 시선은 미시적일 수밖에 없고 방법은 처참할 수밖에 없고 결론은 '반전(反戰)'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 또한 가히 그 처참함을 기반으로 미시적으로 접근해 반전을 말한다.
제1차 세계대전, 영국군 최전방
제1차 세계대전 영국군 최전방의 사흘을 그렸다. 영화 <저니스 엔드>의 한 장면. ⓒ(주)스톰픽쳐스코리아
때는 1918년 3월 18일, 장소는 프랑스 동부전선 최전방 생캉탱, 오랜 기간 동안 참호전을 거듭하는 와중 독일군의 총공세가 있을 거란 소식이 날아든다. 이에 영국군은 한 중대 당 6일 씩 돌려가며 최전방을 지키게 한다. 하필 그때 스탠호프 대위(샘 클라플린 분)의 C중대가 '당첨'된다. 그는 최측근 참모이자 보좌관 오스본 중위(폴 베타니 분)과 함께 대원들을 데리고 최전방으로 향한다.
그야말로 '사시(死時)'에 '사지(死地)'로 오게 된 그들, 부디 독일군의 총공세가 다음주에 시작되기를 바랄 뿐이다. 한편, 이제 막 군사학교를 마치고 전장에 배치된 롤리 소위(에이사 버터필드 분)는 옛 친구 자청해 스탠호프 대위의 C중대로 향한다. 기대로 들떠 있는 롤리와는 다르게, 예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자신을 내보이기 싫은 스탠호프는 반기지 않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총공세의 '그때'로 성큼 다가간다. C중대는 일반 병사들이 아닌 장교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스탠호프는 투철한 책임감으로 존경받는 중대장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심한 압박감 때문에 알콜중독자가 되었고, 히버트는 벌벌 떨며 아무 일을 못하는 것도 모자라 전장에서 이탈하려 한다. 반면, 모두에게 존경받고 모두를 챙겨주는 버팀목 오스본이나 누가 봐도 군인이구나 하겠는 블로터 같은 이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아무것도 모르고 흥분 상태에 있는 롤리도 있다.
그런 가운데 상부로부터 이보다 더할 수 없는 처참하고도 의미없지만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명령이 내려온다. 사지로 와서 공포에 떨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은 이들에게 더 빨리 '죽으러 가'라고 등을 떠미는 명령. 우리 모두 그 끝을 알고 있지만, 그래서 더 끔찍한 이 C중대의 끝은?
끝으로 가는 C중대의 사흘
이 영화는 매우 섬세하고 예민하게 심리를 그려낸 '심리영화'이다. 영화 <저니스 엔드>의 한 장면. ⓒ(주)스톰픽쳐스코리아
영화는 'C중대의 끝'에 방점을 찍기보다 '끝으로 가는 C중대'에 방점을 찍는다. '끝'에 방점을 찍었다면, 그래서 그 장렬한 전장을 그려냈다면, 영화는 여지 없는 블록버스터 전쟁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C중대의 끝이 역사에 길이남을 처참한 공방전의 시작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반면, 'C중대'에 방점을 찍은 영화는 블록버스터 전쟁영화 아닌 매우 섬세하고 지나치다 할 정도로 예민하게 심리를 그려낸 심리영화로 자리잡았다. 극중 롤리 소위가 하는 말마따나 '시험을 앞둔 수험생'마냥 죽을 게 분명한 끝을 기다리는 그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다.
많은 총이 등장하지만 총을 쏘는 장면은 없다. 으레 많은 전술전략적 고민들이 등장할 것 같지만 몇 장면 없다. 마땅히 상하 또는 동료 간의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지만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중대를 이끄는 상급자들의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태반을 채우고 전장 아닌 지옥을 탈출하고 싶어 몸부림 치는 다양한 모습들이 보일 뿐이다. 전쟁에 만연한 광범위한 의미없음, 전쟁의 현실적인 비인간화를 비유적으로 비춘다.
때는 제1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 독일군의 춘계공세 직전이다. 러시아가 내전으로 이탈하며 동부전선에서 크게 승리한 독일이지만, 썩어 곪고 있는 내부 사정으로 서부전선에 마지막으로 모든 역량을 집중하게 된다. 지난 3년간 소규모 국지전만 이어진 전쟁의 양상이 180도 바뀌는 시점, 당사자들이 받은 정신적 타격은 어느 정도일까.
모두 언젠가 '그때'가 올 거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점을 떠맡고 책임질 이들이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군가는 차라리 그때가 빨리 왔으면 하고 바란다. 이 지옥에서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미쳐버린 것일까.
끔찍한 상황에 처한 군인 아닌 '인간'
이 영화는 아무도 포착하지 못한 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명작 '전쟁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저니스 엔드>의 한 장면. ⓒ(주)스톰픽쳐스코리아
그동안 수많은 전쟁영화들을 섭렵했고, 개중 많은 영화들이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라 해도 충분했다. 미시적 블록버스터와 거시적 블록버스터를 중심으로, 단순히 전쟁이라는 소재와 주제를 넘어 국가와 철학과 인간까지 논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특별하다. 어떤 상황에 처한 인간을 그렸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꼭 전쟁이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러 하기에 <저니스 엔드>는 전쟁영화의 한 획을 긋는 영화임에 분명하다. 전쟁이 주체가 되어 전쟁 바깥을 바라보는 여타 전쟁영화들과는 다르게, 상황과 인간이 주체가 되어 전쟁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처럼 처절하게 전쟁을 실감하게 된 영화가 일찍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다. 설령 군인이라고 하더라도 전쟁을 경험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전장에 선 군인들 이야기를 다룸에 있어 체험실제적 공감을 얻기 보다 다른 류의 공감을 얻고자 하는 게 당연하다. 반면, 이 영화는 총알도 빗발치지 않을 뿐 더러 포탄도 간간히 터질 뿐인 참호 안이 주배경인 만큼 인간에게 집중하게 된다. '군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끔찍한 상황에 처한 '인간'.
전쟁영화만이 주는, 줘왔던 다양한 종류의 스펙터클을 기대한다면 이 영화에 실망할지 모른다. 아니, 이 영화가 주는 치밀하고 섬세한 심리 전쟁이 또 다른 종류의 스펙터클을 선사할지 모르겠다. 치열한 드라마를 느끼고 싶다면 이 영화를 꼭 보시길.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경탄해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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