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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쇼'로 양산된 싸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피해자... <안개 속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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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안개 속 소녀>


영화 <안개 속 소녀> 포스터. ⓒ미디어 마그나



형사 보겔(토니 세르빌로 분)은 사고를 일으킨 채 하얀 셔츠에 피를 묻히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경찰은 정신 감정을 위해 정신과 의사 플로렌스(장 르노 분)을 부른다. 보겔은 플로렌스에게 이곳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의 전말을 들려준다. 


외딴 산골 마을, 성탄절을 이틀 앞둔 새벽 한 소녀가 사라진다. 박수만 몇 번 쳐도 주민들이 나와서 쳐다볼 정도로 조용하고 또 서로가 서로를 속속들이 알 정도로 밀접한 동네이기에 그 파장은 생각보다 크다. 


도시에서 수사를 하러온 형사 보겔은 이 사건이 그냥 묻혀버릴 게 뻔하다는 걸 알아채고는 소녀의 부모와 동네 경찰을 설득해 '쇼'를 시작한다. 그는 언론이 벌 떼 같이 몰려오게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아는데, 얼마전 테러 사건에서 잘못 이용하는 바람에 위기에 처한 만큼 신중하지만 간절하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 소녀를 향한 관심은 보겔의 쇼가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하찮은 의심만으로 악마이자 괴물로 전국민에게 찍히게 되는 용의자 교수 마티니(아레시오 보니 분)를 향한 관심으로 어느덧 바뀐다. 


기대 반 걱정 반, 고품격 스릴러 


기대 반 걱정 반,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영화 <안개 속 소녀>는 범죄학과 행동과학 전문가 출신으로 스릴러 소설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이탈리아 작가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영화 시나리오로 구상했다가 소설로 내놓았고 다시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각본에 참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연출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에 부응하는 면이 반이고 걱정을 떨치지 못한 면이 반이었다. 영화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적자임을 천명하다시피 한 원작 작가이자 감독이기도 한 도나토 카리시의 메시지가 분명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는 에코가 다양한 언어와 학문으로 평생을 천착했던 질문 "거짓은 누가 왜 만들어내고, 대중은 어떻게 거짓에 속는가"를 그만의 범류인 범죄학과 심리학적으로 치열하게 접근한다. 


한편 영화는 고품격 범죄 스릴러를 표방하며 안개 낀 산골 마을이라는 음울한 분위기와 잡으려는 자, 잡히지 않으려는 자 간의 치열한 두뇌싸움을 내보이려 한다. 더불어 이중 삼중으로 쳐놓은 복선과 그에 따른 반전 또한 내보이려 한다. 혹자는 문학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지만, 종종 과해서 지루하고 비(非)영화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영화 외적으로, 어렵게 접근해야 '재밌다'


이 영화를 재밌게 보려면 영화 외적으로 어렵게 접근해야 한다.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안개 속 소녀>를 그나마 '재미있게' 보려면 아이러니하게도 꽤나 어렵게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영화 내적이 아닌 영화 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럴 때 이 영화는 굉장히 훌륭한 사례로, 수단으로,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보겔이 자신의 영위를 위해 수단으로 이용하는 언론, 언론은 핫한 시청률을 위해 대중영합적인 소재를 부풀려 내보인다.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은 피해자일 테지만,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용의자 또는 범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용의자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관심'을 끌지 못하며 관심을 끌지 못하면 '작은' 사건에 머물고 말 것이다. 


모두(경찰, 언론,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큰' 사건이 되어야 하기에, 용의자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용의자의 '악마화' 또는 '괴물화'가 시작된다. 감정을 자극하는 피해자의 사례를 내보이는 이유도 그 작업의 일환이다. 


결국 피해자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안개 속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다. 피해자가 주체가 되기는커녕 객체가 되지도 못한 채 설 자리도 없어진다. 그 사이 모두의 시선은 경찰과 용의자 간의 싸움으로, 용의자의 신상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진 후,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한 채 끝난다. 이쯤 되면, 용의자는 용의자일 뿐 경찰과 언론이 진짜 범인이자 가해자가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많은 걸 담아낸 영화


많은 걸 담아내려 했지만, 그게 독이 되었을지 득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위의 일례가 사건에서 관심이 쏠리지 않는 주요 주체의 치명적이고 슬픈 말로라면, 이제 말하고자 하는 건 사건에서 관심이 과도 하게 쏠리는 주요 주체의 논란적인 말로이다. 아직 범인으로 확정되기 이전의 용의자를 향한 과도한 관심, 그로 인해 순식간에 괴물이자 악마가 되어버리는 모습 말이다. 


우린 이런 경우를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종종 보아왔다. '알 권리'를 제1의 원칙이자 가장 중요한 신념으로 내세우면서 아무런 꺼리낌 없이 마녀사냥을 시전한다. 영화 <더 헌트>를 보면 더 없이 심도 깊게 또 조심스럽게 하지만 명확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보다 얇고 넓게 비춘다. 


사라진 피해자, 전국민의 관심을 받는 용의자, 사건을 주도하면서 영합하고 대결하는 경찰과 언론, 그리고 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안개 속 소녀>는 참으로 많은 걸 내보인다. 


보다 훨씬 디테일하고 유려할 소설에서 메시지와 캐릭터를 최대한 살려 영화에 내보이려 한 것 같은데, 할리우드 문법에 익숙한 관객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유럽 영화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너무 늘어진다는 느낌이 종종 한없이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행간과 자간의 늘어짐이라는 보기 불편한 느낌과 일종의 '여백의 미'라고 볼 수 있을 여유로운 느낌의 경계에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한 번 보면 영화의 전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두 번 보면 적어도 영화의 전부를 받아들일 순 있다. 온전히 콘텐츠를 받아들이고 싶다면 적어도 영화를 두 번 이상 보고 소설까지 섭렵해야 하겠다. 더할 나위 없는 고품격 스릴러를 한껏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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