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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아이들을 통해 아이들을 보여주는 마법 같은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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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프리다의 그해 여름>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 포스터. ⓒ디스테이션



더 이상 아이가 아니지만, 아이의 생각과 시선과 행동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아이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내가 아닌 아이들이 바라보고 대하는 무엇에는 관심이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아이는 특별하고 신기한 존재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짓게 하기도 하지만 분노를 일으키게 하기도 하는. 


어른들이 보기에 아이들은 참으로 답답할 존재일 것이다.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일삼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동물 아닌 인간인 바 어떤 식으로든 소통이 가능하다. 어른들은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아이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유추하고 내보인다. 아이들을 이해하려는 시도일까. 


창작 콘텐츠에 한해, 글과 그림 하다못해 사진은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다. 그것이 진짜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인지의 맞고틀림은 차치하고 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직접 보여주어야 하는 영상은 가히 힘들다. 아이들을 콘트롤하기 힘든 만큼, 아이들을 통해서 아이들을 보여주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어른의 시선 아닌 아이의 시선이 주가 되는 영화는 그 존재 자체로 위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표현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스페인에서 건너온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이 해냈다. 2016년에 개봉했던 한국 영화 <우리들>도 생각난다. 올해 개봉했던 <플로리다 프로젝트> <홈> 등이 아이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발 하나를 걸쳤다. 


엄마 잃은 소녀, 프리다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불꽃놀이가 한창인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밤, 여섯 살 난 여자 아이 프리다는 무심한듯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최근 엄마를 잃었다. 아직은 슬픔보다 공허함이 인 듯하다. 곧 엄마의 유언에 따라 시골의 외삼촌네로 간다. 다정하게 맞는 외삼촌과 외숙모 그리고 사촌동생 안나, 프리다는 여전히 무표정하다. 


한 가족이 된, 셋이 아닌 넷. 셋과 낯설지 않지만 인숙하고 친밀하지도 않은 프리다는 아이라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관심과 사랑을 원한다. 하지만 외삼촌과 외숙모는 다정하게 대할 뿐 그 이상의 무엇을 주진 않는다. 또는 못한다. 반면 안나는 당연한듯 그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공허함 아닌 외로움이 프리다를 장악한다. 


프리다의 외로움은 어느새 외삼촌과 외숙모에서 아빠와 엄마로 불리게 된 그들을 직접적으로 향한다. 통하지 않자 본능적인 시기와 질투를 동반해 안나로 향한다.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방법들. 이 또한 통하지 않으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무얼까. 공허함, 외로움, 시기와 질투의 시간을 지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엄마를 잃은 슬픔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건 언제쯤일까.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영화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아이가 행할 수 있는 감정표현은 많지 않다. 지극히 단편적이고 한정적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유추할 수밖에 없다. 한 아이의 시선이 지극히 들어 있는, 그래서 짐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프리다의 그해 여름>을 보면서도 상당 부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를 잃은 슬픔이 공허함, 외로움, 시기와 질투 순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짐작.


영화는 최선을 다한다. 아이의 시선을 따르며 아이의 감정과 생각을 유추하고 짐작하려고.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프리다의 얼굴만을 비춘다. 그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무표정하다. 그때마다 아주 미묘한 감정선이 흐른다. 그때마다 영화 밖으로 나와 프리다를 연기한 라이아 아르티가스에게 감탄을 하게 된다. 


프리다가 바라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지고 그녀의 생각 갈래가 어디로 퍼져가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영화의 핵심에 가닿아 있는 부분인데, 아이의 시선과 여러 감정들에의 짐작과 유추가 시줄과 날줄처럼 엮어진다. 아이가 지켜보는 모습을 우리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카메라는 프리다의 뒷모습을 흔들리며 쫓기도 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표정을 알 수 없고 감정선을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작디작은 뒷모습, 그 뒷모습을 미세한 흔들림이 감지되는 핸드헬드로 비출 때면 불안감이 엄습한다. 프리다의 어린 나이와 작은 모습이 거대한 슬픔에 안으로부터 흔들리는 것 같다. 


마침표 아닌 쉼표가 이어지기를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이 영화를 반드시 끝까지 지켜보고는 바로 처음부터 다시 볼 것을 권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프리다를, 아니 영화에 보여진 프리다의 감정선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아!' 하는 감탄사는 우리를 영화의 처음으로 이끌 것이다. 비로소 영화를, 프리다를, 아이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어느 면에서 '출중'하고는 거리가 먼 영화일지 모른다. 어느 면에서 '가장' 출중한 영화일지 모른다. 어느 면에 중점을 두는 건 보는 이의 자유지만, 감독은 후자에 방점을 찍었다. 그 면에는 절대적으로 '아이'가 있다. 프리다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아이가 전부는 아니다. 사실 그 부분도 이 영화의 '출중'에 큰 몫을 차지한다. 


프리다와 대면하는 외삼촌과 외숙모, 프리다가 바라보고 생각하게 되는 세상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그들 말이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프리다가 낯설지는 않지만 익숙하거나 친밀하지 않다. 그들도, 즉 어른들도 시간이 필요하고 연습이 필요하다. 영화는 아이의 시선에서 바로보면서도 어른의 입장을 놓치지 않는다. 


한정적인듯 참으로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 영화 <프리다의 그해 여름>, 부디 최대한 많은 것들을 찾아내어 깨닫는 기쁨을 누리길. 아이, 어른, 아이와 아이, 아이와 어른, 어른과 어른까지, 그 치밀하고 섬세하고 미묘한 관계들에 마침표 아닌 쉼표가 이어지기를. 프리다의 그해 여름이, 그 감정들의 앙상블이 계속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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