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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구원은 스스로 쟁취하는가 타인이 부여하는가 <더 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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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더 웨일>

 

영화 <더 웨일> 포스터. ⓒ (주)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대런 애러노프스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너무나도 어둡고 염세주의적이며 자극적이어서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린다. 앞으로도 그런 기조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그는 고통에 신음하는 주인공에게 집착하듯 집중하곤 하는데, 덕분에 주연을 맡은 배우들이 하나같이 한계를 뛰어넘는 연기를 펼쳐 보였다.

<마더!> 이후 5년 만에 돌아온 최신작 <더 웨일>도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의 스타일이 살아 있다. 어둡고 염세주의적이고 자극적이며 주인공에 집착하듯 집중한다. 덕분에 주인공을 맡은 배우의 인생 연기를 볼 수 있다. 이번엔 '브랜든 프레이저'다. 15년 전 <더 레슬러>로 미키 루크가 암흑기를 뒤로 하고 제2의 전성기를 열어젖혔듯 브랜든 프레이저도 그럴 거라 예상된다.

그도 그럴 것이 죽어가는 272kg의 거구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며 필모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엘비스>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완벽하게 연기해 낸 오스틴 버틀러에게 밀려 수상에는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인생 연기를 보여 주고도 남았다. 그가 아니라면 영화 <더 웨일>은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

 

죽어가는 272kg 거구에게 찾아온 사람들

 

온라인 대학에서 작문을 가르치는 찰리, 그는 272kg 거구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니 건강이 크게 안 좋다는 의미일 것이다. 친구이자 요양보호사 리즈가 매일같이 와서 찰리를 봐주며 제발 좀 병원에 가라고, 그러지 않으면 곧 죽을 거라고 해도 찰리는 꿈쩍하지 않는다. 그만의 절대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연히 찰리를 찾아온 새 생명 교단의 선교사 토마스는 찰리의 상태를 보고 그를 도와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리즈가 그를 내쫓아 버리는데 알고 보니 새 생명 교단 때문이었다. 그녀의 오빠이자 찰리의 사랑이었던 앨런이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교회(새 생명 교단)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곤 식음을 전폐해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찰리는 폭식으로 이렇게 되었다.

찰리에겐 또 한 명이 찾아온다. 다름 아닌 그의 딸 엘리, 8년 전 앨런과 사랑에 빠져 아내와 딸을 등진 후 처음 보는 것이다. 찰리는 자신이 죽고 나면 엘리에게 10만 달러가 훌쩍 넘는 돈을 전부 주고자 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것만이 그가 딸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 하지만 엘리는 그에게 폭언을 일삼고 모욕을 주저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엘리는 그녀의 엄마의 말마따라 '사악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찰리는 그런 엘리에게서 구원의 희망을 엿보는데…

 

소설 <모비 딕>의 그늘에 기대

 

영화 <더 웨일>은 소설 <모비 딕>의 그늘에 기대어 '구원'이라는 종교적 색채 짙은 개념에 빚을 지고 있다. 에이해브 선장이 흰고래 모비 딕에게 다리를 잃은 후 복수하겠다는 일념에 불타올라 다시 바다로 향하지만 결국 이스마엘을 제외한 모든 선원이 죽고 만다. 엘리는 에이해브 선장과 다름 아니다. 그녀는 몇 년 만에 만난 아빠 찰리를 증오하고 또 증오한다. 찰리는 엘리를 떠남으로써 엘리에게서 커다란 무엇을 빼앗았다.

<모비 딕>은 한때 소설이 아니라 고래 학술서로 분류되었을 만큼 고래·포경 묘사가 많고 자세하다. <더 웨일>도 마찬가지인데, 홀로 서는 것조차 힘든 찰리가 어떻게 일상을 영위하는지 자세히 묘사한다. 보고 있노라면 얼굴이 찌뿌려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초고도비만인을 극히 부정적으로 대상화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이리라.

에이해브 선장이 목숨 걸고 모비 딕을 찾아 죽이려는 이유가 과연 그놈에게 다리를 잃어서일 뿐일까? 훨씬 더 복합적인 이유가 있을 텐데, 참기 힘든 궁금증도 한몫하지 않을까 싶다. 나를 이렇게 만든 그놈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엘리가 기어코 찰리를 찾아간 것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증오가 얽힌 관심과 어쩔 수 없는 궁금증이 그녀를 그에게로 이끌었다.

찰리는 충분히 삶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수 있는 돈도 있다. 다만 결정적으로 의지가 없다. 앨런이 그들의 사랑 때문에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찰리는 가진 게 많지만 다 뒤로 하고 세상을 등지려고 한다. 딸 엘리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며 그녀의 사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한없이 두둔하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니 그녀를 진정으로 생각하진 않는 것 같다.

 

스스로 쟁취하는 '구원'에 대하여

 

그런 가운데 '구원'이라는 단어가 영화 곳곳에서 튀어 나온다. 새 생명 교회 선교사 토마스는 우연히 찰리네 집에 왔다가 죽어가는 찰리를 보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 한다. 필연적인 종말 이후 선택받은 144,000명만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를 믿게 하는 데 그가 생각하는 도움이다. 찰리로선 앨런이 믿었던 교리이니 토마스를 멀리하진 않는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는 엘리의 사악한 행동으로 구원을 받는다.

영화에서 '구원'의 한가운데 있는 건 단연 찰리와 엘리다. 앨런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찰리에게 적합한 구원은 무엇일까. 삶의 의지를 되살려 병원에 가 치료하는 것?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 둘 다 일차원적이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앨런을 따라가는 것일 테다. 그래서 리즈는 그를 보살피지만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반면 엘리는 그를 보살피지도 않거니와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그에게서 피해를 본 당사자이기 때문일 텐데, 짧은 시간이지만 그의 머릿속을 송두리째 헤집어 놓는다. 그의 선택이, 그러니까 앨런을 사랑해 가족을 등지고 앨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에 자신도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며 무엇보다 찰리 스스로를 증오해 마지않는 행위 모두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찰리는 구원의 길로 간다. 엘리 덕분인지, 찰리 스스로의 의지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부분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 구원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인지, 타인에 의해 부여되는 것인지 말이다. 엘리가 의도하지 않게 그것도 사악한 짓으로 타인을 구원하게 된 경위를 보고 있노라면, 결국 구원은 스스로가 쟁취해야만 하는 것 같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비의도적이고 처절하며 감동적이고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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