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영화 리뷰] <정말 먼 곳>
강원도 화천, 진우는 어린 딸 설이와 함께 양떼 목장에서 일을 도우며 서식하고 있다. 그곳은 중만의 목장으로, 그는 치매로 고생하시는 어머니 명자와 아직 시집 가지 않은 딸 문경과 함께 산다. 설이는 주로 명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문경은 두루두루 보살핀다. 어느 날 진우 앞에 두 명의 지인이 각각 찾아온다. 이후 그의 삶이 소용돌이친다.
한 명은 친구 현민이다. 시인인 그는 진우처럼 복잡한 서울을 떠나 한적한 시골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시를 가르치려 한다. 진우와 함께 지내기로 한 듯하다. 알고 보니, 그들은 연인 사이. 진우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망쳐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그 이유 중 현민도 있었을 테고, 현민도 이곳에 온 이유가 다르지 않았을 테다.
다른 한 명은 이란성 쌍둥이 동생 은영이다.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 설이를 데려 가려고 왔다. 이전에도 몇 번 찾아 왔던 적이 있던 듯, 알고 보니 설이는 진우의 딸이 아닌 은영의 딸이었던 것이다. 5년 전 은영은 진우에게 한 달만 설이를 맡긴다고 해 놓고 오랫동안 연락은커녕 일절 찾아오지 않았다. 진우로선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고통과 상실의 테마
영화 <정말 먼 곳>은 지난 2019년 데뷔작 <한강에게>로 상실의 멈춰 버린 시간을 살아가는 시인 진아의 일상을 진솔하게 전한 박근영 감독의 신작이자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모든 걸 놔 버릴 만한 참혹한 시간을 담담하게 버텨 나가는 이를 담아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던 바, 기대치가 상당했는데 기대 이상의 작품을 내놓았다.
이번에도 작품의 주요 테마는 고통과 상실, 강원도 화천의 아무도 없는 '정말 먼 곳'까지 간 진우가 겪었고 겪고 있으며 겪을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진우를 보면서 느끼기 힘들다, 그는 담담하기만 하니까. 그래서 더 세세하게 하나하나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아픔의 총량은 똑같은데, 그가 아파하지 않으니 내가 아프다고 할까.
상실이라고 하면 흔히, 보이는 무엇이 사라진다는 걸로 받아들을 것이다. 명확하게 와닿는 상실의 의미이자, 상실이 주는 고통의 명확한 통점이다. 반면, 보이지 않는 무엇이 사라질 때의 상실도 있다. 그건 명확하지도 않거니와 통점이 어디에 있고 또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 차라리 명확한 상실의 고통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 영화 <정말 먼 곳>이 주는 상실 그리고 고통의 모양새가 그렇다. 영화의 전체적 모양새 또한 그러하다. 안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맞서 견디고 버티며 이겨 내고 있는 것 같다.
나름의 서사들
영화는 은연 중 알게 모르게 서사를 밟아간다. 양이 죽으면서 시작되니, 진우에게 좋지 않은 일이 들이닥칠 것 같다. 같이 일하지만 같이 살지는 않는 중만의 가족과 진우네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게, 그럼에도 진우에게 희망이 있다는 걸 말하는 것 같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화천의 풍광이, 진우와 현민의 몰래 하는 사랑을 응원하며 자연스러운 것이니 숨기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현민이 시를 가르칠 때 고정관념을 깨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하니,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가 함축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담담하게 아름답기까지하게 전하는 느낌은 이내 역설을 불러왔다. 보이는 건 사람이 아닌 동물과 식물을 동반한 자연밖에 없는 먼 곳으로 도망쳐 왔지만, 혐오와 편견은 존재했고 아픔과 고통이 뒤따랐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의 산자락 풍광과 강물 경치가, 혐오와 편견을 일으키는 폭력과 너무나도 반비례했다. 그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비 또는 불협화음이 더욱더 아프게 다가왔다.
영화가 전하는 바를 영화가 직접 따른다. 언행일치라고 하면 맞을까. 모든 캐릭터를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또 받아들이려 한 것이다. 진우, 현민, 중만, 은영, 문경, 명자, 설이의 주요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일별하며 길든 짧든 나름의 서사를 보여 주고 또 완성시키려 했다. 어느 캐릭터 하나 다른 캐릭터 또는 영화를 위한 도구이자 수단으로만 쓰이지 않았다.
정말 가까운 곳
영화 <정말 먼 곳>은 박근영 감독이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박은지 시인의 시 <정말 먼 곳>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후반부에 현민이 이 시를 읽는데, 서정적으로 처연하다. 여기, 시의 전문을 옮긴다. 이 시를 읽고 받아들임으로써 영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다. 특히, 시의 마지막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영화가 전하는 또 다른 메시지를 함축한 문장이다.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린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두 발 붙이고 서 있지만,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멀리 떨어져 정말 먼 곳을 상상하고 로망으로 삼고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말 가까운 곳부터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눈앞에 있는 절벽을 인지하고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은지 시인도 박근영 감독도 동조한 바, 나도 여기에 동조한다.
시에서 영감을 받아 시적인 현실이자 현실같은 시를 스크린으로 알차고 탄탄하게 풀어 내는 힘을 지닌 박근영 감독, <한강에게>에 이어 <정말 먼 곳>으로 그만의 스타일을 확립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차기작을, 예상되는 스타일과 분위기와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현실에 맞닿아 있는 시는, 예술은 힘이 세다. 힘이 센 영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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