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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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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실, 불안, 고독으로 점철된 삶에서 사랑으로 힘내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2019.02.20
  • 빛나는 순간들을 위한 관계, 상실, 성장의 하모니 <빛나는> 2017.12.20
  • 다른 모든 걸 덮어버리는 '상실'에 대하여 <싱글맨> 2016.09.16

상실, 불안, 고독으로 점철된 삶에서 사랑으로 힘내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2.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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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포스터. ⓒ(주)디오시네마



영화를 즐겨 보고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야깃거리가 있는 영화는 리뷰를 써서 소개하고 기억에 남기려고 애쓰다 보면, 종종 나도 모르게 '군(群)'이 형성되는 걸 느낀다. 소설을 자주 접하다 보면 좋아하는 작가군이 형성되는 것처럼, 영화는 감독군이 형성된다. 


믿고 보는 배우가 있듯이 믿고 보는 감독도 있을 텐데, 영화에서 배우에 비해 감독은 상대적으로 덜 드러나기에 그냥 지나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감독군이 형성될 때 말 그대로 '나도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일본에서는 2017년에 개봉했지만 한국에는 이제야 상륙한, 그동안 제목과 포스터, 최소한의 스틸컷과 내용 등의 단편지엽적인 정보만으로 기대를 품고 있었던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이하 '도쿄의 밤하늘')도 그중 하나다. 


한국 개봉이 확정되고 찾아보기 시작하기 전엔 전혀 몰랐다. 감독 이시이 유야가 <행복한 사전> <이별까지 7일>을 연출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2000년대 중순부터 꾸준히 작품을 내왔던 그의 유이한 한국 개봉작인 두 편 모두 필자가 굉장히 잘 보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도쿄의 밤하늘>을 인상 깊게 보고 이렇게 리뷰를 남긴다. 


상실로 점철된 삶들의 만남


상실로 점철된 청춘의 삶들이 도쿄의 하늘 아래에서 만난다.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한 장면. ⓒ(주)디오시네마



일본 도쿄, 미카(이시바시 시즈카 분)는 시골에서 홀로 상경해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고 아빠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 낮에는 호스피스 간호사로 일하고 밤에는 '걸즈 바'에서 일한다. 그녀는 연애에 대해 비관주의적이고 염세주의적이다. 


신지(이케마츠 소스케 분)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공사판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는 게 자신에게 알맞다고 생각하는, 한 쪽 눈이 잘 안 보이는 말 많고 책 열심히 보는 청년이다. 그는 그저 절대적 절망 없이 막연한 희망으로 살아갈 뿐이다. 


미카와 신지는 우연히 만난다. 이 천 만 명이 넘게 사는 세계적인 대도시에서 몇 번이고 우연히 마주친다는 건 참으로 기막힌 우연, 이를 필연으로 이어가는 건 그들의 선택이자 몫이다. 


한편, 그들은 삶은 '상실'로 점철되어 있다. 미카는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셨고 지금은 매일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호스피스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미카는 친구 아닌 친구 같은 공사판 친구였던 토모유키(마츠다 류헤이 분)가 갑자기 죽는 걸 시작으로 하나둘씩 자신의 곁을 떠나는 걸 막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받아들이고 느끼고 즐기는 영화


이 영화는 시에서 감성을 빌려온 만큼, 받아들이고 느끼고 즐기자.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한 장면. ⓒ(주)디오시네마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는 쉽지 않은 원작인 사이하테 다히의 시집 <밤하늘은 항상 최고 밀도의 푸른색이다>를 모티브로 삼았다. 시에서 감성을 빌려온 만큼, 영화는 가히 몽환적이고 이미지적이고 그래서 불친절하다. 이야기 서사가 없다시피 하고 대신 그 자리를 여러 영화적 기법과 시적 대사가 차지하니, 누군가는 보기가 쉽지 않을 수 있겠다. 


반면, 누군가는 시쳇말로 '마약에 절은 것 마냥' 이 영화에 심취할 것이다. 머리를 싸매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나름의 결론까지 지어야 하는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고 느끼고 즐겨도 괜찮기 때문이다. 감독의 메시지나 의도가 심오하고 현실적이기까지 하다고 해도 말이다. 도쿄의 밤하늘이 '왜' 푸른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푸른 밤하늘'을 감상하는 데 방점을 두는 것이다. 


필자는 사실, 후자 아닌 전자 타입이다. 생전 시라는 걸 거의 읽어본 적 없고, 소설도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서사의 깊이가 어마어마한 대하소설만 읽었다. 그런데, 위에서 주지했다시피 아무런 정보 없이 이런 시적인 영화를 봤으니 어떻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론까지 짓는 와중에도 나름 충분히 받아들이고 느끼고 즐겼다고 생각한다. 


특히 영화 전반부는 도쿄 특유의 동경할 수밖에 없는 도시적 풍모와 더불어 한없이 고독하고 불안하고 단편적이고 진정성 없는 다층적 매력을 잘 표현해냈다. 그게 매력이라고 하기 힘들지라도 매력이라도 느끼게끔 말이다. '블루'는 많은 문화권에서 전통적으로 '슬픔'을 상징한다. 도쿄의 밤하늘이 항상 가장 짙은 블루라는 건 도쿄가, 도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항상 슬프다는 것, 슬픔을 느낀다는 것...


'도쿄'를 서울로 바꿔보자. 혹은, 베이징으로 뉴욕으로 런던으로 파리로 바꿔보자. 서울은 왠지 잘 어울릴 것 같다. 다른 대도시들은? 역시 어울린다. 도시의 슬픔은 누구도 극복하기 힘든 삶과 죽음의 간극을 비정하게 담고 있다. 


죽음의 공포와 불안, 그래도 힘내요


상실뿐만 아니라,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떠는 삶. 그래도 힘내라고 말한다.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한 장면. ⓒ(주)디오시네마



영화는, 그러나 일본 도쿄가 배경이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종종 '튀어나오는' 불안들 중 '지진'이 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잊혀지지 않는 그 사고 그리고 사건 말이다. 인간의 태생적인 불안 중 가장 심오한 건 역시 '죽음'이다. 살면서 항시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안고살 수밖에 없는데, 일본 도쿄라는 세계적인 대도시에는 직접적인 죽음이 함께 하는 것이다. 


더불어 영화는 여러 뜻하지 않는, 의도하지 않는, 예측할 수 없는 죽음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단순히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영화는 또 한 번 더 들어가 빈곤과 단절로 방황하고 힘들어 하는 이 시대 청춘들의 삶에 얹힌다. 도쿄, 청춘, 죽음의 세 키워드가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삶 위에 턱 하니 주저앉아버린 형국이다. 


어찌해야 하나, 삶과 죽음이 구분 없이 명멸하는 이곳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살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 직면해 살 수밖에 없이 만들어진 이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영화 <도쿄의 밤하늘>은, 그러나 사실 시종일관 굉장히 낙관론적인 비전을 내보인다. '힘내요', 여긴 도쿄지만 그래도 '힘내요'라고 말이다. 


결국 사랑이다. 죽음이 바로 내 옆으로 다가와 손짓해도 사랑이 있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곳곳에서 이 모습을, '사랑밖에 난 몰라' 하는 모습을 공감력 있게 보여준다. 그때 잊을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그래서 나아갈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 힘내라는 건 사랑하라는 말과 한 치의 오차 없이 같다. 삶과 죽음의 모습이 모두 같다면 불행하지만, 사랑의 모습은 모두 같더라도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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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도쿄,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불안, 사랑, 상실, 죽음,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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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순간들을 위한 관계, 상실, 성장의 하모니 <빛나는>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12.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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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가와세 나오미의 <빛나는>


일본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거장 '가와세 나오미'의 최신작 <빛나는>. ⓒ그린나래미디어(주)



장편 연출 데뷔 20주년,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이 열광하는 일본 최고의 감독 중 하나 '가와세 나오미'는 그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비교적 최근에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장편 데뷔와 동시에 칸영화제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는데, 이후로도 그녀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너를 보내는 숲>은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해 많은 인기를 얻어 비로소 가와세 나오미라는 이름을 알린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와 <앙: 단팥 인생 이야기> 또한 칸영화제는 물론 수많은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렸다. 얼마전 개봉한 <빛나는> 또한 마찬가지다.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지극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 행간과 자간을 읽어낼 수 없거나 읽어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 자체로 결코 스무스하고 재미있게 또 거리낌 없이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말이다. <앙>과 <빛나는>에 와서는 그런 상대적으로 소소한 단점들도 해소한 느낌이다. 완벽에 가까워졌달까.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을 쓰는 작가와 시각장애인의 만남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눈에 띈다. 감독은 무엇을 끄집어낼 것인가. ⓒ그린나래미디어(주)



미사코(미사키 아야메 분)는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을 만드는 작가이다. 주기적으로 시각장애인 모니터링단과 함께 해설 감수 모임을 하는데, 초보 작가에 불과한 미사코에게 날카로운 지적들이 향한다. 특히 과거 유명 사진작가였다가 이젠 거의 시력을 잃은 나카모리(나가세 마사토시 분)가 예리하다. 


나카모리의 지적에 동조하지 못하는 미사코는 반발하지만, 다른 이들은 나카모리의 의견에 동조하고 미사코는 여지없이 수용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다. 그녀는 새삼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해설의 어려움을 느끼며, 그들의 상상력이 최대한 발현되면서도 자신의 주관이 그 상상력을 방해하지 않도록 균형의 어려운 길을 간다. 


그녀는 도움을 받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나카모리의 집을 찾아간다.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그러며 차츰 알게 된다. 그가 말한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를. 그녀로선 상상하기 힘든 실체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이해하고 부정하고 반발하고 상처받고 다시 이해하고 깨닫는 과정을 겪는다. 


영화는 아픈 이들의 연대를 말하고자 한다. '관계'다. 잃어버리는 순간의 허망함과 두려움과 슬픔과 분노를 말하고자 한다. '상실'이다. 지적당해 수긍하고 부정당해 반발하고 큰 실수로 쫓겨나고 절치부심해 일어나고 결국 궁극적인 이해로의 길을 말하고자 한다. '성장'이다. 


관계, 상실, 성장의 하모니


영화는 관계와 상실과 성장이라는 추상적 개념들을 잘 풀어낸다. ⓒ그린나래미디어(주)



나카모리는 영화 초반 아주 약소하지만 시력이 남아 있다. 미사코에게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급속도로 나빠져 시력을 잃을 지경이 된다. 그는 미사코가 자신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미사코에게도 비슷한 아픔이 있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없는 아빠가 돌아올 거라 믿는다. 그녀는 아빠를 그리워하며 엄마를 보살피는 게 쉽지 않다. 나카모리와 미사코는 연대의 끈이 존재한다.


말도 안 되는 비교일지 모르나, 원래부터 시력이 없던 이와 시력을 잃어가는 이의 상실감은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일 것이다. 눈이 심장만큼의 중요성을 띠는 사진작가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 두려운 상실감은 상상불가다. 미사코는 어떤가. 그녀는 자신의 사상 중심, 희망에의 찬가를 부정당한다. 그 부정에의 상실감 또한 평생 짊어져야 할 트라우마로서 당사자만 알 수 있는 상상불가의 영역이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성장의 길은 아니다. 내가 다른 이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 밖에서 안으로 천착해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성장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미사코는 수없이 부정당하면서도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들어갔다. 반면 시력을 잃어가는 나카모리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안전한 성장의 길이라 할 수 있지만, 밖으로 나가 미사코에게로 나아가려 한다. 


빛나는 순간들


영화를 보면, 우리에게도 참으로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지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린나래미디어(주)



관계, 상실, 성장 등의 추상적 소재들은 <빛나는>에서 그야말로 메시지와 캐릭터를 빛나게 해준다. 심오하면서도 보편적인 삶의 면면을 우리에게 내보이게 해준다. 다만, 이해하기 힘든 스토리상 맥락의 불친절함이 곳곳에 눈에 띈다. 끊임없이 유추하고 해석하고 생각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힘들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마냥 아름답다. 옛날 어느 때, 어느 순간을 그리게 되고 현재의 이 순간을 붙잡고 싶어지며 미래의 그때 그 순간을 기다리게 한다. 빛은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그래서 우린 그 존재의 고마움을 모른다. 더이상 앞을 볼 수 없게된 이들에게 빛은 가장 그리운 존재일 것이다. 


빛이 우리는 비출 때의 그 순간을, 그 순간을 아름답게 잡아내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그만큼 그건 숭고한 일이고 반드시 해내고 싶은 일이다. 영화는 그 무엇보다 빛을 잡아 기록해두고 싶은 열망의 집합체이다. 영화에서 몇 번이고 언급되는 대사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만큼 아름다운 건 없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의적이지만, 가장 해당되는 건 다름아닌 '빛'일 것이다. 


가만히, 현실의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고, 떠올려보자. 머릿속에 남아 있는 순간들을, 그 잔영들을. 흐릿하기도, 또렷하기도, 잔잔하기도, 화려하기도, 아름답기도, 슬프기도... 그 빛나는 순간들을 떠올리자. 그리고 반드시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자. 거기에도 역시 빛나는 순간들이 있을 거다. 나란 존재는 그렇게 나아간다. 우리 모두 그렇게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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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세 나오미, 관계, 빛, 빛나는, 상실, 성장, 순간, 시각장애인, 영화음성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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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걸 덮어버리는 '상실'에 대하여 <싱글맨>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6. 9.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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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톰 포드의 <싱글맨>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의 데뷔작 <싱글맨>. 그만이 가진 장기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 새로운 색감의 대가이다. 그걸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와인스타인 컴퍼니



짧고 잔잔한 영화 한 편으로 인생의 한 부분이나마 이야기하는 건 정녕 어려운 일이다. 인생뿐이랴. 인생을 말하고자 영상과 색감을 알게 모르게 이용하는 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타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문자로 보여주기 어려운, 영상으로만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쉬운 부분이니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지만, 그만큼 심여를 기울여야 한다. 어설프면 안 하느니 못하지 않겠나. 


영화 <싱글맨>은 이를 완벽에 가깝게 해냈다. 스토리야 완벽에 가까운 원작이 있으니 크게 우려할 부분이 없겠지만, 그걸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엄청난 부담이 지어졌을 게 분명하다. 자연스레 감독이 궁금해진다. 색감의 대가 웨스 앤더슨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이 생각났다. <싱글맨>의 감독은 누구일까. 


'톰 포드'라고 한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더라니, 패션 디자이너란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던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구찌'를 부활시킨 장본인. 그가 10년 넘게 몸담은 구찌를 나와 '성장'과 '진화'를 거듭하고자 하는, 그 신호탄 중 하나가 영화 <싱글맨>이다. 구찌에 도시적이고 젊은 관능성을 장착시켜 부활시켰듯이, 영화를 통해서도 그의 디자인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다른 모든 걸 덮어버리는 '상실'에 대하여


1960년대 초 미국, 오래된 연인의 죽임에 한 없이 힘들어 하는 대학교수 조지(콜린 퍼스 분)가 있다. 아침에 눈을 뜨기 싫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기 시작하는 연인의 모습. 자그마치 16년이다. 어느 날 문득 혼자가 되어 과거 속에서만 살아가는 조지, 하루하루가 순간순간이 고역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 부유할 뿐이다. 


그는 다름 아닌 동성애자다. 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살아생전 연인 짐을 열렬히 사랑할 순 있었겠지만, 그의 죽음 앞에선... 그를 더욱 절망 속으로 밀어넣은 건, 짐의 죽음을 함께 할 수 없었다는 것일 테다. 16년 간 함께 해왔지만, 조지는 짐의 '가족'일 수 없었다. 조지는 누구한테고 드러낼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을 안고 홀로 속절없이 무너질 뿐이었다. 


<싱글맨>은 퀴어 영화이지만, 굉장히 보편적인 감정을 말하고자 하는 영화다. 다름 아닌 '상실'. 이 영화는 상실에 대한 영화다. ⓒ와인스타인 컴퍼니



<싱글맨>은 분명 퀴어 영화지만, 동성애가 조지의 '상실'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다분하다. 비단 여자 연인이었더라도 가족이었더라도 반려동물이었더라도 상실의 슬픔은 어마어마하게 덮쳐 오지 않겠나. 그렇지만 시대의 특성 상, '동성애'가 갖는 특성 상 그 상실의 슬픔은 다른 무엇을 뛰어 넘을 거다. <싱글맨>은 다른 모든 걸 덮어 버리는 '상실'에 대한 영화다. 


상실은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상실을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을까. 그 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채울 수 있긴 한 걸까. 그저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간단하면 소설, 영화로 끊임없이 재창조되어 사람들을 '괴롭'히고, 당사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면 상실이 한없이 무서워진다. 


우울함에서 생기가 감도는 색감 영상으로


조지에게 그 하루는 특별하다. 권총과 총알을 준비한다. 상실의 슬픔이 결국 삶을 무너뜨린 것이다. 인생을 끝내기로 한다. 그래도 하루를 온전히 보내야 한다. 다른 날과 다름 없는 하루를 시작하고 사람들도 만나야 한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감흥도 없다. 오직 순간순간 덮쳐오는 짐과의 기억만 의미가 있고 감흥이 있다. 


한순간 눈에 띄는 이가 있지만 지나갈 뿐이다. 짐을 대신할 수 없다. 죽음을 결심한 시간이 다가왔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찰리의 전화가 그 결심을 중지시킨다. '그녀'와의 약속 시간이다. 그녀와 과거 한때 사랑을 '노력'해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지금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녀와의 만남은, 그녀와의 불가능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혼란스런 그에 눈에 누군가가 띈다. 제자인 케니. 우연히 만난 '그'와 충동적인 하룻밤을 보내고자 하는데...


영화는 색감으로 주인공의 심경 변화를 보여준다. 아주 명확하고 선명하게. 우울함이 지배했던 초반의 무채색 색감은 후반부에 생기가 감도는 감도 높은 단도 영상으로 변한다. 무엇을 뜻하는 걸까. ⓒ와인스타인 컴퍼니



영화는 시종일관 우울함이 지배하는 영상을 선보인다. 조지의 심경을 그래도 투영한 듯 무채색이다. 조지가 도무지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날따라 그에게 많은 '살아 있는' 것들이 보여 감상한다. 죽음을 결심한, '살아 있지 않은' 이에게만 보이는 살아 있음의 결정체인가 보다. 그 장면들을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해 살아 있음을 극대화했다. 보는 이에 따라 작위적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케니가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는 따로 설명이 불필요하다. 색감을 보면 되니까. 우울함이 지배하는 무채색 영상이 생기가 감도는 감도 높은 단도 영상이 된 것이다. 조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심지어 '색깔'이라는 게 감돈다. 케니에게도 집에도 마찬가지다. 감독이기 이전에 디자이너 톰 포드의 디자인 철학이 바로 여기에서 발휘된다. '내가 톰 포드요 '하면서. 우린 거기에서 젊은 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실로 오랜만에 상실을 제대로 느껴보다


2015년 <킹스맨>에서 수트의 진면목을 선보인 바 있는 콜린 퍼스, 그 이전에 2010년 <킹스 스피치>가 있었다. '영국 신사의 수트란 이런 것이다'를 제대로 보여줬다 하겠다. 그런데 그 앞에 2009년 <싱글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의 수트를 입은 게 아니겠는가. 그 어떤 영화보다 멋있는, 남자가 봐도 한눈에 반할 수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싱글맨>이다.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서도 '관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상실로 영혼을 잃은 껍데기. 수트는 그 껍데기를 완벽히 커버한다. 그래서 더 돋보이는 면도 있다. '수트 입은 남자란 이런 것이다'가 아닌 '수트란 이런 것이다' ⓒ와인스타인 컴퍼니



역설적으로 상실의 슬픔이 관능을 극대화시킨 것 같다. 모든 걸 내려놓은 채 수트에 의지한 영혼 잃은 껍데기. 껍데기를 완벽하게 커버하는 수트의 미학이다. 물론 모든 걸 가진 이의 수트도 뭐라 말 할 수 없이 멋있지만 수트가 빛을 발 할 때도 있다. 옷이 날개일 때도 있지만, 허름한 옷을 걸쳐도 돋보이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이 영화는 디자인만이 갖는 것을 극대화 했다. 


우린 사실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이보다 풍요로운 시대가 언제 있었을까 싶은,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군중 속의 고독'처럼 '풍요 속의 빈곤'이 점점 그 세를 불리고 있지만, 상실만큼은 상실 그대로 받아들일 만한 여지가 없다. 의도하지 않아도 곧바로 다른 무엇이 채워지니까. <싱글맨>을 통해 오랜만에 상실을 제대로 느껴봤다. '오랜만'이라고 표현한 건, 기억에서 흐려졌지만 언젠간 그 무엇의 상실을 뼛속 깊이 슬퍼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한 번 더 느껴볼 때가 있을까. 비록 치명적일지 몰라도, '내가 인간이구나'라는 걸 제대로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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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 구찌, 디자인, 상실, 색감, 생기, 수트, 싱글맨, 영상, 우울, 인간, 인생, 톰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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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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