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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빛나는 순간들을 위한 관계, 상실, 성장의 하모니 <빛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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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가와세 나오미의 <빛나는>


일본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거장 '가와세 나오미'의 최신작 <빛나는>. ⓒ그린나래미디어(주)



장편 연출 데뷔 20주년,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이 열광하는 일본 최고의 감독 중 하나 '가와세 나오미'는 그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비교적 최근에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녀는 장편 데뷔와 동시에 칸영화제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는데, 이후로도 그녀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너를 보내는 숲>은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해 많은 인기를 얻어 비로소 가와세 나오미라는 이름을 알린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와 <앙: 단팥 인생 이야기> 또한 칸영화제는 물론 수많은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렸다. 얼마전 개봉한 <빛나는> 또한 마찬가지다.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지극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 행간과 자간을 읽어낼 수 없거나 읽어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 자체로 결코 스무스하고 재미있게 또 거리낌 없이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말이다. <앙>과 <빛나는>에 와서는 그런 상대적으로 소소한 단점들도 해소한 느낌이다. 완벽에 가까워졌달까.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을 쓰는 작가와 시각장애인의 만남이라는 흥미로운 소재가 눈에 띈다. 감독은 무엇을 끄집어낼 것인가. ⓒ그린나래미디어(주)



미사코(미사키 아야메 분)는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을 만드는 작가이다. 주기적으로 시각장애인 모니터링단과 함께 해설 감수 모임을 하는데, 초보 작가에 불과한 미사코에게 날카로운 지적들이 향한다. 특히 과거 유명 사진작가였다가 이젠 거의 시력을 잃은 나카모리(나가세 마사토시 분)가 예리하다. 


나카모리의 지적에 동조하지 못하는 미사코는 반발하지만, 다른 이들은 나카모리의 의견에 동조하고 미사코는 여지없이 수용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다. 그녀는 새삼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해설의 어려움을 느끼며, 그들의 상상력이 최대한 발현되면서도 자신의 주관이 그 상상력을 방해하지 않도록 균형의 어려운 길을 간다. 


그녀는 도움을 받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나카모리의 집을 찾아간다. 우연히 마주치기도 한다. 그러며 차츰 알게 된다. 그가 말한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를. 그녀로선 상상하기 힘든 실체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이해하고 부정하고 반발하고 상처받고 다시 이해하고 깨닫는 과정을 겪는다. 


영화는 아픈 이들의 연대를 말하고자 한다. '관계'다. 잃어버리는 순간의 허망함과 두려움과 슬픔과 분노를 말하고자 한다. '상실'이다. 지적당해 수긍하고 부정당해 반발하고 큰 실수로 쫓겨나고 절치부심해 일어나고 결국 궁극적인 이해로의 길을 말하고자 한다. '성장'이다. 


관계, 상실, 성장의 하모니


영화는 관계와 상실과 성장이라는 추상적 개념들을 잘 풀어낸다. ⓒ그린나래미디어(주)



나카모리는 영화 초반 아주 약소하지만 시력이 남아 있다. 미사코에게 더 예리하고 날카로운 지적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급속도로 나빠져 시력을 잃을 지경이 된다. 그는 미사코가 자신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미사코에게도 비슷한 아픔이 있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없는 아빠가 돌아올 거라 믿는다. 그녀는 아빠를 그리워하며 엄마를 보살피는 게 쉽지 않다. 나카모리와 미사코는 연대의 끈이 존재한다.


말도 안 되는 비교일지 모르나, 원래부터 시력이 없던 이와 시력을 잃어가는 이의 상실감은 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일 것이다. 눈이 심장만큼의 중요성을 띠는 사진작가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 두려운 상실감은 상상불가다. 미사코는 어떤가. 그녀는 자신의 사상 중심, 희망에의 찬가를 부정당한다. 그 부정에의 상실감 또한 평생 짊어져야 할 트라우마로서 당사자만 알 수 있는 상상불가의 영역이다.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성장의 길은 아니다. 내가 다른 이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 밖에서 안으로 천착해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성장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미사코는 수없이 부정당하면서도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안으로 들어갔다. 반면 시력을 잃어가는 나카모리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안전한 성장의 길이라 할 수 있지만, 밖으로 나가 미사코에게로 나아가려 한다. 


빛나는 순간들


영화를 보면, 우리에게도 참으로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지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린나래미디어(주)



관계, 상실, 성장 등의 추상적 소재들은 <빛나는>에서 그야말로 메시지와 캐릭터를 빛나게 해준다. 심오하면서도 보편적인 삶의 면면을 우리에게 내보이게 해준다. 다만, 이해하기 힘든 스토리상 맥락의 불친절함이 곳곳에 눈에 띈다. 끊임없이 유추하고 해석하고 생각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힘들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마냥 아름답다. 옛날 어느 때, 어느 순간을 그리게 되고 현재의 이 순간을 붙잡고 싶어지며 미래의 그때 그 순간을 기다리게 한다. 빛은 우리가 살아 있을 동안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그래서 우린 그 존재의 고마움을 모른다. 더이상 앞을 볼 수 없게된 이들에게 빛은 가장 그리운 존재일 것이다. 


빛이 우리는 비출 때의 그 순간을, 그 순간을 아름답게 잡아내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그만큼 그건 숭고한 일이고 반드시 해내고 싶은 일이다. 영화는 그 무엇보다 빛을 잡아 기록해두고 싶은 열망의 집합체이다. 영화에서 몇 번이고 언급되는 대사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만큼 아름다운 건 없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의적이지만, 가장 해당되는 건 다름아닌 '빛'일 것이다. 


가만히, 현실의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고, 떠올려보자. 머릿속에 남아 있는 순간들을, 그 잔영들을. 흐릿하기도, 또렷하기도, 잔잔하기도, 화려하기도, 아름답기도, 슬프기도... 그 빛나는 순간들을 떠올리자. 그리고 반드시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자. 거기에도 역시 빛나는 순간들이 있을 거다. 나란 존재는 그렇게 나아간다. 우리 모두 그렇게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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