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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사랑하는 아내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려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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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사랑하는 당신에게>

 

영화 <사랑하는 당신에게> 포스터. ⓒ(주)티캐스트

 

70대 중반의 제르맹, 아들 딸과 손자 손녀들 그리고 부인과 지지고 볶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노인이다. 그는 딱히 노년을 즐기는 것 같진 않은데,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아내 리즈는 현대 무용을 배우러 다닌다. 그렇게 열정적이고 건강하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부엌에서 쓰러져 세상을 뜬다. 허망한 가족들, 장례를 치르고 남은 가족들이 번갈아 가며 제르맹을 들여다보고 또 보살피기로 한다.

정작 제르맹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리즈와의 약속, 먼저 세상을 뜬 사람이 살아생전 마지막까지 하다가 이루지 못한 걸 대신해 주는 것이다. 제르맹은 세계적인 무용가 리 리보트의 현대 무용단에 무작정 입단한다. 가족들 몰래. 입단은 했는데 영 맞지 않는 것 같다. 이걸 춤이라고 할 수 있는지 해괴망측해 보인다. 그래도 사랑하는 아내와의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

제르맹은 과할 정도로 그에게 관심을 갖고 간섭까지 하는 가족들 몰래 무용을 배우는 한편 도서관에 가서 근래 있었던 일과 소회를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로 써서 아무 책에 꽂아 놓는다. 그러던 어느 날, 제르맹의 몸짓을 본 리보트가 공연을 불과 4주 남겨 놓고 주연을 제르맹으로 바꾸고자 하는데… 공연 날짜도 얼마 안 남았거니와 프로도 아닌 생아마추어를 주연으로 올릴 수 있을까? 제르맹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슬픔과 감동의 몫

 

벨기에-스위스 영화 <사랑하는 당신에게>는 'Last Dance'라는 영제를 가지고 있다. Last Dance는 말 그대로 해석하면 마지막 춤이라는 뜻이지만, 주로 쓰이는 스포츠에선 마무리를 잘하자는 의미로 말하곤 한다. 이 영화에선 제르맹과 리즈의 관계 그리고 노년이라는 시간이 겹쳐져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해석이 가장 알맞을 것 같다.

영화는 초반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아내이자 엄마이자 할머니인 리즈의 부재로 침울한 가족이 비춰지지만, 이내 제르맹의 무용 연습이 시작되며 이른바 '건강한' 웃음이 시종일관 스크린 밖을 채운다. 스크린 안 그들은 진지하지만 스크린 밖 우리는 너무 웃기다.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웃음이 아니라 휴머니즘적인 웃음이랄까.

웃음도 제르맹의 몫이지만 슬픔과 감동도 그의 몫이다. 톰 행크스가 주연으로 분한 <오토라는 남자>에서 아내를 먼저 보낸 노인 오토가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게 아내만을 향한 사랑의 발로라면, <사랑하는 당신에게>에서 제르맹이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복잡다단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현대 무용을 하는 것도 아내만을 향한 사랑의 발로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아내를 향한 사랑이 슬프고 또 감동적이다.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

 

<사랑하는 당신에게>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그 중심엔 단연 제르맹이 있다. 그에게서 희노애락을 모두 느낄 수 있는 바, 와중에도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게 특별하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랑의 감정이 많이 사라졌다고 여겨지는 노인인 데다가, 그마저도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떴으니 말이다. 사랑의 깊이뿐만 아니라 넓이 또한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제르맹의 아내를 향한 편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변한다. 아내와의 약속으로 춤을 배우고 추면서 이게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아내가 보고 싶다고만 하지만, 이내 춤을 추는 게 재밌고 이 순간이 즐겁다는 것이다. 아내가 없음에도 슬픔을 느낄 겨를이 없어 미안해한다. 아내를 보내 주지 못했다가 서서히 보내 주고 있는 것 같다.

상실에 따른 슬픔은 이루 말할 길이 없다. 애착하는 물건을 잃어도 슬프고 허망한대 하물며 평생의 사랑인 아내를 잃은 슬픔과 허망함이랴. 그럼에도 보내 줘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말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할 수밖에 없고 나만이 할 수 있다. 사랑의 크기만큼, 아니 사랑의 크기보다 상실의 크기가 더 클 수도 있을 텐데 문제는 '어떻게' 보내 주느냐일 것이다.

 

편지와 춤이라는 소재

 

영화는 제르맹과 리즈를 이어주는 춤이라는 요소로 상실을 극복하는 모습, 그러니까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를 보내 주는 모습을 그린다. 충분히 절절하게 전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전하는 게 더 쉽고 편할 텐데, 영화는 유쾌하게 보여 주려 한다. 톤 앤 매너를 잡는 게 매우 어려웠을 것인데, 성공해 냈다. 죽은 자의 죽음에 천착하지도 않고 남은 자들의 슬픔에 천착하지도 않다. 대신 그들을 이어주는 편지와 춤에 천착한다.

편지가 감동의 소재라면 춤은 웃음의 소재다. 제르맹의 담담한 듯 슬픈 사랑이 물씬 풍기는 편지를 접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다가도, 제르맹의 보는 사람이 다 부끄러워지는 자못 기괴한 춤의 몸짓을 접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삐어져 나온다. 신파적이지 않은 담담한 감동과 억지적이지 않은 순수한 웃음의 균형이 이 영화의 미덕이라 하겠다.

부부가 함께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레 서로 물어볼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날 위해 뭘 해 줄 거야? 아니면 내가 못 다한 걸 마저 해 주면 좋겠는데 뭐가 좋을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간단한 편지 한 장을 도서광의 아무 책에나 껴 넣는 것도 해 보고 싶다. 영화 안의 요소가 있는 그대로 영화 밖으로 나와 실생활과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다. <사랑하는 당신에게>는 영화의 스토리와 감정을 책임지는 주요한 두 소재가 그에 해당된다.

근래 이런 영화를 본 적이 없다. 2023년 상반기 최고의 영화는 물론 2023년 전체 나아가 근 몇 년간 본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 당당히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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