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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상상력'에 해당되는 글 9건

제목 날짜
  • '삶'이라는 거대한 벽, 풀리지 않는 문제에서 깨내 볼 영화 <소울> 2021.01.22
  • 철학적 세계관과 영상 액션에의 혁명적 상상력의 산물 <매트릭스> 2019.10.16
  • 지구를 옮긴다는 상상력에 입힌 '지구를 선도하는 중국'의 비주얼 <유랑지구> 2019.05.06
  • 재패니메이션의 거장 '호소다 마모루'의 평작 <미래의 미라이> 2019.02.22
  • 다시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놀란표 평작 <인터스텔라> 2018.01.26
  • '신'의 말을 빌려 50년의 기행적 소설 쓰기를 해명하다 <모나드의 영역> 2017.01.16
  • 판에 박힌듯 단조로운 세상살이, 극복할 수 있을까?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2016.10.10
  • 팀 버튼의 뒷걸음질에 제동을 걸다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2016.10.05
  • 작은 곤충들이 펼치는 <반지의 제왕>? 오히려 더 낫다(2) 2014.06.02

'삶'이라는 거대한 벽, 풀리지 않는 문제에서 깨내 볼 영화 <소울>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1. 1. 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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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소울>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 포스터.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2010년대 들어서 예전만 못하다는 말을 듣고 있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그도 그럴 것이 <카 2> <카 3> <몬스터 대학교> <굿 다이노> 등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동안 픽사가 쌓아올린 업적을 향한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결과물을 내놓았기 때문일 텐데, 픽사라는 회사의 흔들리는 내부 사정도 무시하진 못할 테다. 픽사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디즈니의 위기 탈출에 절대적인 공을 세웠던 존 라세터가 성 추문으로 쫓겨났거니와, 그에 앞서 임금 스캔들에 연류되어 홍역을 치른 픽사였다. 


2015년 <인사이드 아웃>과 2017년 <코코>가 '역대 최고'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픽사에게 다시 명성을 안겼고, 2018년 <인크레더블 2>와 2019년 <토이스토리 4>가 나란히 속편으로 월드와이드 10억 달러를 넘기는 수익을 안겼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어김없이 우리를 다시 찾아온 픽사는 <소울>을 선사했다. 디즈니는 북미에서 디즈니+로 공개할 수밖에 없었고, 아직 디즈니+가 들어오지 않은 국내에서는 극장 개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존 라세터가 연출한 <토이스토리>의 원안을 만들었고, 픽사의 황금라인이라고 해도 무방한 <몬스터 주식회사> <업> <인사이드 아웃>을 연출한 피트 닥터 감독의 최신작인 만큼 100%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상상력'을 전할까? 그 상상력엔 어떤 현실이 있을까? 픽사로 한정해, 최초로 사람을 주인공으로 했던 작품이 <인크레더블>(2004)이었고 최초로 여성을 주인공으로 했던 작품이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이었다면 <소울>(2020)은 최초로 흑인을 주인공을 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8년의 차가 있는 바, 2028년에는 어떤 '픽사 최초'가 선보일지 궁금하다.


살고 싶은 영혼 조, 살기 싫은 영혼 22호


뉴욕시의 한 중학교에서 시간제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재즈 음악가 조 가드너, 그에게 좋지만 좋지만은 않은 소식이 날아든다. 학교에서 그를 정식 교사로 채용하겠다는 것, 하지만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지 교사로 평생 일하긴 싫다. 물론 그의 가족은 축하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 유명 재즈 음악가인 도로시 윌리엄스의 밴드에서 연락이 온다. 그가 가르쳤던 아이가 커서 드러머로 있는 밴드였는데, 중학교 교사라는 타이틀에 처음엔 실망했던 도로시가 그의 피아노 실력을 보고는 바로 함께하자고 한다. 


꿈에나 그렸던 제안을 받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 기분에 정신이 팔려 위험천만한 뉴욕 한복판을 아무 생각 없이 거닐다가, 맨홀에 빠져 버린다. 알 수 없는 몸의 형태로 알 수 없는 공간에서 깨어난 조, 이내 그는 자신이 '머나먼 저세상'으로 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한순간 죽음으로 가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조는, 도망치다가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가게 된다. 몇 번이고 지구로 가고자 해 보지만 실패하고, '유 세미나'라는 곳으로 향한다. 새로운 영혼들이 지구에서 태어날 요건을 충족하도록 교육시키는 곳이었다. 


얼떨결에 노벨상을 수상한 심리학자의 영혼의 이름표를 갖게 된 조는, 새로운 영혼의 멘토가 되어 그로 하여금 지구로 갈 마지막 하나의 열정 '불꽃'을 채우게 한 다음 '지구 통행증'을 가로 채 지구로 가려는 수작을 꾸민다. 그런데 하필 그가 멘토로 함께 하게 된 이는, 22호로서 지난 수천 년간 지구로 가길 거부한 영혼이었다. 함께 이런저런 구역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은 둘은, 지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구역에서 역시 지구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이들을 만나 우연히 코마 상태에 있던 조와 누군가의 고양이로 빙의된다. 문제는, 조의 영혼이 고양이로 빙의되고 22호가 조로 빙의된 것이었다. 과연, 조는 도로시의 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까? 22호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거지?


<소울>은 비주얼, 메시지, 음악에 상상력, 유머, 열린 태도 등 그야말로 영상 매체 중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에 도달한 면모를 과시한다. 러닝타임은 평균치인 2시간에 턱 없이 부족한 1시간 40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건 많다 못해 넘칠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수준이 되었고 '아이'들이 보기엔 상당히 어렵지 않나 싶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메시지'일 텐데, 이 영화가 보여 주는 여러 가지 사항 중에 하필 메시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니 더욱 어렵게 비춘다. 


재즈를 삶의 이유라며 남을 설득할 수 있는 자기확신과 실력을 가진 조 가드너는, 하필 '꿈'을 이룬 순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다. 모두가 삶의 안정 대신 꿈이라는 삶의 이유를 찾아 나서라고 하는데, 조는 이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앞에 살고 싶은 이유를 모르는 영혼이 나타났고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조로서는, 얼토당토 말도 되지 않는 삶의 이유인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그들을 보며, '아직 세상을 잘 모르네, 제대로 된 꿈을 꿔 봐'라고 할 것이다. 


이 영화는 통념과 시대정신을 바꿀 만한 인사이트로 지금 세대와 다가올 세대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어떻게 살아야 맞는 거지'라는 생각은 더 이상 통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 거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해진 정답은 없으며, 각자의 자신이 찾은 해답으로 살아가면 될 테다. 조 가드너로선 오직 재즈에만 몰두, 몰입, 과몰입하는 것만이 삶의 이유일 필요는 없고, 22호 영혼으로선 일상의 아무것도 아닐 순간순간이 아름답게 보이며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다만, 영화는 일련의 유려한 서사로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편하게 삶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보여 주고 있지는 못하다. 영화를 크게 나눈다고 했을 때, 챕터가 바뀌는 부분이 그리 매끄럽진 않다. 우연에 기댄 게 자주 보인다. 대신 태어나기 전의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저세상 상상력과 뉴욕의 길거리를 함께 관통하고 있는 것 같은 현실 상상력이 아우러져, 애니메이션이어야만 할 수 있는 포스를 뿜어 낸다. 상당히 어렵지만 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부여 한 것이리라.


누군가에겐 '인생 영화'


제목 '소울'엔 두 가지 중의적 의미가 있을 테다. 영혼을 뜻하는 '소울'과 재즈 음악가를 포함한 음악가가 지녀야 할 정신과 애정과 신념을 일컬는 '소울'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두 배경, 조 가드너와 22호가 영혼으로서 존재하는 '태어나기 전 세상'과 조 가드너와 22호의 영혼이 각각 고양이와 조 가드너로 빙의한 '뉴욕시'의 현실에 맞닿아 있다. 그렇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에서의 '소울'은 또 다른 무엇에 다다른다. 주지한, 영혼으로서의 소울이 지향하는 게 음악가의 정신, 애정, 신념으로서의 소울에 있다면 영화는 나아가 '지금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나로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토대를 먼저 세우고 난 뒤 소울로서의 소울로 향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하여,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삶에 직접적으로 실천하기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말이다. 그동안 교육받고 경험하고 실천하며 헤쳐 왔던 삶의 이중, 삼중의 역설을 뒤로하고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열린 태도'야말로 이 영화를 볼 때 핵심 중 핵심 키워드라 할 만하다. 아무 생각 말고 영화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며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반드시 다시 한 번 보며 정립된 생각으로 대응해 보면 좋을 테다. 살아오면서 느꼈던 '뭔가 하나 빠진 느낌'을 채울 절호의 기회일지 모른다. 


'소울'이라는 단어의 한자어 '疏鬱'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 본다. '소통할 소' '답답할 울'의 두 글자로, '답답한 마음을 풀어헤친다'는 의미를 갖는다. <소울>을 다 보고 나면, 누군가는 반드시 답답한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나는 왜?'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둥실둥실 떠다니는 물음들을 어느 정도 해소하게 해 주는 힘이 있는 애니메이션이었다. 해소해 주진 못해도,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너만 그런 고민을 하는 게 아냐, 우리 모두 같은 고민으로 힘들어 하지. 내 생각을 한 번 들어 볼래?' 하는 것 같다. 누군가에겐 '인생 영화'로 등극할 만하다. 삶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면 언제든 꺼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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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뉴욕, 삶, 상상력, 소울, 영혼, 인생영화, 재즈, 죽음, 피트 닥터, 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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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세계관과 영상 액션에의 혁명적 상상력의 산물 <매트릭스>

오래된 리뷰 2019. 10.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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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매트릭스>


영화 <매트릭스>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1999년, 20년 전 세기말의 기대와 불안에 직면한 우리들에게 당도한 역대급 영화들이 생각난다. 수많은 영화들이 자리하고 있겠지만, 단연 우리나라엔 <쉬리>가 할리우드엔 <매트릭스>가 있다 하겠다. <쉬리>는 흥행 신기록은 물론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신기원을 열어젖혔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으로, 이후 한국영화 20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매트릭스> 역시 20세기를 마무리 짓고 21세기를 화려하게 열여젖힐 SF 영화의 신기원으로 평가 받는 작품으로, 이후 20년 동안 영화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해도 무방하겠다. 20년 전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정교하고도 상상력 풍부한 SF적 영상을 선보이는데, 가히 '혁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뿐더러 이상하지 않다. 


<존 윅>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키아누 리브스의 대표작으로, 로렌스 피시번과 휴고 위빙 등이 눈에 띈다. 성전환 수술을 통해 남매가 되었다가 이젠 자매가 된 당시 워쇼스키 형제는, 이 영화로 당대 최고의 감독이 되었지만 이후 실패를 계속했다. 지난 8월 <매트릭스 4> 제작이 확정되며 워쇼스키 자매의 복귀가 잡혔는데, 위대한 트릴로지 <매트릭스> 시리즈를 어떤 식으로 이어갈지 기대 반 걱정 반인 상태이다. 한편, 지난 2016년 재개봉 이후 개봉 20주년을 맞이해 4DX로 재재개봉하기도 해 새삼 인기를 실감했다. 


인간과 AI, 그리고 매트릭스


1999년, 네오는 낮에는 평범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해커로 활동 중이다. 그는 오랫동안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껴왔다. 어느 날 트리니티라는 여인이 접근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알린다. 얼마 후 모피어스라는 남자의 전화를 받고 알 수 없는 요원들의 접근에서 도망치려 하지만 포기한다. 요원들이 그를 잡아 자기들을 도와 모피어스를 위시한 테러리스트들을 잡자고 제안하지만 네오는 거절한다. 그러자 그들은 알 수 없는 벌레 기계를 네오 몸속에 넣는데, 네오가 잠에서 깨어난다. 


다시 한 번 모피어스에게서 전화를 받고는 트리니티 일행과 함께 만나러 간다. 와중에 진짜였던 벌레 기계를 몸속에서 빼낸다. 모피어스를 대면하게 되는 네오,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에 그가 건네는 파란 약 아닌 빨간 약을 먹는다. 곧 그의 크루들이 모인 방으로 가서는 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가 맞닥뜨린 진실은 1999년의 인간 세상이 아닌 AI가 인간을 지배하고 재배하는 2199년 세상이었다. 


모피어스는 그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21세기 초 인간에 의해 탄생한 AI, 인간은 언제인지 누가 먼저 시작한지 모를 전쟁에서 지고는 AI에게 지배된다. 곧 그들의 에너지원으로 재배되기 시작한다. 1999년 인간 세상, 즉 매트릭스는 AI가 만들어낸 꿈의 세계이자 가상현실인 것이다. 모피어스와 일행들은 능력자에게 풀려나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진실을 알게 되었고 인간의 구원과 자유를 위해 반란을 꿈꾼다. 그들은 예언된 능력자의 재림을 기대하며 오랜 세월 매트릭스에서 '그'를 찾았고, 네오가 그라고 판단한다. 그들은 네오를 훈련시키며 전쟁의 종식을 준비한다. 


진짜 보다 진짜 같은 가짜의 철학적 세계관


영화 <매트릭스>는 철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든 세계를 바탕으로 온갖 문화 요소들을 섞어 만든 SF 사이버펑크 비쥬얼 블록버스터이다. 한 마디로 축약하기가 매우 힘든 영화인데, 세계관과 영상 액션이 가장 눈에 띈다. 영화 속에서도 잠깐 등장하는 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 주장하는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세계관이다. 앤더슨은 당연히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였지만 사실 너무나도 정교한 가상현실이었고, 정작 네오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현실에 경악하는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사는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속속들이 지배당하고 있다는 생각 또는 누군가의 꿈속의 한낮 등장인물에 불과하다는 생각 또는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생각 또는 다른 차원이나 장소에 또 다른 내가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 <매트릭스>의 세계관은 이와 다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론 다르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진짜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이 가짜라면 일순간 모든 게 무너져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하여, 영화 속 모피어스 일행이 해왔고 하고 있고 하고자 하는 게 다분히 이해가 간다. 비록 진짜와 진배 없는 곳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생산적인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알고 보니 AI의 숙주로 모든 걸 빼앗기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말이다. 누군가는 '모르면 약이요 아는 게 병'이라면서 괴로워하겠지만, 나로선 '아는 게 힘이다'라는 생각을 우선시 하겠다. 자유를 갈망하고 되찾겠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처럼 자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현대사회의 병폐라고 할 수 있는 '가상'을 비판한다. 가상 자체가 비판받아야 마땅한 건 절대 아니겠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진짜와 가상을 구분 못하게 하고 나아가 진짜 보다 가상을 더 떠받들게 되는 상황에 직면한 지금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매트릭스> 속 진짜 같은 가상현실에서 살며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굳이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이 철학적 함의를 현실적 상상력 풍부한 세계관에 훌륭히 접목시켜 보여주었다. 


혁명적 영상 액션


<매트릭스>를 '혁명적'이라 말하는 건 비단 철학적으로 상상력 풍부한 세계관을 내보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모피어스 일행이 혁명을 수행하고자 하는 게 주요 내용의 골자인 이유 때문만도 아니다. 영상 액션의 혁명을 이룩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액션 자체로선 이 영화 말고도 신기원을 이룬 영화들이 많지만, 영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액션의 경지를 선보였다. 이 영화 이후 이 정도의 혁명적 액션을 보여준 건 <와호장룡>이나 <본> 시리즈, 그리고 최근의 <업그레이드> 같은 류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매트릭스> 정도의 파급력과 영향력을 가진 영화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영화에서 크게 4장면에 걸쳐 선보인 특수 시각효과 '타임 슬라이스 포토그래피'는 경이로운 비쥬얼을 선사하는 데 절대적으로 공언했다. 이 기법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스틸카메라에 의해 동시에 촬영된 이미지들을 연결해 카메라가 정지된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낸다. 도입부에서 트리니티가 경찰들을 상대해 공중으로 떠 발차기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공중으로 떠올라 발차기를 하기 직전 멈추고 카메라가 360도로 한 바퀴 도는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엔, 그동안 곳곳에서 너무나도 많이 봐온 장면이기에 생소하거나 충격적이지 않지만 당시로선 충격 그 자체였다. 


이보다 훨씬 더 인상적이다 못해 머릿속에 박혀버린 장면이 있다. 중후반부, 잡혀간 모피어스를 구하기 위해 매트릭스에 잡입한 네오와 트리니티. 네오가 날아오는 총알들을 피하는 장면이다. 도입부 공중 발차기 장면처럼 카메라가 360도 도는 건 똑같지만, 네오는 90도 각도로 허리를 뒤로 젖히고 총알을 피하는 것이다. 어떻게 찍었을지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동시에,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다. 120대의 스틸카메라가 동원되어 편집의 힘으로 나왔다는 이 장면, 지금 봐도 훗날 봐도 언제나 멋있는 장면일 테다. 


타임 슬라이스 포토그래피라는 시각효과 기법은 1980년대에 나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고 한다. 즉, 기술자라면 누구나 아주 잘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기술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비쥬얼 쇼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또 다른 차원일 테다. 이 영화의 영상 액션 혁명은 상상력으로 이루어졌다. <매트릭스>는 상상력의 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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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가상현실, 매트릭스, 상상력, 액션, 진짜가짜, 철학,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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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옮긴다는 상상력에 입힌 '지구를 선도하는 중국'의 비주얼 <유랑지구>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 5. 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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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유랑지구>


영화 <유랑지구> 포스터. ⓒ키다리이엔티



2075년 태양이 수명을 다해 폭발을 앞두고 있다. 지구뿐만 아니라 태양계가 소멸될 위기에 처하게 되어, 지구연합정부는 지구를 태양계 밖으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운다. 일명 '유랑지구계획'으로 지구 표면에 만여 개의 행성추진기를 건설하여 지구를 옮기는 한편, 태양에서 멀어져 한파가 닥칠 것을 대비해 지하도시를 건설해 살아남은 35억여 명을 대피시켰다. 


우주비행사 류페이창은 지구를 인도하는 우주정거장에 파견되어 17년 후 지구로 귀환할 계획이었다. 17년이 지난 현재,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이다. 한편, 베이징 지하도시에 거주 중인 류페이창의 아들 류치는 춘절을 맞이해 할아버지 신분증을 위조하여 의붓여동생 한둬둬와 함께 지상으로 나온다. 하지만 면허 없이 로버를 몰다가 체포되고 뇌물로 아이들을 빼내려한 외할아버지 한쯔양도 체포된다. 


목성을 지나고 있던 지구, 목성의 강력한 인력으로 엄청난 지진이 발생한다. 상당수의 행성추진기가 정지되었고 목성으로 빨려들어가지 않기 위해선 하루빨리 복구해야 했다. 지진으로 탈옥하는 한쯔양과 아이들, 로버를 몰고 가다가 구조부대에게 징발된다. 함께 행성추진기 복구 임무에 투입된 것.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지구 밖에서는 아버지가, 지구에서는 외할아버지와 아이들이 분투한다. 


가공할 흥행력


중국 영화 역대 2위의 흥행력을 선보였다. 영화 <유랑지구>의 한 장면. ⓒ키다리이엔티



영화 <유랑지구>는 중국 최초의 블록버스터급 SF 재난 영화로, 지난 춘절 시즌에 개봉하여 역대급 흥행 수익을 냈다. 중국 내에서만 7억 달러에 가까운 수익을 내 <전랑 2>(8억 6천여 달러)에 이은 역대 2위에 랭크되었고, 북미에서도 개봉해 역시 <와호장룡>에 이은 역대 2위에 랭크되었다. <와호장룡>이 할리우드 제작인 걸 감안하면, 북미에서 가장 많은 수익을 낸 중국영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이 영화의 기가 막힌 흥행력엔 여러 가지 요소가 함께 했다. <유랑지구>가 중국 현지 개봉한 날짜가 2019년 2월 5일, 그로부터 한 달여 전인 1월 3일 중국 우주개발 기구 국가항천국이 지난해 12월 8일 발사한 달 탐사선 '창어 4호'가 인류 최초로 달 뒤편에 착륙했다. 대국굴기에 이은 중국의 초국가적 프로젝트 '우주굴기'가 성공했다고 해도 무방한 결과물이었다. 


우주굴기의 분위기를 노린 것인지 춘절(2월 4일~10일) 연휴 특수를 노린 것인지 혹은 둘다 노린 것인지 영화는 기 막힌 타이밍에 개봉해 엄청난 수익을 냈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별 감흥은 없다. 21세기 들어 중국은 이미 북미를 넘어서 세계 최고의 영화시장으로 부상했으니, 중국 내에서의 수익이야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북미 시장에서도 괜찮은 성적 아니 나름 엄청난 성적을 거두었고, 그 요소로 여타 중국 역대급 흥행작들만큼 '국뽕'이 꽉 들어차 있지 않다는 것과 그동안 중국영화에서 구경하기 힘들었던 CG가 주를 이루었다는 것과 SF소설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수상한 류츠신 작가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 등이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를 선도하는 중국


'지구를 선도하는 중국'이라는 프레임을 은연중에 깔았다. 영화 <유랑지구>의 한 장면. ⓒ키다리이엔티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SF 재난 영화 문법이 20세기까지의 국가를 위해 한 몸 바치는 주의에서 21세기의 가족을 위해 한 몸 바치는 또는 살아남는 주의로 바뀌는 와중에, <유랑지구>도 그 문법을 충실히 따랐다. 중국을 위한 것도, 지구를 위한 것도, 태양계를 위한 것도 아닌 그 가장 궁극적인 저변에는 가족을 위한 행동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위한다는 이 문법은 국뽕을 넘어선 '(민)족뽕'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를 예로 들자면, 이 영화에서 인류는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반면, <유랑지구>에서 인류는 지구를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계획을 세운다. 사고에 대처하는 발상 자체가 다른 것, 인류가 인류일 수 있는 건 지구에 살기 때문이라는 확고한 생각의 발현이다. 


여기에 중국과 중국인을 입히면, 그게 <유랑지구>의 저변에 깔려 있는 생각이다. '지구를 선도하고 견인하는 중국'이라는 개념. 중국의 빅 픽처와 다름 없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외할아버지, 아버지, 아들과 딸의 3대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또한 빅 픽처의 일환으로, '대를 이어서 과업을 수행한다'는 중국적 개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 만하게 대놓고 중국을 내세우지만 또 모르면 모르게 은연중에 깔려 있는 듯도 하기에, 그리 거북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할리우드식 국뽕과 족뽕에 길들여졌지만 탈피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안팎에서 일고 있는 와중에, 이 정도는 별 감흥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역효과의 효과'를 얻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상상력, 비주얼, 스토리


상상력과 비주얼은 합격, 스토리는 불합격. 영화 <유랑지구>의 한 장면. ⓒ키다리이엔티



모든 외부적 요소를 거둬내고 영화 자체로만 보자면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SF 재난 영화의 20세기 버전이다. 25년여 쯤 전 1990년대 중반 정도의 수준으로, 당연히 CG야 그때보단 훨씬 좋겠지만 스토리나 캐릭터는 그때보다도 못하다. 비록 원작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각색을 거쳤지만 그래도 원작의 설정 자체가 워낙 사람을 끌어당기는 흥미를 갖추고 있었기에 망정이었지,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지 않았을까 싶다. 


원작의 출중한 상상력에 발맞출 수 있었던 건 CG, 즉 비주얼이었다. 영화 성격상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했던 비주얼 부분이, 가장 열심히 일했고 걸맞은 성과를 냈다고 본다. 제작비가 '불과' 5천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던 점을 미루어 보아도 충분히 선방하고도 남음의 모습을 띤다. 이제 스토리만 갖추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야말로 '이야기의 보고(寶庫)'가 아닌가. 그 수많은 진귀한 이야기들을 표나지 않게 끄집어만 내도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앞다투어 열광할 것을 자명한 사실이다. 지금은 중국이 예전의 중국 위상을 되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어서 방향이 일반적이지 않아 그렇지, 과거 5, 6세대 감독들의 영화는 그야말로 전 세계를 호령했다. 


중국영화의 다양성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성장하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는 요즘이다. 그런가 하면 한국영화의 천편일률적인 적당한 흥행요소 답습 체제가 막을 내리고 있다는 게 걱정이면서도 한편 앞날을 기대케 한다. 총체적으로 보니 세계 영화계가 과도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다양한 생각들이 안팎으로 투영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금, 관객은 행복한 비명을 지를까 지루한 하품을 연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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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패니메이션의 거장 '호소다 마모루'의 평작 <미래의 미라이>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 2.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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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미래의 미라이>


<미래의 미라이> 포스터.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이을 감독으로 평가받으며 2006년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가히 센세이셔널하게 등장한 호소다 마모루 감독. 이후 거의 예외없이 3년 만에 한 편씩 내놓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했다. 호소다 마모루 월드라고 해도 충분하다. 


<썸머 워즈> <늑대아이> <괴물의 아이>까지 이토록 꾸준히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을 내놓는 것도 쉽지 않을 터,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을 테고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믿고 볼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겠다. 누가 뭐래도 재패니메이션의 거장이다. 


그동안의 기록을 깨고 <괴물의 아이>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신작 <미래의 미라이>는 <늑대아이>부터 시작된 '아이' 시리즈의 연장선상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호소다 마모루'라는 이름에 비해서는 평범한 수준에 머물렀다고 말할 수 있겠다. 


현실과 판타지의 조화롭고 유기적 결합,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메시지는 여전하고 원숙해지기까지 했지만, 그동안 그가 보여준 것들에 비해 흡입력과 상상력이 조금 미흡하다. 하지만, 호소다 마모루 월드에 입문하는 이라면 역시 물론 충분히 만족할 만한 수준이다. 


4살 아이 쿤, 생의 최초 위기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유독 기차를 좋아하는 4살 남자아이 쿤에게 여동생 미라이가 생겼다. 엄마, 아빠 그리고 반려견 윳코와 함께 행복하기만 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와중에 난데 없이 나타난 미라이의 존재는 쿤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혼자서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된 쿤보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라이에게 엄마, 아빠의 시선과 관심이 쏠린다. 쿤으로선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싫은 그 모습은 단순히 시선과 관심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느낀다. 엄마, 아빠는 쿤이 아닌 미라이만 사랑하게 된 것이다. 


행복하기만 했던 삶에 위기가 찾아온 쿤, 건축가 아빠가 지은 집 안의 마당에 나갈 때마다 가족들을 만난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는 윳코, 미래에서 온 미라이,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과거 모습들까지. 


그래도 바뀌지 않는 건, 바뀌지 않는다고 쿤이 느끼는 건 엄마, 아빠의 사랑이 자신이 아닌 미라이에게만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쿤이는 자의 또는 타의로 가족의 역사를 들여다보며 생의 최초 위기를 잘 타개할 수 있을까? 


단절과 상실을 채우는 가족의 면면들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장남·장녀의 삶에 최초의 존재론적 위기가 닥치는 건 동생의 출현이다. 그건 단순히 개인의 지엽적이라 할 수 있는 물리적·정신적 위기가 아닌 , 총체적 위기인 것이다. 더 이상 내가 나일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시작해 외로움과 고독감과 단절감까지 느낄 수 있다. 


쿤의 입장에서 미라이의 출현은 그 자체로 존재 말살의 위협까지 느낄 수 있는 '폭력'일 수 있다. 머리가 커갈 수록 '모르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알게 되지만, 흔히 어린 아이들은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친하게' '사이좋게' 지내보라고 한 마디 하면 잘 지낼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쿤은 미라이와 잘 지내보려 한다. 생명의 신비에 대한 신기함,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입장에서의 동질감 등이 발현되어 거부감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부모, 즉 어른이다. 그들은 큰 아이의 작은 아이를 향한 관심의 모양이 위태롭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그게 비록 사실일지라도 진실은 아닌데 말이다. 


이후 큰 아이는 작은 아이와의 관계가 단절됨을 느끼고, 이미 단절되었다고 느끼는 어른들과의 관계에 더해 더할 나위 없는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영화 <미래의 미라이>는 큰 아이의 관점으로 보는 가족의 면면들이다. 가족의 면면은 곧 가족의 역사가 되고 가족의 역사는 곧 큰 아이와 작은 아이 그리고 엄마, 아빠와의 관계 형성 또는 복구로 이어진다. 아니, 이어지길 바라는 듯이 보인다. 


상상력과 통찰력의 조화는 훌륭했으나, 구성과 방식이 별로였다


<미래의 미라이>의 한 장면.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는 쿤의 현실과 머릿속 생각 즉 판타지를 위화감 없이 조화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이'는 엄마 뱃속이 기억나고 동물은 물론 식물과도 얘기가 통한다고 하지 않는가. 아마 아이들의 머릿속은 어른들보다 훨씬 무궁무진하고 정교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세계들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구성과 판타지를 구성하는 방식이 훌륭하진 못했다. 그 자체가 가지는 훌륭함, 그 본질이 보여준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거기까지 가는 데 느끼는 지루함이 뒤로 갈수록 다른 모든 걸 압도했다. 


가족의 역사를 통해, 세세하고 복잡다단한 것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 즉 쿤과 미라이를 만든 것이라는 깨달음이 참으로 대단하지만 그 대단함을 위해 포기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소다 마모루의 전작들에 비해서 이 작품 <미래의 미라이>는 균형적이지 못했다. 한층 원숙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택한 방식에의 오류가 크게 다가온 것이다. 


여기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미화까진 아니라 할지라도 미묘하게 대하는 듯한 태도와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에게 떠맡기는 듯한 태도 등에서 제대로 되지 못한 비성숙한 느낌을 받았기에, 차마 '그럼에도'라는 말을 붙이기가 망설여진다. '그럼에도 삶에 대한 예리하고 묵직하고 원숙한 통찰력을 선보였기에 충분히 가치 있고 좋은 영화였고 여전히 차기작을 기대케 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문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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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놀란표 평작 <인터스텔라>

오래된 리뷰 2018. 1. 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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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10년 전 <다크나이트>부터였던 것 같다.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던져줄 거라고. 2년 뒤에 나온 <인셉션>은 그 기대에 부합하는 최상의 작품이었다. 아니, 놀란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메멘토>부터 우린 그에게 기대를 해왔고 그는 항상 부합해 왔다고 보는 게 맞다. 


2017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 할 만한 <덩케르크>로 '부활'하기까지 그에겐 사실상 여러 부침이 있었다. 그가 연출하지는 않았지만 기획하고 프로듀서하고 제작했던 영화들이 흥행과 비평에서 쓴맛을 맛본 것이다. 그 한가운데 그가 연출한 <인터스텔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1000만 명 관객을 돌파한 이 영화가 놀란의 '흑역사'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놀란이라면'에 부합하지 못한 흥행과 비평 성적을 거두었다. 북미에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고 그나마 월드와이드 흥행이 잘 되었다. 영화는 놀란의 엄청난 필모에 비해 명백한 '평작'이다. 그럼에도 <인터스텔라>를 다시금 들여다보는 이유는, 영화가 던지는 이야기들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가지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줄거리를 알 필요가 있다.


실현 가능한 최신·최고의 우주적 상상력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20세기에 저지른 잘못으로 모든 게 무너진 미래의 머지 않은 미래의 어느 때, 인류는 끝없이 불어닥치는 먼지와 옥수수밖에 남지 않은 식량 고갈로 앞날이 캄캄하다. 아들 딸과 함께 옥수수밭을 일구며 농부로 살아가는 전직 NASA 연구원 쿠퍼(매튜 매커너히 분)는 집에서 일어난 초자연적인 일이 중력에 의한 좌표를 말하는 걸 알고 그곳을 찾아간다. 알고 보니, 그곳은 극비로 운영되고 있는 NASA였다. 


NASA는 다목적 우주선 인듀어런스호를 만들어 지구를 떠나 '새 집'을 찾기 위한 마지막 탐험을 준비하고 있다. 쿠퍼는 모두를 뒤로 하고 막중한 임무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48년 전에 생겨난 '웜홀'을 통해 다른 은하계로 가고자 한다. NASA는 이미 여러 행성에 여러 탐험대를 내보냈었고 이번 탐험으로 그들 중 몇몇을 구출하며 그들에게서 행성의 정보를 얻어 '새 집' 여부를 판단하고자 한다. 


성공적으로 떠나는 탐험대 겸 구출대, 여지없이 실패를 맛보며 대원 중 한 명을 잃고 아무런 소득 없이 지구 시간으로 20년 넘게 써버리는 불상사도 겪지만 굴하지 않고 전진한다. 결국 성공에 가까워지지만, 뜻하지 않은 거대한 비밀 또는 거짓말을 알게 된다. 그들은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구는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인가. 


영화는 실현 가능한 최신·최고의 이론을 바탕으로 상상 그대로의 우주를 스크린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3시간 가까이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신세계들만 감상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이 영화를 앞뒤로 1년의 차이를 두고 찾아온 <그래비티>와 <마션>을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 고증과 상상력이다. 


압도적인 반쪽 짜리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놀란은 <인터스텔라>로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 중심엔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인간'이 있었을 텐데, 그래서 볼 거리와 감상할 거리보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으면 했을 텐데, 보는 이로 하여금 과학적으로 단련된 상상력의 구현과 함께 그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랑과 가족애가 돋보였다. 


영화는 현재까지 물리학, 그중에서도 우주론에 입각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들이 다수 나온다. 인듀어런스호가 웜홀 입구로 가기 위해 화성 주변에서 화성의 중력을 이용하는 건 '중력기둥'이라 한다. 인듀어런스호가 계속 회전하는 이유는 '등가원리' 때문이다. 이것을 활용하면 인위적인 중력을 만들 수 있어 불편함 없이 우주선 생활이 가능하다. 그리고 '블랙홀과 웜홀'이 있다. 


<인터스텔라>는 블랙홀의 '중력렌즈' 효과, 즉 블랙홀을 원반층이 적도를 가로지르고 있고 블랙홀 주면으로 고리 모양의 층이 보이는 모습을 최초로 묘사했다. 웜홀을 이용한 시간여행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인데, 영화의 감수를 본 세계적인 학자 킵 손은 웜홀의 입구를 광속으로 운동시킬 수 있다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영화는 그의 주장에 입각해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놀랍도록 비영화적인 이론에 놀란의 상상력이 입혀지니 경이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압도한다. 그런데, 거기에 '사랑'이라는 옷을 입히니 많이 어설퍼 보인다. 아니, 사랑이라는 건 옷 따위가 아닌 결정체이니 '과학'의 옷을 입히고자 했다는 게 맞다. 하지만 과학이 쏘아보낸 강렬함이 눈길을 모조리 뺏아가 버리니 사랑의 위대함이 오히려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한 마리 토끼만 그것도 의도치 않은 토끼만 잡은 셈이 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실상 반쪽 짜리, 아니 반쪽도 못 되는 정도이지만, 그 반쪽 짜리가 엄청난 힘을 발휘했기에 이 정도 대접(?)을 받는 것이다. 적어도 그 힘과 영향력에 대해선 이의가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면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돌고 돌아 다시 '놀란'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놀란이 설 자리는, 놀란의 전후 작품들보다 훨씬 적다. 경이로운 볼 거리에 압도 당하고, 블랙홀과 웜홀 등에 관한 과학적 논란에 흥미를 빼앗기고, 점점 사랑의 산으로 향하는 영화를 향한 호불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이 영화만큼은 귀결점이 놀란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누구도 아닌 놀란의 영화에서 놀란을 빼놓을 순 없다. 놀란의 생각과 의도를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건 큰 차이다. 그의 필모와 인터뷰를 살펴 봤을 때,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결국 과학도 사랑도 모두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리라. 쿠퍼가 NASA에 가게 되어 우주 저 멀리까지 가게 된 것도 결국 알 수 없는 '그들'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 때문이지 않은가. 


문제는, 우주를 은하계를 심지어 시간을 관통하고 관장까지 하게된 인간의 중심성이 과도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안으로 안으로 들어간 <인셉션>과 달리 밖으로 밖으로 나간 <인터스텔라>의 성향과 맞지 않았을지도. 과도해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아무도 알아채려 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부분에서 놀란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다시금 '인간'에 천착한 놀란은 <덩케르크>로 성공과 부활을 만끽했다. 


그의 차기작도 인간에 천착할 것은 명약관화이다. 그가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 다른 <다크나이트>를 보고 싶다고 하면 너무 큰 바람일까. 내러티브와 스타일에 매몰되지 않고 완전히 장악한 그의 면모를 말이다. 기대는 기대를 낳고 실망은 실망을 낳지 않는 법. 크리스토퍼 놀란을 향한 기대는 영원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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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말을 빌려 50년의 기행적 소설 쓰기를 해명하다 <모나드의 영역>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1.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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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쓰쓰이 아스타카의 <모나드의 영역>


소설 <모나드의 영역> 표지 ⓒ은행나무



독자가 책을 접할 때 출판사의 홍보 마케팅 전략 바깥에 있기는 결코 쉽지 않다. 어떤 상품이 그러지 않겠냐마는 책은 다르다. '책'이라는 단일 상품군 안에 샐 수 없이 많은 상품이 존재하는 것이다. 특별한 상품이자 특별한 사업 생태계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거기엔 정녕 수많은 '최고'들이 존재한다. 


'책', 그 중에서도 '소설'은 최근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읽을 거리와 각종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보는 주지 못하고 읽는 데에 방점을 둔 '소설'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나라에서 '일본 소설'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북유럽 소설의 인기가 수직 상승 중이지만 한계가 분명한 반면, 일본 소설은 꾸준히 인기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등은 그들의 거의 모든 소설이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일본 소설만이 갖는 정서가 작금의 한국 독자에게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일본 SF 거장 '쓰쓰이 야스타카'의 소설도 그 성격에 비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SF적 상상력에 기반한 블랙유머와 넌센스는 얼핏 난해하지만, 인간사회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내포되어 있다. 


쓰쓰이 야스타카는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유명한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파프리카>의 원작자로 유명한데, 80세가 훌쩍 넘은 고령임에도 장편소설을 써냈다. 제목도 다분히 쓰쓰이스러운 <모나드의 영역>(은행나무). 마지막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쓰쓰이 야스타카의 50년 작품 세계의 집대성'이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띈다. 


쓰쓰이 야스타카만의 진지하지만 기상천외한 상상력


개인적으로 쓰쓰이의 작품을 매우 오랜만에 접하는 바, 이번에도 그 특유의 진지하지만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발휘했을지 기대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숙하게 발휘했다고 할 수 있겠다. 미스터리와 SF의 결합, 그리고 인간 세계를 재조명하는 각종 지식들의 총집합이 자못 흥미롭게 진행된다. 


어느 날 강변 둔치에서 발견된 여성의 한쪽 팔, 수사를 맡은 꽃미남 형사 신이치는 '아주 커다란 어떤 사태의 시작처럼 느껴진다는' 상사의 말에 조심히 수사를 한다. 한편 역 앞 로터리 상가에 위치한 빵집 두 곳 중 하나 '아트베이커리', 미대생 알바를 둔 덕분에 평소 동물 모양의 빵을 팔고 있다. 갑자기 휴가를 신청하는 알바 둘, 자기들보다 실력이 더 좋은 친구를 알아봐뒀다고 호언장담한다. 


실력이 더 좋다는 친구 구리모토, 어딘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과연 실력은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여성의 한쪽 팔과 똑같은 모양의 빵을 만든 게 아닌가? 자기도 모르게 만들었다는 그, 그 와중에 단골 손님인 미대 유이노 교수가 그 빵을 본다. 그 정교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는 칼럼에 개재한다. 곧 팔 모양 빵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하고 방송도 탄다. 


구리모토 때문에 잘리게 된 알바 둘과 망하게 생긴 맞은 편 빵집 주인은 이 상황을 보고, 그 빵 모양이 강변 둔치에서 발견된 여성의 한쪽 팔과 완전히 똑같다고 경찰에 신고를 한다. 신이치는 빵집으로 향하지만, 구리모토는 찾을 수 없고 어딘지 이상한 미대 유이노 교수를 만나게 된다. 곧 유이노 교수는 공원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을 거듭하는데...


'신'의 말을 빌려 해명하는 쓰쓰이의 50년 기행적 소설 쓰기


소설은 여느 추리소설처럼 흥미롭게 시작된다. 여성의 한쪽 팔에 이어 한쪽 다리까지 발견된 상황, 그런데 그와 똑같이 생긴 빵을 만드는 빵집이 있다? 그 와중에 기이한 행동으로 의심을 받고 또 사람들의 이목도 끄는 미대 학생 구리모토와 미대 교수 유이노까지. 다 갖춰진 느낌이다. 그런데 사건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지점에서 쓰쓰이 야스타카만의 상상력이 빛을 발한다. 진지하지만 기상천외한, 즉 일상생활을 파괴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아니 일상생활은 그대로 둔 채 그를 둘러싸고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지극히 마니아적이라고 하겠는데, 그만의 세계가 하나뿐이 아니고 참으로 다채로워 그 층위가 높고 넓다. 


단도직입적으로 소설은 '신의 강림'이라는 소재를 주요 위치에 두었다. 신은 세상의 비밀을 무참히 폭로한다. 그 방법은 다분히 인간적인데, 마지막 장편 소설까지 참 쓰쓰이답다. 상해죄라는 죄목으로 법정에 끌려나온 'GOD', 신은 인간의 말을 빌려 신과 인간세계를 말하고, 그 말들은 조목조목 쓰쓰이가 지난 50년 동안 계속 해온 기행적인(?) 소설 쓰기의 변명 또는 해명처럼 들린다. 그 중심에는 '다중우주'가 있다. 


말인즉슨,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 수많은 '가능세계'가 존재하고, 그 각각이 각각의 세계로 존재하며, 신은 이 세계의 근본 원리인 '모나드'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신은 모든 것들을 '사랑'함으로. 신은 쓰쓰이 야스타카의 현현이다. 쓰쓰이가 만든 확고한 세계, 참으로 다양한 그 확고한 세계. 그는 '다중우주' 또는 '다중세계'를 문학 세계 전체에 걸쳐 만들어냈지만, 작품마다 소재로 종종 써 왔다. 그는 '작품의 조물주가 신'이라는 명제를 가장 잘 구현해냈다. 


소설의 '읽는 재미'를 완벽하게 느낄 수 있는 소설


이 소설을 진정 '집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점에 있다. 작가가 신이라는 개체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문학 세계를 돌아보고 또 인간 세계를 다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굳이 '소설'이라는 장르를 빌리지 않고 훨씬 더 잘 표현해낼 수 있었겠지만, 그가 굳이 소설을 이용한 건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쓰쓰이 야스타카이기 때문이다. 


초를 치는 것 같지만 말해두지 않을 수 있다. 흥미를 끄는 초반의 사건, 그러곤 갑자기 신이 강림하는 그 연계점이 상당히 부실해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후반부에서 이를 신다운 명철함으로 훌륭히 봉합하지만, 그때까지 꺼림칙함을 벗어버릴 수 없을 거다. 이 또한 그의 대단함으로 치환할 수 있는 바, 이밖에도 여러 점들이 눈에 띄어 상당히 괴롭히지만 우리는 그가 가리키는 달을 보고 있지 달을 가리키는 손을 보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 알면서도 여유작작하게 그것을 해낼 수 있는 작가다. 


'이 소설을 보고 쓰쓰이의 전작들에 눈길이 갈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 없는데, 그리 가능성이 높진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이 소설 자체로만 본다면 말이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실망으로 다가올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물론 열광할 부분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우린 이 얇은 소설에서 천재적인 상상력이 선사하는 인류적 반전을 맛볼 수 있을 테고,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선사했던 따뜻함의 업그레이드 버젼을 받을 수 있을 테며, 일본 소설의 한 축을 단 번에 흡수하는 황홀감을 얻을 수 있을 테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무너져 가는 '소설'의 자존심인 '읽는 재미'를 완벽하게 느낄 수 있을 게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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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에 박힌듯 단조로운 세상살이, 극복할 수 있을까?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6. 10. 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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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표지 ⓒ책세상



어처구니 없는 일이 몇 번 있었다. 언젠가 동네를 한번 산책하고자 집을 나섰다. 생각해보니 30여 년을 산 동네를 제대로 돌아다본 적이 없었다. 동네 산책이니만큼 여기저기 구경도 하며 쉬엄 쉬엄 걸어보려 했다. 오래지 않아 당황과 황당이 한꺼번에 몰려 왔다. 여기가 어딘지, 우리 동네가 맞는지, 집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결국 산책의 묘미는 온데 간데 없고 2시간 만에 겨우겨우 집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매일 단조로운 패턴으로 다니다보니 겪게 된 황당한 일이었다. 


황당한 일은 또 있었다. 이건 내가 기본적으로 길치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길치 또한 과도한 단조로움으로부터 잉태된 기형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난 단조로움의 화신인 듯하다. 강남역 근처에서 일할 때였는데, 매달 한 번씩 퇴근 후 10분 거리에 있는 치과에 정기검진을 갔어야 했다. 그곳을 찾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대체로 바둑판처럼 생긴 강남역 거리니 만큼, 한 번 잘 숙지만 해놓으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난 갈 때마다 1시간 동안 찾지 못해 해맸다. 그곳이 그곳 같고, 그 거리가 그 거리 같았다. 단조로움의 공간인 강남을 단조로움의 화신이 이겨내지 못한 것일까. 


판에 박힌듯 메마르고 단조로운 세상살이


에드윈 애벗의 소설 <플랫랜드>에는 미치광이 정사각형이 나온다. 모든 것이 납작한 2차원의 세계인 플랫랜드를 떠나 여러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점, 선, 3차원, 이후의 고차원까지 경험하고서 플랫랜드로 돌아와 주민들에게 다른 차원의 존재 사실을 알리는 데 시간을 바친다. 에드윈 애벗이 활동할 당시인 빅토리아 시대의 판에 박힌듯 메마르고 단조로운 세상살이를 풍자한 것이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책세상)에서 저자는 현대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플랫랜드 주민들과 다름 없다고 설파한다. 오늘날 인간은 스스로 제한된 틀을 만들어 좁디좁은 곳에 스스로를 가두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결국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말 거라고 경고하면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닫히고 협소하고 감소되고 활기를 잃고 단조로운 존재가 되어 버린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넓은 안목으로 춤추듯 줄달음질치며 수많은 가능성으로 활기 넘치던 시야를 되찾을 수 있을까?


방법은 낯설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 수단은 문자와 이미지를 동등하게 활용한 '만화'이다. 특히 이미지로 낯설게 보기와 다르게 생각하기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 자신이 직접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책은 하버드대 최초로 철학 교재로 채택되었다고 하는데, 위에서 말한 '문자'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철학을 비롯한 인류의 모든 지식이라 할 만한 것들이고 이미지는 그 모든 것을 표현하고 그 자체가 지식 중의 하나가 되며 동시에 훌륭한 아트로의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이에게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지금도 알게 모르게 인간의 사유를 지배하는 개념이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로 옮겨가기 위해선 그야말로 철저한 전복과 반역과도 같은 혁명적 주장이 필요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위대함은 그래서 인류 역사상 그 무엇과도 비할 데 없는 것이다. 1500년 간 이어져 내려온 인류와 지구의 진리를 부정하고 올바른 곳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한낱 미물에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는 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이는 마치 플랫랜드의 미치광이 정사각형이 여러 차원의 세계를 여행하고 와서 주민들에게 다른 차원의 존재를 알리는 것과 다름 없다. 생각해보라. 당연히 '미치광이' 취급을 당할 게 아닌가. '이단아' 취급을 당할 게 아닌가. 곧 그 자신의 인생을 건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저자는 누구나에게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문한다. 보는 행위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하는 색다른 관점의 발견, 끊임없이 시야 너머의 존재를 추구하는 호기심,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을 재구성해 상식을 틀을 벗어나며 보다 높은 차원의 시각의 제공, 예술에 조예가 깊은 과학자들의 폭넓은 시야를 통한 새로운 발견, 너머의 공간을 유추할 수 있는 괌점의 무한한 가능성의 상상력 등이 혁명적 전환에 필요한 것들이겠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유의 전환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언플래트닝의 방법들, 새로운 경험과 상상력과 호기심


너무도 어려운 일일 거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는다. 방법론이야 이 책 하나에도 무수히 많이 존재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거야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그래서 저자는 일상에서 손쉽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실질적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이야말로 인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닐까. 탁상공론식의 사유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행할 수 있고, 결국 도움이 되는 것 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건 단순하다. 매번 다른 길로 출퇴근을 해보는 거다. 인식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거다. 시시각각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출퇴근길이 여행이 된다. 우스꽝스러운 걸음으로 걸어보는 시도만으로 그렇지 않다면 보지 못했을 다른 차원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도 있다. 오랜 시간 한 가지 일을 반복하다 보면 그 일에 능숙해지고 곧 습관이 되어 편하겠지만 '유연성'을 잃어갈 것이다. 위에 제시한 것들만 해도 우린 유연성을 유지할 수 있다. 


상상력과 호기심은 가장 강력한 '언플래트닝'의 방법들이다. 익숙한 두 공간을 낯선 방식으로 연결하는 사이의 공간이 바로 상상력이다. 우리는 주위에 있는 수많은 익숙한 것들을 거짓말 같은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이, 부엌 찬장에 있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새로운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호기심은 상상력과 같은 맥락이다.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호기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호기심이 없이는 상상력을 온전히 발휘하기 힘들다. 벽이나 부엌과 같이 평범하고 익숙한 것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끊임없이 너머의 무엇을 추구하려 해야 하는 것이다. 너머의 무엇을 보고 싶어 해야 하는 것이다. 이후에나 그 무엇이 구체성을 띤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어우러짐이 필요하다


이 모든 사유를 표현하는 주요 수단을 텍스트가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그래왔을 것이다. 이미지보다 텍스트가 가지는 힘이 훨씬 컸다. 저자는 그 '습관'에 대해 전복을 시도한다. 텍스트에만 의존하면 언어의 선형적 구조 바깥에 있는 것들은 무시된다고 본 것이다. 이미 그의 머릿속엔 텍스트와 이미지는 동등하다. 


시각적인 것은 문자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무엇을 놓쳐왔을까? 대상에 대한 사유뿐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보려고 할 때 무엇이 시각적으로 형성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이미지의 존재가 부각된다. 그렇지만 이미지만으로도 부족하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어우러짐이 필요하다. 그건 만화로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만화라는 순차적이고 동시적인 생태계에 삽입된 문자와 그림들은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공존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두 요소가 결합하면서 시각과 언어는 섞인다. 서로를 침투하고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서로 섞이면서도 다른 표현 방식 사이에 일어나는 굴절 현상은 공명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읽고 보는, 또 보고 읽는 역동적인 순환 과정을 만들어낸다. 텍스트와 그림은 동등한 파트너로서 상호 의존하는 불가분의 관계다." (본문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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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의 뒷걸음질에 제동을 걸다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6. 10. 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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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기괴한 판타지 동화', 팀 버튼만이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장르다. 이번 작품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조금씩 사그라드는 듯한 팀 버튼 시대가 다시 올 수 있을까?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천재 감독 '팀 버튼', 1982년에 데뷔해 어언 30년을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현역이고 인기 감독이다. 신이 내린 재능도 여전하다. 무엇보다 팀 버튼의 영화라는, <배트맨> 시리즈와 <가위손>으로 전 세계에 알린 그만의 명확한 스타일도 여전히 그의 영화들에 도장처럼 새겨져 있다. 기괴한 판타지 동화, 전 지구상에서 그만이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장르이다. 


그렇지만 종종 오명을 쓰기도 한다. 그런 장르밖에 소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의 필모를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비슷한 장르, 기과한 판타지로 구성되어 있는 건 사실이다. 그와 8작품을 함께 한 페르소나 조니 뎁이 비슷한 류의 캐릭터로 인기를 유지하려다가 폭망의 길에 발을 걸친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특히 그들은 2000년대 이후 5작품을 함께 했는데, 이는 팀 버튼 연출 작품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다 비슷한 느낌의 작품으로, 조니 뎁만이 소화할 수 있는 영화이자 캐릭터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고 흥행과 비평 면에서도 정점을 찍었지만, 조니 뎁이 먼저 가고(?) 팀 버튼이 뒤따라갈 폼을 잡고 있었다. 


팀 버튼의 뒷걸음질에 제동을 걸다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은 그런 팀 버튼의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여전히 그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지만 최근 몇 년간 내놓은 작품들에 날아갔던 화살을 환호로 돌려놨고 조니 뎁을 뒤따라갈 폼을 복구시켜놨다. '과도함'을 최대한 제쳐두고 대신 '상상력'을 넣었다. 상상력이 과도함을 불러일으키는 주범일 수 있지만, 의미 있는 메시지와 함께 한다면 끝모를 긍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시공간을 오가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과 함께 평범하지만 반드시 특별할 것이 분명한 제이크가 모험을 헤쳐나간다. 익숙한듯 익숙하지 않은 팀 버튼 특유의 스타일을 기대해본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이크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학생이다. 사실은 유약하지만 그게 특별한 건 아니기에 평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이상한 경험을 한다. 논이 뽑힌 할아버지가 죽어가면서 어딘가로 찾아가 누군가를 만나라고 하질 않나, 어릴 때 할아버지가 자주 들려주시던 이야기 속의 괴물을 직접 보질 않나. 결국 그는 정신감정을 받고 급기야는 아버지와 함께 그곳으로 떠난다. 할아버지가 해주곤 했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현실과 이야기의 구분을 확실히 짓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그곳에서 실제로 만난다. 할아버지 이야기 속의 그들을, 할아버지가 직접 체험했다는 그곳의 그들을, 1934년에 독일군의 폭격으로 죽었다는 그들을 말이다. 거기에는 미스 페레그린과 아이들이 있었다. 페레그린을 비롯한 그들은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 특별한 능력 때문에 그곳에 숨어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페레그린은 새로 변신하는 능력과 타임루프 능력으로 매번 폭격 바로 24시간 전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지켜냈다. 제이크는 시공간을 오가며 그들에게,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헤쳐나간다. 


영화 제목을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원작의 제목이겠다. 생각하기에 따라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원제의 'peculiar'는 '불쾌하거나 걱정스러울 정도로 이상한'이 주된 뜻이란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에게 붙이기엔 너무 가혹한 형용사가 아닌가 싶다. 혐오스럽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들을 '괴물'이라 표현해도 이상할 게 없겠다. 


그들은 대다수의 '정상'이 보기엔 분명 '이상'하다. 그렇지만 '다수'와 '소수'가 어울려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그저 '소수'에 속해 있는 부류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위험'할수야 있겠다. 그들 중 몇몇은 마음만 먹으면 특별한 능력이 없는 이들을 쉽게 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들을 내몰 이유가 되지 안된다는 건 따로 말할 가치도 없다. 사회의 시스템이 페레그린 한 명의 보살핌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특별함 또는 이상함과 평범함의 경계를 허물다


영화는 얼핏 <엑스맨>을 떠올리게 한다. 히어로물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표방하고 있기도 하다. 갖가지 능력을 갖춘 아이들이 적에 맞서 적재적소에 능력을 발휘하니까. 그러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갈 길을 개척해 나가니까. 여러모로 히어로물의 한 방면을 충실히 따랐다. 


그건 팀 버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슈퍼맨' 따위의 히어로와는 달리 요즘 히어로물의 히어로들은 엄청난 능력을 지닌 건 사실이지만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는 없다. 갖가지 능력을 가진 이들이 모여야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상한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이상한 것과 특별한 것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팀 버튼은 그들을 평범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특별함 또는 이상함과 평범함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려 한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팀 버튼은 그걸 극대화시켜 이들도 '평범'하다고 말한다. 이 특별한 이들을 평범한 이들로 '격하'시킨다. 이들도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일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상과 이상, 특별함과 평범함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이는 팀 버튼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일 테다. 그는 그동안 천재 감독으로 불리며 대다수 사람들이 보기에 굉장히 특이한 작업을 많이 해왔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특이하고 이상한 것들이었을까? 그 안에는 분명 팀 버튼이 전하고자 하는 '보편'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사람들은 보편은 그냥 지나치고 특이한 것에만 눈이 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다름 아닌 그 특이한 것들을 손가락질하곤 한다. 팀 버튼은 이 영화를 통해 특이한 사람의 대표(?)로서 그런 경계는 없다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범 보편의 영토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건?


보편과 특이의 경계를 없애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 그 경계를 없애고 '범 보편'의 영토를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건 무엇일까. 아무래도 보편에 해당하는 그 무엇일 테다. 팀 버튼은 '사랑'이라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힘든 보평타당한 인류의 핵심을 택했다. 사실 사랑은 팀 버튼 영화를 꿰뚫는 핵심이다. 


특별함과 평범함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자 팀 버튼이 택한 결정적 핵심은 단연 '사랑'이다. 사랑 말고 다른 게 없지 않을까?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고 평범하다고 알고 있는 제이크는 특별하고 이상한 아이들 중 또래의 한 아이를 좋아하게 된다. 다름 아닌 옛날 할아버지가 그곳에 있을 때 좋아했던 아이다. 결국 할아버지는 떠나가 그 아이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지만, 제이크는 어떨까? 사랑의 힘으로 이겨낼까?


사랑의 힘이 나이도 초월하고 국경도 초월하고 성별도 초월하고 심지어 '종'도 초월한다지만 시공간을 초월하는 건 말 그대로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걸고 행하는 모험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팀 버튼은 보편과 특이의 경계를 허무는 데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그와 같은 무모한 모험을 강행할까? 장담하기 힘들다. 자칫 '팀 버튼 류'의 과도함의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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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곤충들이 펼치는 <반지의 제왕>? 오히려 더 낫다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4. 6. 2.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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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프랑스산 애니메이션 <슈퍼미니>



<슈퍼미니> ⓒ판시네마



태어나자마자 가족을 잃고 혼자 남겨진 무당 벌레(이하 "무당이") 한 마리. 똥파리들의 도발과 위협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는 혼자 발을 딛게 된다. 하지만 다치게 되어 한쪽 큰 날개를 잃는다. 이후 우연히 흑개미 특공대가 옮기는 각설탕 박스에 탑승하게 된 그는, 도중에 흑개미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특유의 소리를 내어 도마뱀을 쫓아버린 것이다. 흑개미들은 그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동행한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애니메이션 <슈퍼미니>의 시작점이다. 무당 벌레와 흑개미가 본래 공생 관계라는 것을 의식한 구성인지 모르지만,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영화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합성해서 만들어졌다. 배경의 자연 환경은 실제 프랑스의 유명한 공원이라고 한다. 그 위에 곤충 캐릭터들이 날아다니고 걸어다니고 있으니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한다. 그들의 모험을 한 번 따라가 보자. 어떤 위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흑개미들이 먹이를 옮기는 데 불개미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흑개미 특공대가 먹이를 구해오기 위해 투입되었다면, 불개미는 그 먹이를 강탈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흑개미 대장이 각설탕 한 개로 불개미를 달래려 하지만 오히려 화를 돋울 뿐이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개미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험난한 절벽, 물살 센 냇물, 무시무시한 폭포, 강력한 물고기의 위협도 피해야만 했다. 온갖 어려움을 뚫고 흑개미 왕국에 도착한 일행. 무당이는 흑개미 특공대를 구한 덕분에 왕국에서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끝까지 쫓아온 불개미 특공대 대장. 그는 불개미 왕국으로 돌아가 불개미 여왕으로 하여금 전군 출동의 명령을 내리게 한다. 



<슈퍼미니>의 한 장면. ⓒ판시네마



이 영화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결합이라는 특수성에 더해, 내레이션과 대사, 자막이 전혀 없다는 특수성까지 지니고 있다.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조합이다. 제일 궁금한 건 역시 스토리 전개와 상황의 이해에 있다. 그런데 영화는 그것들을 음악과 캐릭터들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적절한 편집으로 충분히 해내고 있다. 


물론 조금의 상상력과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것들이 영화를 즐기는 데 많은 재미를 준다. 예를 들어, 무당 벌레의 도움에 흑개미가 고마움을 표시하고 동행하게 되는 과정, 흑개미 대장이 각설탕 한 개로 불개미 특공대를 달래려고 할 때 불개미들의 반응, 흑개미 여왕이 특공대가 가져온 각설탕을 맛보고 나오는 놀라운 반응 등. 그 표현력에 웃음과 감탄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음악 또한 영화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요소이다. 캐릭터들(무당 벌레, 똥파리, 흑개미, 불개미, 물고기, 도마뱀 등)에 따라 테마를 정해 그들의 성격과 성향을 보여주고, 상황에 따른 다양한 음악으로 그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 또한 상상력과 집중력이 요한다. 그리고 오히려 이것들이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슈퍼미니>의 한 장면. ⓒ판시네마



한편, 불개미 왕국의 전군 출동은 곧 흑개미 왕국에게 전해진다. 전투 태세를 갖추는 왕국. 그러나 엄청난 대군과 다양한 공성 무기를 장착한 불개미 군단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뿐이다. 이에 비책을 생각해내는 흑개미 대장. 왕국의 과학자에게 찾아가 성냥과 폭죽을 얻어 온 것이다. 폭죽을 통해 불개미 군단을 쫓아내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성냥은 고작 한 개. 엄청난 대군을 몰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순간 성냥을 봤던 기억(?)을 떠올리는 무당이. 그는 다친 날개임에도 불구하고 훨훨 날아서 성냥이 있던 곳으로 향한다. 그의 귀환 여부에 따라 흑개미 왕국은 생존과 괴멸을 선택 당하게 될 것이었다. 과연 그는 성냥을 구해와 위기에 빠진 흑개미 왕국을 구할 수 있을까? 


스토리의 일면을 따라가다 보면, 피터 잭슨 감독의 판타지 대작 <반지의 제왕>이 떠오른다. 원정을 떠나고, 공성전을 펼치며, 누군가의 도움으로 일거에 승리를 (비록 많은 아픔이 동반되지만) 거둔다는 내용 말이다. 그 안에 우정, 신뢰, 기다림, 그리움, 행복 등이 다양하게 점철되는 것까지도. 그 뿐만이 아니다. 하나하나의 장면을 따로 뽑아 살펴 보면, 이 안에서 다양한 영화들이 보이곤 하는 것이다. 



<슈퍼미니>의 한 장면. ⓒ판시네마



오히려 이 아기자기하고 귀엽지만 무시 못할 곤충들의 이야기가 더 알차고 재밌고 감동적이다. 그동안 많은 애니메이션을 봐왔지만, 그 중에서도 작고 귀여운 곤충들의 이야기도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깔끔하고 심플하면서 상당한 여운을 주는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얼마 전 보고 상당한 감흥을 받았던  <어네스트와 셀레스틴>과 더불어, 프랑스산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높여주는 데 일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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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 벌레, 반지의 제왕, 불개미, 상상력, 슈퍼미니,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자연, 집중력, 프랑스 애니메이션, 흑개미
  •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4.06.02 09:19 신고

    [어네스트와 셀레스틴]과 견줄만하다고 평가한다면 꼭 보고싶은데요ㅎㅎ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너무 흐믓하게 봤거든요

  • BlogIcon mindman
    2014.06.02 10:11 신고

    흐!~ 재밌겠음.
    예전 우리 아이들 어릴 때 무슨 개민가 하는 것, 아마 쟙스녀석이 세운 회사 작품이었던 것 같았는데,
    재밌게 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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