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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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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명의 피해자들이 운명의 피해지 갤버스턴으로... <갤버스턴> 2019.07.22
  • 80년대 미국의 문화사회적 현상, 머틀리 크루를 들여다보다 <더 더트> 2019.04.03
  • 최고의 짜임새 있는 각본을 자랑하는, 최악의 막장 코미디 <행오버> 2018.12.30
  •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아름다움 <에델과 어니스트> 2018.05.28
  • '우리'가 바꾼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1987> 2018.01.03
  •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선한 이웃의 악이다 <선한 이웃> 2017.07.10
  • 온갖 낯섦과 함께, 양극단에서 줄타기 하는 짜릿함을 만끽하다 <용의자의 야간열차>(2) 2016.05.06
  • 우리가 1990년대를 그리워하는 이유 <접속 1990>(9) 2015.06.19

운명의 피해자들이 운명의 피해지 갤버스턴으로... <갤버스턴>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 7. 22.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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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갤버스턴>


영화 <갤버스턴> 포스터. ⓒ ㈜삼백상회



세기말에 프랑스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하여 조연으로 차근차근 입지를 쌓고 주연으로 발돋움 후 미국 할리우드에 진출한 것도 모자라 메이저 영화 주연을 꿰찬 배우. 데뷔한 지 10여 년 후에는 감독으로도 데뷔하여 단편 필모를 쌓은 후 다큐멘터리와 장편까지 섭렵한 감독. 물론 각본도 직접 쓴다. 그런가 하면 가수로도 활동한 바 있다. 멜라니 로랑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그녀는 올해는 활동 소식이 없지만 작년까지 매해 숨막히는 활동을 해왔다. 그 최신작 중 하나가 우리를 찾아왔다. 유명 미드 <트루 디텍티브> 시리즈와 영화 <매그니피센트 7> 각본을 썼던 닉 피졸라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벤 포스터와 엘르 패닝이 함께 한 <갤버스턴>이다. 멜라니 로랑이 감독으로 참여했다. 잔잔하지도 파괴적이지도 않은 애매함과 잔잔하기도 하고 파괴적이기도 한 풍성함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영화라 할 수 있겠다. 하드보일드한 스타일에 감독의 의지가 엿보인다. 


'갤버스턴'이라는 지명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중남부 텍사스주에 있는 작은 도시다. 19세기 번창한 항구도시로 시작했지만, 20세기 초 최악의 허리케인이 강타해 재앙적 피해를 입혔다. 이후 잘 막아냈지만, 종종 크나큰 피해를 입혔다. 근처의 휴스턴이 급부상하면서 급격히 위축되었다. 여전히 중요한 곳이지만,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작은 휴양지 정도의 위상이다. 


청부살인업자와 매춘부의 도망 여행


청부살인업자와 매춘부의 도망 여행. 영화 <갤버스턴>의 한 장면. ⓒ ㈜삼백상회



대략의 내용과 분위기 모두 기시감이 들게 한다. 죽을 병에 걸린 청부살인업자 로이(벤 포스터 분), 알콜 중독에 니코틴 중독인 듯 보이는 그는 보스 스탠의 명령에 동료와 함께 누군가를 헤치러 어느 집에 잡입한다. 하지만 곧 역습 당해 동료를 잃고는 간신히 살아남아 빠져나온다. 어린 매춘부 록키(엘르 패닝 분)와 함께. 그들은 스탠의 함정에 빠진 걸 깨닫고 정처 없이 도망 여행을 떠난다. 


도중 록키는 자신의 집으로 가 여동생 티파니를 데려온다.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셋은 안전해 보이는 갤버스턴의 어느 모텔에 정착해 장기투숙한다. 로이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이곳까지 쫓아오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씩 마음을 논다. 셋은 아름다운 해변에서 편안한 시간도 가진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하는 듯하다. 사건이 엉뚱한 데서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스탠의 압박이 아니라, 록키와 티파니의 기막힌 사연과 그에 따른 비극이 부른 참사 때문이었다. 그들이 노출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니, 이미 노출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선택할 수 있는 패가 있긴 한 걸까. 거기에 '행복'이라는 패가 있을 리 만무하다. 


확실한 장점과 명백한 단점


확실한 장점과 명백한 단점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영화 <갤버스턴>의 한 장면. ⓒ ㈜삼백상회



영화 <갤버스턴>은 확실한 장점과 명백한 단점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보여진다. 배우 출신 멜라니 로랑 감독인 만큼, 캐릭터에 매우 천착했다. 벤 포스터와 엘르 패닝이라는 베테랑들이 그에 철저히 부합했다. 잔혹한 외면에 저항하고 버티기 위함인 듯한 쓸쓸한 내면을 탁월한 연기로 표현해냈다. 그러면서도 그 이름값에 맞게 튀지도 않고 작품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스토리와 사건이 그를 받쳐주지 못한 듯한 인상이다. 나이 든 순정한 마초킬러와 그를 따르는 모든 걸 잃은 어린 여자. 그들은 언제 파멸이 눈앞에 다가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함께 여정을 떠난다. 다시 없을 좋은 시간도 보낸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대한 비극이 찾아온다. 좋은 기억과 예쁜 장면만을 남긴 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프랑스의 <레옹>과 한국의 <아저씨>가 생각난다. 이밖에 수많은 킬러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이 스토리 라인이 변주되었다. <갤버스턴>도 그 변주의 하나일 뿐이다. 


다만, 이 영화는 주지했듯 '갤버스턴'이라는 지명이 주는 분위기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한 휴양 항구도시의 평화로운 외향을 띄고 있지만, 그 이면엔 살기 힘들게 하는 재앙적 재해의 빈번함과 한때 번창했다가 위축된 도시의 역사가 복잡다단하게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갤버스턴이라는 배경과 두 주요 캐릭터 간의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되진 못한 것 같다.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각각 꽤 괜찮은 미장셴을 선사하지만, 굳이 둘을 어울리게 하여 '그림이 되게끔' 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운명 앞에 가해자 아닌 피해자


운명 앞에 피해자들이 운명 앞에 피해지 갤버스턴으로... 영화 <갤버스턴>의 한 장면. ⓒ ㈜삼백상회



여기서 그래도 눈여겨봐야 할 건 사람의 힘으론, 개인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의 존재이다. 갤버스턴에 재앙적 허리케인이 계속해서 들이닥치는 것도, 갤버스턴보다 훨씬 더 큰 도시들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도 어찌할 수 없다. 로이가 보스의 추격을 따돌리기 힘든 것도, 록키가 매춘부로 살아가는 것도 어찌할 수 없다. 


물론 인간은 수많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어찌어찌 헤쳐 나가며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분명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세상을 이끌어가기에, 그들이 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앞에 주저앉는 건 그저 나약한 것일 테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는 결과론적으로 도출되는 것이고, 어찌할 수 없는 건 어찌할 수 없는 거다. 


<갤버스턴>은 그런 면에서 운명의 피해'자'들이 운명의 피해'지'로 대피하여 소중한 시간을 갖다가 다시 가해자들 앞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한 듯한 영화의 분위기는 거기서 기인한 게 아닐까. 신기하게 다 보고 나면 기분이 더러워지지 않는다. 뭔지 모를 여운이 남는다. 마지막의 슬프게 소소한 반전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건, 우리 모두 운명 앞에서 절대 가해자 아닌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 동질감이 그리 괜찮지 않은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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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버스턴, 도망, 매춘부, 멜라니 로랑, 사건, 운명, 지역, 청부살인업자, 캐릭터,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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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미국의 문화사회적 현상, 머틀리 크루를 들여다보다 <더 더트>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 4. 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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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더 더트>


영화 <더 더트> 포스터. ⓒ넷플릭스



2018년을 지칭할 때 '퀸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퀸, 그중에서도 프레디 머큐리를 집중 조명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음악 영화로서는 전 세계적 역대급 흥행 행진과 프레디 머큐리 머큐리로 분한 '무명 배우' 라미 말렉의 인생 역전급 기록적 남우주연상 싹쓸이가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1973년에 데뷔해 45주년을 맞이한 퀸, 영화계를 넘어 음악계, 나아가 문화계 전반을 지배하다시피 한 이유를 수많은 사람들이 분석했지만 '퀸'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맞을 듯하다. 그리고 그들의 화려한 무대를 현장감 있게 구현해낸 게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퀸 세대에게는 옛 생각을 되살리게 하였고, 퀸을 모르는 세대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주었다. 


물론 <보헤미안 랩소디> 이전에도 거장 뮤지션을 조명한 영화들은 많았다.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 나올 예정이다. 하지만 이후에 나올 영화들은 반드시라고 할 만큼 비교를 당할 터, 그럼에도 2019년 상반기에만 두 편의 뮤지션 전기 영화가 준비되어 있다. 3월에 머틀리 크루 <더 더트>, 5월에 엘튼 존 <로켓맨>이 그 영화들이다. 이 중 <더 더트>에 흥미가 간다. 그 주인공이 다름 아닌 머틀리 크루이기 때문에. 


80년대 미국의 문화사회적 현상, 머틀리 크루


영화 <더 더트>의 한 장면. ⓒ넷플릭스



머틀리 크루,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LA메탈(LA에서 시작했다고 하여)이라고 불리지만 미국 현지에서는 팝메탈이라고 부르는 헤비메탈 파생 장르의 대표주자이다. 1981년에 탄생해 8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가장 미국스럽고 또 미국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락밴드이다. 긴 머리, 짙은 화장, 섹슈얼한 차림 등의 락밴드를 상상하면 그게 바로 머틀리 크루라 하겠다. X JAPAN이나 초창기 본 조비와 결을 같이 한다. 


영화 <더 더트>는 머틀리 크루의 시작과 과정을 충실하게 따른다. 베이스의 니키 식스로부터 시작된 밴드는, 드럼의 토미 리가 먼저 접근해왔고 오디션으로 기타의 믹 막스를 영입했으며 토미 리의 고교시절 친구인 빈스 닐을 보컬로 들인다. 남다른 개성의 소유자들, 그들의 머틀리 크루는 역사상 다시 없을 최고의 인기를 끌었지만 그보다 더한 최악의 사고뭉치였다. 


제목 '더트(dirt)'는 당연히 '더티(dirty)'의 명사형으로, 온갖 더럽고 추잡하고 비열하고 불법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그에 걸맞게 영화는 머틀리 크루가 행하고, 머틀리 크루를 둘러싼 술, 여자, 마약, 사건과 사고를 온전히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다름 아닌 그것이 머틀리 크루를 설명하고 보여주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다. 그들은 그런 행동이 락스타로서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니키 식스 같은 이는 불우한 어린 시절이 일부의 이유가 될 수 있겠으며, 80년대 미국의 문화사회적 현상으로서 들여다본 바 상징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4명의 멤버들


영화는, <보헤미안 랩소디>가 프레디 머큐리를 중심에 뒀듯이 니키 식스를 중심에 두지만 4명의 멤버를 고루고루 분산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즉, 머틀리 크루에 주안점을 둔 것이겠다. 많은 락밴드들이 보컬 또는 리더에 관심이 쏠리는 반면, 머틀리 크루는 멤버 4명 모두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동질한 '또라이'였기 때문이겠다. 


니키 식스는 불우하기 짝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일찍 사회에 나와 이미 밴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욕망을 채워줄 멤버가 없었던 바 탈퇴하여 세상에 둘도 없는 새로운 밴드를 만들고자 한다. 그런 닉키 식스의 활약을 알고 있던 토미 리가 함께 한다. 곧 기타리스트 오디션을 보는데, '시끌 방자 과격 기타리스트' 믹 막스를 찾아낸다. 


남은 건 락밴드의 꽃인 보컬, 토미 리의 소개로 어느 파티를 찾은 셋은 커버 밴드의 보컬에서 활약 중인 꽃미남 빈스 닐에 꽃힌다. 조그마한 무대이지만 섹슈얼한 외모와 목소리로 수많은 여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모습과 더불어 딱 봐도 다시 없을 또라이 기질 다분한 모습이 그들이 추구하는 락밴드의 보컬 그 자체였다. 그들은 곧 머틀리 크루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곧 유수의 회사와 계약하는 등 과정은 순탄했다.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로 대표되는 암울한 억압과 자유박탈의 시대 80년대에 정확히 반하는 이미지로 절대적 무장을 하고 나선 그들의 인기와 명성은 빠르게 LA에서 미국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물론 그들은 그보다 더 한,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건과 사고를 몰고 다녔다. 


이보다 더 많은 욕과 술과 마약은 없다


당연히 '청불'인 이 영화, 이보다 더 많은 욕과 술과 마약을 보여준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머틀리 크루의 폭발적인 무대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오고 고로 훨씬 더 강력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그것들이 그들의 정체성이기도 한 바, 영화는 머틀리 크루의 전기 영화로서 굉장한 정확도와 함께 굉장한 재미를 선사하게 되는 것이다. 


보아 하니 '역시'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데, 감독이 다름 아닌 제프 트레마인이다. 희대의 미친 또라이들을 모아 찍은 지상 최대의 엽기 다큐멘터리 <잭애스> 시리즈의 감독 말이다. 그는 10년 넘게 이 시리즈를 끌고 오면서 7편이나 찍었는데, 'dirt'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영화들이겠다. 영화 <행오버> 시리즈와 결을 같이 하되 그보다 훨씬 강도가 쎄다고 하면 도움이 될지?


<더 더트>도 비슷하다고 하면 되겠는데, 놀랍기 그지 없는 건 그 모든 '짓'들이 실화라는 사실이다. 보는 내내 몇 번을 멈추고 다시 보고 또 생각해봐도 믿기 힘든 짓거리들을 그들은 행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밑바닥의 밑바닥의 밑바닥 막장까지 내려갔다 온다. 따로 드라마가 필요한가.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는 드라마로, 뭔지 모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내 평생을 가도 그들이 한 짓을 따라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아니, 머릿속 생각에서조차 그들이 한 짓을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들이 남긴 전설적인, 사실 추잡하고 더럽고 불법적인 '실화'들은 우리의 더러운 상상력을 대신해주는 훌륭하기 그지 없는 '신화'이다. 한편, 그들이야말로 그들이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주체인 우리 일반 대중의 광범위한 '현상'을 집결시켜 대신해준 착하기 그지 없는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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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미국, 더 더트, 또라이, 마약, 머틀리 크루, 밴드, 사건, 술, 여자, 욕, 팝메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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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짜임새 있는 각본을 자랑하는, 최악의 막장 코미디 <행오버>

오래된 리뷰 2018. 12. 3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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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행오버>


영화 <행오버>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결혼식 이틀 전, 더그는 친구 세 명과 함께 라스베이거스로 총각파티를 떠난다. 아내와 아이가 있는 가장에 학교 선생이지만 잘생기고 훤칠한 것도 모자라 바람둥이 끼가 다분한 듯한 필(브래들리 쿠퍼 분), 바람 핀 여자친구에 꽉 잡혀 동거 중인 겉으로는 무난한 치과의사 스투(에드 헬름스 분), 그리고 더그의 사돈이자 친구인데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느낌의 앨런(자흐 갈리피아나키스 분)이 그들이다. 


사치와 향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술 마시고 도박하고 얘기하며 신나게 놀고자 했던 그들, 하지만 결혼식 하루 전날 아침 호텔 숙소에서 깨어보니 난리도 아니다.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데, 화장실엔 호랑이가 있고 방에선 아기가 울고 있으며 더그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스투의 이빨 하나가 빠져 있는 건 난리 축에도 못 낀다. 


바로 내일이 더그의 결혼식이니 어떻게든 더그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기억이 나야 말이지... 그들은 그냥 두어야 하는 호랑이를 뒤로 하고 그냥 둘 수 없는 아기와 함께 실날 같은 단서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더그를 찾기 위해 지난 밤의 행적을 추적해나간다. 그러곤 이보다 더 할 수 없는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흔적들을 맞대면 한다. 단순히 술에 취해서라면 말도 안 되는 정도의 '기억 상실'을 겪는 그들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들은 더그를 찾을 수 있을까? 더그를 찾아서 내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있을 결혼식에 데려갈 수 있을까? 


엽기 막장 코미디의 새로운 역사


엽기 막장 코미디 최고의 수익을 올렸다. 영화 <행오버>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 <행오버>는 2009년 북미 여름 시즌 직전 개봉하여 소위 '대박'을 터뜨리며 역대 R등급 코미디 최고의 수익을 기록한 작품이다. 짧고 굵은 이 작품은 2년마다 한 편씩 2편과 3편까지 주연배우 그대로 나와 적어도 수익으로는 R등급 코미디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국내에 개봉되지 않았다. 영화 수입자들이 미국에서 보아도 정녕 더럽고 엽기적인 행각을 국내 정서상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하지만 정작 <행오버 2>는 개봉하고 다시 <행오버 3>는 개봉하지 않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아마도 국내에 개봉되지 않은 영화 중 <행오버>만큼 유명한 영화도 없을 테다. 


수익도 수익이지만, 영화에 나왔던 주조연 할 것 없이 거의 모두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활발히 활약 중인 점이 흥미롭다.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라는, 돌아보니 꿈의 캐스팅이었던 한국 영화 <넘버 3> 느낌과는 다르지만, 브래들리 쿠퍼가 이 영화로 말미암아 잘생기고 연기도 잘하는 할리우드 스타로 자리매김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는 단지 다시 없을 엽기 막장 코미디라는 이유로 과소평가 받고 있는 것 같다. 들여다보면 이만큼 출중하게 사건과 인물과 전개 3박자가 짜임새 있게 맞춰져, 라스베이거스라는 사치와 향락의 도시 그리고 결혼식 전 총각파티를 비판하기도 힘들다. 물론 본격적으로 돈맛을 보고 엽기 막장에만 초점을 맞춘 2편, 3편에는 해당하지 않는 얘기지만 말이다. 


훌륭한 캐릭터들의 훌륭한 사건 전개


외형은 지극히 코미디이지만, 훌륭한 캐릭터와 각본과 사건 전개를 자랑한다. 영화 <행오버>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사막으로 보이는 곳에서 필이 더그의 예비신부에게 더그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이후 일어날 일들을 내보임에 있어 자신감을 한껏 올린 시작이다. 더그를 찾을 건 분명하지만, '어떻게' 찾을지 바로 그 지점이 기대되는 것이다. 


총각파티를 가기까지 영화는 사건이나 전개를 위한 캐릭터 설명에 힘쓴다. 어느 모로 봐도 가장 멀쩡한 이는 결혼식 주인공인 더그, 나머지 셋은 위에서 주지했던 것처럼 좋게 말하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친구들이다. 뻔한 스테레오 타입이지만, 이후 사건과 전개를 위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수단적 캐릭터들이다. 즉, 부담 없이 녹아들기 쉬운 인물들이다. 


사실 사건이 별 게 아닐 수 있다. 이 동네에선 지구, 우주, 가상세계가 위험에 빠졌고, 저 동네에선 사람들 목숨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하지 않는가. <행오버>에서는 그저 결혼식 하루 전에 당사자가 사라졌을 뿐이다. 다만, 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뿐.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전개'에 있다. 사건의 전개와 캐릭터의 향연. 그리고 그 전개라는 게 전개라 할 수 없는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후개, 즉 추리에 가까워 은근슬쩍 재미가 있다. 마약을 탔을 게 예상되는 만술 때문에 숙취를 앓고 있는 세 친구가 하는 추리. 눈살을 찌푸리며 욕도 함께 나가지만 그보다 더한 박장대소가 수시로 터진다. 이미 영화는 할 일을 다한 것이다. 


라스베이거스 총각파티


이 영화의 엽기와 막장은 라스베이거스 총각파티를 직접 겨냥한 것이다. 영화 <행오버>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왜 이렇게 엽기적일까, 엽기적이어야만 하는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욕을 내뱉게 할 정도로 말이다. 단순히 생각 없이 웃게 하려고 했다면 다른 방법도 많을 텐데, 왜 하필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총각파티를 소재로 했을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총각파티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크리스마스보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더 기대하고 때론 더 챙기는 것처럼, 누군가는 결혼식보다 결혼식 전야 총각파티(또는 처녀파티-브라이덜 샤워)를 더 기대하고 더 챙길 것이다. 영미권의 필수 주요 행사 중 하나인 총각파티는 애초의 생각이 어쨌든 '난잡한' 성격을 띈 '난잡한' 파티가 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선 반드시라고 할 만큼 라스베이거스에서 행해지는데, 그곳은 술은 물론 도박, 마약, 스트리퍼가 항시적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보다 더 할 수 없는 엽기와 막장은, 곧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총각파티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과 다름 아니다. 작중 스투의 여자친구 말을 빌리자면, 추악하고 더러운 곳이자 행위인 것이다. 그런 곳과 행위가 만나 시너지를 일으키는 걸 당연히 받아들이는 문화는, 그저 결혼 전 마지막이라는 의미와 한때의 일탈이라는 이유로 무마될 수는 없다고 본다. 


감히 말하자면, '총각파티'라는 이름부터 바꾸고 '난잡함'이 기본 장착된 행각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인식이라도 바꿔야 한다. 결혼 직후의 피로연처럼 결혼 직전의 전야제도 필요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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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아름다움 <에델과 어니스트>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5. 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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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에델과 어니스트>


<에델과 어니스트> 포스터. ⓒ㈜영화사 진진



영화 한 편으로 한 방면이나마 역사를 훑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굉장히 거시적으로 접근하면서도 주요 사건들을 미시적으로 들여다보아야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포레스트 검프> <벤자민 버튼은 거꾸로 가지 않는다> <국제시장>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등이 생각난다. 


한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온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굉장히 평범하거나 굉장히 특출나다. 하지만 접근 방법은 같다. 이들 모두는 우리와 다름 없는 삶을 살았거나 우리와 함께 살았던 것이다. 우린 이 영화들을 사랑했고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대체로 동질감을 느꼈다. 


자전적 애니메이션 <에델과 어니스트>는 이 범주에 속하는 영화라 하겠다. 1920~60년대 영국의 지극히 평범한 한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영국의 20세기 초중반 40년을 훑는 작업 말이다. 우린 이 영화로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며 동시에 영국의 20세기 초중반을 지탱한 가치관을 들여다볼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는 영국의 세계적인 동화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다. 그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자신의 지극히 평범한 부모님 이야기를 옮겨놓았다. 때는 1928년 런던, 가정부 에델과 우유배달부 어니스트는 사랑에 빠져 짧은 연애 끝에 결혼한다. 에델은 가정부를 그만두고, 그들은 25년 대출상환으로 집을 장만한다.


결혼하고서 집안살림을 하나둘 장만하는 평범한 나날들, 하지만 결혼 2년이 지나서도 아이를 갖지 못하자 37살 많은 나이의 아내는 걱정이 태산이다. 그 사이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리고, 에델과 어니스트는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한편, 곧 임신을 하고는 남자 아이를 낳은 에델, 하지만 나이가 많아 더 이상의 아이를 가질 순 없다. 


아이는 자라고, TV가 시작되고, 히틀러가 전쟁태세에 돌입하고, 에델과 어니스트와 레이먼드 가족은 전쟁을 대비한다. 급기야 영국도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이는 대피령에 따라 안전한 시골로 가고 집에는 에델과 어니스트만 남아 그들만의 전쟁을 치른다. 섬나라 영국까지 침공한 나치독일의 공습에 이들은 무사할까? 레이먼드도 그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게 될까?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건들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의 큰 줄기는 주로 어니스트가 읽고 들어 에델에게 얘기해주는 신문과 라디오에 있다. 히틀러가 언제 집권해 언제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으며 언제 전쟁태세에 돌입했고 언제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을 취득했는지 언제 프라하에 했고 언제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는지 말이다. 


한편, 언제 TV가 시작되었고 1930년을 전후한 당시 영국의 빈곤선 상위층이려면 주당 얼마를 벌어야 하는지 언제 인류가 달에 갔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전쟁으로 물을 5인치밖에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 직후 노동당이 집권했으며 고속도로가 뚫렸고 어떤 당이 집권하든 식량 배급량은 계속 줄어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처럼 에델과 어니스트가 직접적으로 겪은 사건이 있는 반면 대다수가 이처럼 간접적으로 겪은 것들인데, 우리네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역사의 한복판에서 크고 작은 사건과 변화의 당사자로 살아가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건과 변화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남을 촛불 혁명을 직접 참여했던,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던 반면 계속 오르기만 하는 물가와 집값, 스마트폰의 보급 등은 물론 요동치는 세계 경제와 정치와 정세 등은 우리를 직간접적으로 스쳐지나갈 뿐이다. 그것들이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규정하진 못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규정하기에 결국 우리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사람 사는 아름다움


<에델과 어니스트>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는 일면 그런 생각을 체화시킨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같다. 신문이나 라디오, 그리고 TV를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하는 어니스트와 집안일에 몰두하며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하는 또는 둘 수 없는 에델의 모습이 구도화되어 영화 내내 비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상은 에델인가? 당장의 집안일과 당장의 남편 혹은 아들의 일을 챙기며 보수적일 수밖에 없게 된 에델을? 그건 아닌 듯하다. 어니스트를 통해서 세상일에 관심 없는 사람을 비판하는 반면, 에델을 통해서 당시 평배해 있는 남녀 차별 또는 남녀 구분의 당연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 흥행 3위를 기록하고 있는 <국제시장>도 평범한 한 부부의 일생을 돌아보며 한국현대사를 들여다보는 영화인데, 이런 비슷한 시선조차 담지 않고 하나같이 나라 발전에 일조한 이야기와 엄청난 일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신파 어린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오히려 이 같은 이야기가 훨씬 많은 사람의 공감을 샀겠지만 그 이상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거기엔 사람은 없고 사건만 있다. 


반면 <에델과 어니스트>는 단조롭기 짝이 없고 눈물 쏙 빼는 이야기를 선사하지도 않는다. 이보다 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름답다'고 서슴없이 말할 게 분명하다. 


거기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람 사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네'라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저 그렇게 살다간, 인류 역사를 이루는 99% 이상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에델과 어니스트는 그대로 김씨와 이씨도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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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꾼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1987>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1. 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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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987>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뜨거웠던 그때 1987년 상반기다. 지난 2017년 상반기도 그만큼 뜨거웠다. ⓒCJ엔터테인먼트



소름끼친다. 먹먹하다. 분노가 인다. 답답하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던 감정들이다. 이미 사건의 큰 얼개와 결과를 다 알고 있지만 이런 감정들이 들어와 마음을 헤집는 걸 막을 순 없었다. 2017년의 대미를 장식했던 장준환 감독의 <1987>에 대한 감상평 아닌 감정평이다. 


영화는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2013년을 전후로 본격적으로 우리를 찾아왔던 일명 '정치 영화'들과 맥을 함께 한다. 개중 상당수의 영화들이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하며 국민의 염원을 재확인하는 데 일조했다. <1987>은 그 정점에 서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1980년의 5.18만큼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는 거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들이 1987년에는 잇달아 터졌다. 


장준환 감독은 필모 통상 채 5편의 장편도 연출하지 않았다. 그중 대표작으로 2000년대 이후 최고의 안타까운 걸작 <지구를 지켜라>와 묵직한 수작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가 있다. 아무래도 <1987>이 장준환 감독의 새로운 대표작이, 아니 장준환 감독을 대표하는 작품이 될 게 확실해 보인다. 


평범한 우리에게로 이어지는 역사의 물줄기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는 건, 평범한 한명 한명이다. 즉, 우리들이다. ⓒCJ엔터테인먼트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조사를 받던 박종철군이 사망한다. 비상사태에 직면한 대공수사처, 책임자 박 처장(김윤석 분)은 시신을 화장시켜 증거를 인멸하려 한다. 하지만 박종철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최 부장검사(하정우 분)는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고 부검을 명한다. 그의 검사 인생이 끝날 줄 알면서도. 


경찰은 이에 언론에는 박종철군의 사망을 단순 쇼크사로 전하고, 내부에서도 무슨 수를 쓰든 단순 쇼크사로 만드려 한다. 하지만 부검 소견 결과가 가리키는 건 명백한 고문 치사 사망, 여기에 동아일보 윤 기자(이희준 분)가 끈질긴 취재 끝에 박종철 사망 당시 소생시키려 했던 당사자 의사와 최 부장검사를 만나 진실을 밝혀낸다. 박 처장은 결국 박종철 고문 팀의 조 반장(박희순 분)과 말단을 구속시켜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 


이 거대한 사건의 물줄기는 조 반장이 수감된 교도소로 나아간다. 평소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던 한 교도관(유해진 분)은 조 반장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고 갇혀 있던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 재야인사 이부영의 편지를 역시 재야인사이자 민주화운동 기획자 김정남에게 전하는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그도 검문에 자유롭지는 못했던 바, 조카 연희(김태리 분)에게 부탁한다. 


민주화 같은 건 전혀 관심 없는 대학생 연희는 아무 생각 없이 이 거대한 물줄기의 일원이 된다. 그녀의 생각이, 그녀의 변화가, 그녀의 앞날이 궁금하다. 그녀의 변화가 곧 평범한 우리의 변화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그것이 아닐까. 연희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영화 중심에 있는 사건, 그리고 연결고리 인물


영화는 중심에 '사건'을 두고, 그 사건의 다리 혹은 연결고리로 '인물'을 두었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투 트랙 전략으로 그때 그 시절의 진실을 전달한다. 영화의 중심에 사건이 있고, 사건을 연결하는 인물이 있다. 일반적인 영화 서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최소 한 명 이상의 영웅적, 또는 영웅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서사를 이끌어가는 핵심적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관객은 그 인물 또는 인물들을 따라가며 영화를 즐긴다. 


반면 <1987>은 1987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첨예한 사건들을 중심에 놓았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를리 없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사건을 중심에 놓으면 안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 쉬운 와중에, 흥행에 결정적 역할을 할 터인 인물들을 사건들의 연결다리로 배치했다. 


배우들의 희생 아닌 희생, 그리고 자연스레 이어지는 영화의 흥행적 희생, 이 영화는 일종의 의무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배우들이 연기한 이들은 진실에의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일신의 영달을 포기한 이름모를 이들이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들이다. 마치 그들의 이름이 불리는 것, 그들이 한 일이 조명되는 것이 이 영화의 사명인 것처럼. 


결국 영화는 그때 그 시절의 진실을 다시금 전달하며, 이름이 알려졌던 알려져 있지 않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소소한 역할을 했던 다양한 사람들을 재조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거기에는 비단 '착한 일'을 한 사람뿐만 아니라 '나쁜 일'을 한 사람도 포함된다. 픽션이든 팩트든 그 사람들의 속사정을 알게 된 것도 성과라면 성과일까. 


그때 그 시절의 힘


한 번 터진 희망의 물줄기는 것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기엔 희망만 있진 않았을 터, 영화는 희망만을 보여줄 뿐이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보는 내내 계속 생각난 영화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었지만 일명 '최루성 신파'로 호불호가 갈렸던 2007년작 <화려한 휴가>. 묵직하고 잔인하며 뜨겁고 가슴 저릿한 실화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영화의 씁쓸한 뒷맛. <1987>을 보면서 1980년도 제대로 재조명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최루성 신파와는 거리가 먼,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전반부와 그에 비해선 더 영화적이고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후반부로 구성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전말을 아주 소상히 전달하고자 하였고, 연희라는 영화에서 거의 유일한 가상의 인물을 1987년 당시 소시민의 상징으로 등장시켰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가슴 먹먹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영화의 힘은 그때 그 시절에 있지 않을까. 그때 그 시절을 그야말로 제대로 전달하고자 했던 영화에 있지 않을까. 30여 년이 지난 2016~2017년에 한국 현대사에 남을 큰 일을 함께 치뤄낸 우리이기에 그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1987>을 기점으로 최소한 당분간은 더 이상의 '정치 영화'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영화 내외적으로 성공적인 전달을 수행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영화는 희망만을 전해준 폐해를 남기기도 했다. 1987년 이후 정부는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것도 양김 분열로 인한 참담한 정치적 현실 하에서의 32년 만에 실시된 직접 선거로 인해 말이다. 


여기에 영화 <1987>이 전해준 희망이 끼어들 틈 따위는 없다. 그래서 영화는 한편으로 그때 그 시절, 아주 짧았던 희망의 시절만을 보여준 허무맹랑한 실화 기반 판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나온 이 시기가 다름 아닌 희망의 시절이길, 그 시절이 오래오래 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 영화의 역사적 성패는 이 시대의 성패와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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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민주화, 박종철, 사건, 이한열, 인물, 정치 영화, 한국 현대사,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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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선한 이웃의 악이다 <선한 이웃>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7. 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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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선한 이웃>


<선한 이웃> 표지 ⓒ은행나무



민주화 30주년의 2017년 6월,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이 시점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올해 6월 참으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민주화 영령들이 불려 나왔다. 그중엔 당연히 소설도 있는 바, 이정명 작가의 <선한 이웃>(은행나무)도 그중 하나다. 제목에서부터 풍기는 선과 악의 대립 또는 선과 악의 모호함 등의 소재, 이정명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픽션적 뒷이야기들. 


세종의 한글 창제 뒷이야기를 집현전 학자 연쇄살인 사건으로 풀어내고,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과 관계의 뒷이야기를 추리적 기법으로 풀어냈으며, 윤동주와 검열관 스기야마 도잔의 뒷이야기를 검열관 죽음과 미스터리로 풀어내는 등 이정명의 소설은 구미를 당기는 무엇이 있다. 나는 앞의 두 책 <뿌리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은 재밌게 읽었는데, 뒤의 책 <별을 스치는 바람>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주제인 '민주화 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 책 <선한 이웃>을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좋던 나쁘던 기존의 이정명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실존 인물을 참조했겠지만, 적어도 실존 인물이 나오진 않는다. 유명한 사건의 뒷이야기를 그만의 형식으로 풀어내고 핵심인물들에 천착하는 건 여전하지만, 조금 더 서사에 집중했다는 데서 사건과 인물에 집중했던 이전 작품보다 고전적이 된 것 같다. 고전적 의미로 더욱 소설가다워졌지만, 소설로서는 재미가 많이 반감되었다. 


정교한 시나리오가 몇 겹에 걸쳐 잘 짜인 소설


신출귀몰 용의주도 얼굴 없는 운동가 최민석을 잡기 위해 김기준 팀장을 위시한 정보요원팀이 출동한다. 지난 6개월 동안의 추적을 비웃듯 눈앞에서 놓치고, 관리관에 의해 김기준 팀은 해체되고 모두 좌천된다. 한편 극작가 이태주는 <줄리어스 시저>로 화려하게 데뷔하지만 마지막 공연에서 대사가 문제시 되어 정보당국에 잡혀간다. 그를 제외하고 모두 고문을 받고, 극단주와 주연배우는 구속된 반면 그는 풀려난다. 


변절자로 낙인 찍힌 이태주는 삼류 에로극 주연 여배우 김진아와 연인이 된 후 함께 <엘렉트라의 변명>을 힘들게 준비한다. 김진아는 알고 있다, 이태주가 이 연극으로 세상에 맞서려고 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를 진정 사랑하기에 망설임 없이 그를 도와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자 한다. 


좌천당하고서도 여전히 최민석에게 심히 집착하는 김기준, 관리관은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김기준은 여러 후보군을 추려 <엘렉트라의 변명> 연출자 이태주를 최민석으로 점찍고 공작에 들어간다. 그는 이태주가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완벽하고 정교한 시나리오를 작성하기 시작하는데... 


정교한 시나리오가 몇 겹에 걸쳐 등장인물들을 옭아매는지 모를 정도로 잘 짜인 소설 <선한 이웃>.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선과 악의 모호함이 소설의 절정에서 그 절정을 맞이한다. 거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건 없다. 앞으로 계속 생각하게 될, 생각해야 할 개념이 생겼을 뿐이다.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선한 이의 악


이전 작품보다 서사의 흐름과 상징의 모호함에서 오는 깨달음을 더 절실하게 전하며 새로움을 선사하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정명의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특출한 캐릭터성을 엿볼 수 있다. 김기준, 이태주, 김진아 그리고 관리관까지. 이들이 얽히고 설킨, 물리고 물린, 복잡다단한 관계와 자기 신념들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악한 이의 악이 아니라 선한 이웃의 악이다'를 대변한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거기엔 일면의 긍정적인 면은 없고 부정적인 면이 도사린다. 1980년대 서슬퍼런 독재 정권 시대, 어쩔 수 없이 악에 부역하며 그렇지만 자신은 악이 아니라는 신념을 가졌던 이들이 있다. 아주 많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본래 평범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평범하고 힘없는 이가 악을 행하면서 '나는 악이 아니다'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지옥이다. 


사실 이는 식상하기 그지 없는 개념이자 도식이다. 한나 아렌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아이히만의 '나는 맡겨진 일을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이라는 말을 빗대어 '악의 평범성' 개념을 만든지 오래다. 이후 수많은 콘텐츠에서 이 개념은 인용되고 변주된다. 이 책의 제목인 '선한 이웃'도 사실 '악의 평범성'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식상한 변주가 있다. 명백한 악을 행하고서도, 심지어 그것이 악인 줄 잘 알면서도, 그걸 행한 자신을 평범하다고 성실하다고 신념화 시킨다면 여지 없이 '악의 평범성' 개념을 꺼내들어 변주해야 한다. 물론 '잘' 해야 한다는 단서는 있다. 그런 면에서 <선한 이웃>은 어느 정도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쉽지 않은 소재와 주제를 풀어나가고자 정공법을 택했는데, 고대 그리스 배경을 위주로 한 연극의 내용을 대대적으로 가져와 비유와 상징으로 쓴 것이다. 연극도 연극이지만, 고대 그리스 배경이 주는 생소함과 내재되어 있는 수많은 인간 자체에 대한 비유와 상징들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잘 뒷받침해준다. 작가가 한탄하는 것처럼 30년이 지나도 달라진 것만 있지 변한 게 없는 한국 사회와는 달리, 이정명 작가는 달라지는 것 대신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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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사건, 선한 이웃, 소설, 악의 평범성, 이정명, 캐릭터, 한국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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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낯섦과 함께, 양극단에서 줄타기 하는 짜릿함을 만끽하다 <용의자의 야간열차>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6. 5. 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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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용의자의 야간열차>



<용의자의 야간열차> 표지 ⓒ문학동네


언젠가 새벽에 기차를 타게 된 적이 있다. 자정은 넘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대전 인근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였으니 한 새벽에 도착했었으리라. 몇 년이나 지난 그때의 길지 않은 야간 여정이 아직도 생각나는 이유는 분위기 때문이다. 객실을 통째로 빌린듯 듬성듬성 보이는 사람들, 어둠 뿐인 밖에는 종종 여린 빛만 보이고, 그렇게 언제고 그 시간 그 자리에 있고 싶었다. 


뇌리에 남아 있는 또 하나의 기차 여정은 중국에서 장장 10시간 동안 탔던 침대 기차 여정이다. 창춘에서 베이징까지 갈 때 이용했는데, 기본적으로 앉아 있는 대신 누워가는 거였다. 밖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수많은 사람들만 보였다. 언제고 내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하려나 하는 끝없는 기다림, 지루함과 몽롱함까지. 그 시간을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나에게 기차는 그렇게 양극단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설레지만 지루하고, 아련하지만 요란하고, 기대감에 충족되어 있다가도 어느새 몽롱해지고 마는 것이다. 이 모든 걸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평소에는 느껴보기 힘든 감정들의 나열. '낯섦'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온갖 낯섦과 함께 하는 기차 여정


기차 여정에는 낯선 감정들, 그리고 낯선 이들, 낯선 상황들 또한 함께 한다. 다른 이동 수단과 비교해 보면, '자동차 여정'이나 '비행기 여정'이라고 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기엔 낯섦이 없고 여정이나 여행도 없다. 목적지로의 이동이 있을 뿐이다. 반면 기차는 다르다. 여정이고 여행이다. <용의자의 야간열차>(문학동네)가 얼핏 난해하고 기기묘묘하며 서사적 구조가 약해보임에도, 매혹적으로 읽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여행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당신'이라고 지칭되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일본인 무용수의 야간 기차 여행을 담았다. 유럽, 러시아, 중국 각지를 다닌다.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가 터지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내려 생각지도 못한 음식을 먹기도 하며, 별의별 사람들을 만난다. 기차, 그것도 침대칸이 배정되는 야간열차를 탔기 때문에 겪게 되는 것들이 많다. 


"역 분위기가 문가 심상찮다. 플랫폼에 이상하게 사람이 적다. 게다가 역무원들이 왠지 소란스러운 게 무슨 비밀이라도 감추고 있는 것 같다. 역무원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뭣하니, 그저 묵묵히 관찰할 수밖에 없다. 역 전체가 가면을 들쓰고 있지만, 당신은 그것을 벗겨내지 못한다." (본문 9쪽 중에서)


이런 야간열차만의 특징은 제목에서의 '용의자'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평범하지 않은, 일상에서 조금은 거리가 멀다고 해야 할까. 용의자라는 단어에서 가장 크게 다가오는 건 '의심'인데, 주인공은 다양한 나라의 도시들을 통과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도 말이 통하지 않아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된다. 주인공에게 그들은 모두 용의자인 것이다. 반면 주인공이 용의자로 의심받을 때도 있다. 그야말로 용의자들의 야간열차가 아닌가. 그 안에서 나는 누구이고 우리는 누구인가. 


불안감과 설렘의 양극단에서 교묘히 줄타기 하다


주인공이 횡단하는 야간 기차 여정은 우리네 인생과 다를 게 없다. '인생은 여정과 같다'는 진부한 표현은 둘째치고라도, 의심하고 의심받으면서 불안에 떨어도 믿고 같이 갈 수밖에 없지 않냐 이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기차 여정을 '인생의 축소판'으로 볼 순 없을 것 같다. 주인공은 지극히 소극적이고 관찰자적이며, 그(그녀)가 관찰하는 인간들이 '인간군상'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하다기 보다 하나 같이 기기묘묘하다. 충분히 의심받을 만한 이들이다.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지만. 


소설은 난해만 면이 다분하다. 기존의 소설 문법으로 읽기가 쉽지 않고, 무엇보다 주인공을 1인칭인 '나' 또는 3인칭인 '그'가 아닌 2인칭 '당신'으로 지칭하는 게 적응하는 데 녹록치 않다. 그 이유가 마지막에 밝혀지지만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이 또한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낯섦'이라는 키워드로 읽히도록 작가가 의도한 것 같은데, 가히 천재적인 솜씨라고 하겠다. 제목, 문법, 서사, 배경, 인물 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으니 말이다. 완벽하게 기획된 범위 내에서 자유로운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잘 읽히는 건 기기묘묘한 사건 사고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기묘묘하면서도 한 번쯤은 겪어봤음직하고 기차를 타면 왠지 겪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것이 설렘으로 다가오는 에피소드가 있고 불안감으로 다가오는 에피소가 있었다. 작가가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교묘히 해서 책을 놓치 않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슬아슬함은 불편함과 불안감을 주기도 하지만, 설렘과 짜릿함을 주기도 한다. 하나라도 제대로 안겨 주기 힘든데, 동시에 상반된 두 가지를 주니 어지럽지만 황홀할 따름이다. 이제 보니 이 상반된 두 가지는 한 면만 따로 다니진 않는 모양이다. 항상 같이 다니며 같이 다가오나 보다. 동전이라고 해야 할까.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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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칭, 기차 여정, 낯섦, 불안감, 사건, 사고, 설렘, 용의자의 야간열차, 의심, 인생
  • BlogIcon T. Juli
    2016.05.06 20:52 신고

    스릴러, 추리 어우러지면 정말 재미있죠

    • BlogIcon singenv
      2016.05.07 16:28 신고

      그런 소설로 밤새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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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1990년대를 그리워하는 이유 <접속 1990>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5. 6. 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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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접속 1990>



<접속 1990> 표지 ⓒ한겨레출판



수많은 사건 사고와 더불어 IMF 때문에 최악의 시대 중 하나로 기억될 법했던 1990년대를 '추억의 시대'로 끄집어 낸 건 TV였다. 2012년 <응답하라 1997>은 IMF가 터진 1997을 겨냥한 듯이, 그때는 오로지 IMF만으로 기억되는 건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1990년대의 또 다른 한 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2013년 <응답하라 1994>가 방점을 찍고, 2015년 새해에 <무한도전-토토가 스페셜>이 정점을 찍는다. 


그리고는 그 전후로 수많은 1990년대 영화들이 재개봉을 하며 기대 이상의 흥행 몰이를 하기도 했다. 너무 많이 해서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간략히 나열하자면, 한·미·일을 대표하는 1990년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타이타닉>, <러브레터>. 어느 순간부터 1990년대는 팍팍한 현실에서 등을 돌려 돌아가고 싶은 시대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 <접속 1990>(한겨레출판)이라는 영화 <접속>을 연상시키는 제목에 '우리가 열광했던 것들'이라는 부제까지 달고 나온 책은, 이 분위기를 이어 가려는 기획에서 나왔을 거라 쉽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한 꼭지 정도를 보자는 거였다. 그렇게 본 꼭지가 '낙동강의 페놀은 이제 대학가로 흐르는가'라는 제목의 '두산 페놀 사태'를 다룬 꼭지였다. 충격이었다. 


정작 1990년대를 상징하는 건 'PC 통신'


그야말로 이 책의 이 꼭지 하나로 1990년대는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예전부터 어렴풋이 인지했던 '사건 사고'가 난무하고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변화'가 지배했던 그 시대를 몸소 느끼게 된 것이다. 30대 초반만 되어도 1990년대 당시를 오롯이 인지하지는 못할 게 분명하다. 당시를 오롯이 느끼고 인지하는 가장 적합한 위치는 대학생이 아닐까? 저자는 1990년대를 대학생으로, 군인으로, 신입사원으로 살아냈다고 한다. 거기에 PD였기에 느끼는 바가 남달랐을 거였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1990년대 하면 제일 생각나는 게 IMF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1990년대를 상징하는 건 다른 데 있다고 본다. 다름 아닌 PC 통신의 출현이다. 저자도 말했듯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제작팀이 제일 고민했던 것 중에 하나가 불과 20년도 되지 않은 당시를 재연하는 데 필요한 소품들을 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1990년대는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던 '변화의 시대'였고, 시작에 'PC 통신'이 있었다.


PC 통신이 변화를 주도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PC 통신으로 문화계가 바뀌었다는 사실. PC 통신에서 연재 형식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판타지 소설들이 책으로 출판되어 국내 문학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드래곤 라자>, <퇴마록> 등이 그것인데 이런 소설의 등장은 국내 문학계에서 1990년대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기이다. 이들은 훗날 게임, 영화 등에 까지 영향을 끼친다. 한편 PC 통신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있다. <접속>, <엽기적인 그녀> 등이 그것인데 특히 <접속>은 한국 로맨스 영화의 새로운 틀을 이룩해 냈다는 평을 받았다. 


온나라를 소용돌이치게 한 사건사고들


개인적인 생각으로 1990년대를 상징하는 또 하나는 무지막지한 사건·사고의 연속이다. 그 어느 시절이라고 사건·사고가 없었던 때가 있었던가. 하지만 유독 1990년대가 뇌리에 깊이 남아 있는 건, 그것들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고 그 상상을 초월한 사건·사고들이 연이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저자의 입을 빌려 그 연쇄적인 대형 사고 퍼레이드를 읊어본다. 


최초의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시작된 1993년 1월 청주에서 화재가 발생해 28명이 죽고 사상자가 76명에 달했다. 3월에는 구포역에서 무궁화호가 전복 되어 78명이 죽고 부상자는 198명에 이르렀다. 7월에는 목포공항에서 뜬 아시아나 항공기가 추락해 66명이 죽고 40명이 다쳤다. 10월에는 서해훼리호가 뒤집어져 292명이 죽고 70명만 구조되었다. 이 모든 사고가 1993년에 있었다. 


1994년 10월에는 그 유명한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32명이 죽었고 12월에는 아현동 가스 폭발 사고로 12명이 죽었다. 1995년에는? 한국 역사에 남을 초대형 사고가 있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501명이 죽었고 부상자만 937명이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사고 행렬이었다. 이런 사건·사고의 행렬은 이미 한국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로부터 2년 후에 한국 사회를 덮칠 IMF의 징조가 아니었을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떠나지 않는 망령이다. 


그럼에도 1990년대를 그리워하는 이유


이런 것들은 결코 '우리가 열광했던 것들'이 아니다. 삐삐, 휴대전화, 금 모으기 운동, 박세리와 박찬호, 김광석, 서태지와 아이들 등에 열광했을 지 몰라도, 이런 것들은 1990년대에서도 그리고 책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1990년대를 그리워할까. 단순히 언론의 힘인가? 드라마의 힘인가? 예능 프로그램의 힘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만큼 2010년대의 지금이 힘들다는 반증이다. 차라리 그때 그 시절에 힘들고 좌절하고 슬펐던 일들이 더 나아 보이는 것이다. 격동과 전환이 살아 숨 쉬는 그때가, 정체 되어 있고 숨 쉬지 않은 것 같은 지금보다 살기 좋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 왜 못 사냐고 책망하는 대신, 차라리 그때가 낫다고 현재를 체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안타깝다. 안쓰럽다. 그런 날을 그리워하고 있는 우리가. 미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현재는 생각조차 하기 싫고, 과거는 최악의 그때를 생각하고 있는 우리가. 책을 읽고 손을 놓으니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마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접속 1990 - 10점
김형민 지음/한겨레출판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1990년대, IMF, PC통신, 사건, 사고, 응답하라, 접속 1990, 토토가
  • BlogIcon 空空(공공)
    2015.06.19 09:27 신고

    1990년대면 제가 30대..
    그 시절이 제일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ㅎ

    • BlogIcon singenv
      2015.06.28 18:09 신고

      30대라서 좋았던 걸까요, 1990년대라서 좋았던 걸까요?^^

  • BlogIcon NGY
    2015.06.20 20:52 신고

    좋은내용이네요 요즘은 너무 바쁘게 살아가면서 너무 모든게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아요^^

    • BlogIcon singenv
      2015.06.28 18:09 신고

      앞으로 더 얼마나 빠르게 지날지, 궁금하면서도 한편 두려워요~

  • BlogIcon 여강여호
    2015.06.21 19:49 신고

    imf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시대로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시절,,,,imf는 취업이라는 전혀 생각치 않았던 고민을 안겨주었으니까요.

    • BlogIcon singenv
      2015.06.28 18:10 신고

      그야말로 대재앙이라고 해야 맞을까요? 저는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 BlogIcon 늙은도령
    2015.06.21 22:38 신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그것이 그리움을 넘어 그때가 좋아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세상이라면 참 암담합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것이 쉽지 않네요.

    • BlogIcon singenv
      2015.06.28 18:11 신고

      언제부터인가 전국민이 과거를 그렇게 보게 된 것 같아요. 그만큼 현재가 암울하다는 게 아닌가 싶어요.

  • ㅇㅇ
    2015.07.09 19:34

    제 10대가 온전히 녹아있는 90년대군요. 까놓고 말해 21세기에 들어섰음에도 거꾸로 가는 사회를 보면, 차라리 뭐라도 바꿔보려고 움직였던 그 시대가 나았다는 생각도요. 나라 경제는 성장하고 있다는데, 국민들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니,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의문이 들 수 밖에요. 뭔가 옴짝달싹 할 수 없을 만큼 꽁꽁 묶여있는 거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지금이 2015년인지, 1975년인지...-_-=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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