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작 열전/신작 영화

아슬아슬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천재의 영화 <시인의 사랑>

반응형



[리뷰] <시인의 사랑>


능력과 의욕 상실의 찌질한 시인이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을 해야만 하겠는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랑? ⓒCGV아트하우스



제주도 토박이 시인(양익준 분)은 등단만 했을 뿐 동인 합평회에서 심심찮게 까이는 수준의 재능을 지녔다. 겨우 방과후교실 선생님으로 활동하지만 아이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입장이다. 그야말로 시인으로서의 능력도 없고 가장으로서의 능력도 없다. 대신 가정을 이끌다시피하는 아내(전혜진 분)가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해서 늦은 나이가 걱정되어 병원에 갔는데, 아내의 노산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시인의 정자감소증이 문제가 된다. 급기야 남자로서의 능력도 없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능력과 의욕 상실의 시인은 어느 날 아내가 건네준 도넛을 먹고 눈이 번쩍 뜨인다. 환상적인 도넛 맛에 감동을 금치 못한 것, 매일 같이 동네에 새로 생긴 도넛 가게로 달려가 도넛을 무지막지하게 먹어댄다. 그 힘 덕분일까? 동인 합평회에서 소소한 합격점을 성취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도넛 가게 화장실에서 도넛 가게 알바생 소년(정가람 분)이 어느 소녀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시인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정녕 오랜만에 수음도 하고 정자수도 증가했단다. 뭔가를 느낀다. 사랑일까.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심상치 않다. 그 대상이 소녀인지 소년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소년인 것 같다. 어느 날 술취해 밖에서 잠을 청하는 소년에게 다가가고 함께 소년의 집으로 향한다. 하루종일 일만 하는 엄마 대신 다 죽어가는 아빠를 보살피는 소년, 점점 그에게 뭔지 모를 감정을 느껴가는 시인. 


시인의 사랑은 어떨까


시인의 사랑은 특별할까? 아니, 시인이라는 존재가 특별한가? ⓒCGV아트하우스



누구나 가슴 속에 시 한 편은 품고 살고, 누구나 시인을 동경해 마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금지된 사랑에의 욕망을 품고 살 테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평범 이하의 시인의 삶을 통해 이런저런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드러내 오히려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시인의 사랑은 어떨까. 아니, 이전에 시인이란 누구이며 무엇일까. 시인이 아니라서 재단할 수 없지만, 누구나 시인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인이라고 다를 바 없으며 누구나 시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시인은 특별할 것이다. 즉, 시인도 다양한 사람들 중 하나이겠다. 시인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시인에겐 관찰력, 상상력, 집중력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사랑 양태는 셋 다 충족해야 한다. 대상에 대한 관찰력, 대상으로부터 날갯짓하는 상상력, 대상을 향한 집중력까지. 그렇다면 소년에의 시인의 사랑은 특별할 게 없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화가 훌륭히 소화해내는 것들


영화는 복잡한 내러티브와 아슬아슬한 경계의 감정선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지키며 잘 소화해낸다. ⓒCGV아트하우스



자연스러운 '시인의 사랑'을 시인만의 특별함에 가둬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벽은 높다. 시인에겐 찌질하게 그지없는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해주고 시인이 도저히 이끌 수 없는 가정을 대신 이끄는 아내가 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임신한 아내 아닌가. 그녀를 뒤로 하고 소년에게 마음이 가는 건 시인만의 사랑으로서도 용납하기 힘들다.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영화는 벌써부터 복잡한 내러티브를 선사한다. 시인의 사랑과 시인만의 사랑의 층위 위에, 그 자체로 이상할 게 없는 정상적인 사랑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랑의 층위가 겹친다. 동성애 코드는 덤에 불과할 정도다. 영화는 시인에서 시인과 아내, 시인과 소년으로 집중하는 시선을 옮겨가며 복잡한 내러티브를 나름 훌륭히 소화한다. 


무엇보다 훌륭히 소화하고 또한 훌륭한 점은,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도 선을 넘지 않고 나아가는 감정선에 있다. 시인과 소년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인지, 연민하고 이용해먹는 것인지, 그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가고자 또는 조금은 타파해보고자 잠시잠깐 다녀오는 수준의 대상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영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 


천재가 만든 영화


한끗 차이로 졸작이 아닌 수작으로 '판명'난 <시인의 사랑>, 여러 면에서 가히 천재의 영화라 할 수 있다. ⓒCGV아트하우스



시인의 여성성이라기 보다 여성적인 시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시인, 다분히 남성적인 역할을 하는 아내와 다르게 성격이든 신체든 섬세하고 소극적이다. 하지만 그는 남자이기에 한없이 찌질하고 능력없는 이로 보인다. 그런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소년에게는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게 있다. 남성의 발로일까, 여성만이 할 수 있는 행보일까. 여기에서도 복잡한 내러티브와 아슬아슬한 경계가 엿보인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또한 수작과 졸작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여러 코드와 층위를 나열할 뿐 정리하고 해결하지 못해 쓸데없는 상상력만 소진하게 할 뿐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반면, 산발한 코드와 층위 사이를 때론 발 빠르게 때론 정면으로 우직하게 지나가며 그것들을 이용해 상상력에 살을 붙여 평범함 위에 특별함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졸작보단 수작에 가까운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최소한 동성애 코드 위에 우리가 생각하는 '시인'의 사랑이 아닌 '여성적인' 시인의 층위를 입힌 건 아주 참신했다. 거기에 배우들의 열연으로 빚어낸 코믹과 진지함의 병렬과 긴장감 어린 경계에서의 나아감은 최고의 감각을 선물한다. 얼핏 허술한듯 보이는 전체적 이미지 이면엔 그 어느 영화보다 촘촘하고 꼼꼼하게 직조된 경계들의 조합이 보인다. 천재의 영화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