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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도망치고 싶은 오늘을 왜 잡으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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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오늘을 잡아라>나른한 주말 오후 서울 외곽에라도 나가 시원하게 펼쳐진 호밀밭으로 간다. 눈이 행복하고 코가 행복하고 귀가 행복하다. 자연스레 두 팔이 펼쳐진다. 너무나도 행복한 지금이다. 그리고 행복에 겨운 입에서 자연스레 말이 나온다. "카르페 디엠".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 지금 이 순간 을 즐기고 싶다. 너무 행복에 겨워 눈물이라도 날 판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 소년들이여. 삶을 비상하게 만들어라'는 말이 나온다. 존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이 학생들에게 외친 말이다. 키팅은 학생들이 불안한 미래(대학입시와 직장선택, 직장생활, 결혼생활, 노후 등) 때문에 현실(학창시절)을 즐기지 못하는 것을 보고 현실을 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를 학교의 전통과 규율에 도전하고 투쟁하는 젊은이의 정신으로도 해석하여, 자신들이 정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기에 이른다. 위의 대사는 2005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미국 영화 역사에서의 100대 명대사 기록에서 95번째 항목으로 선정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카르페 디엠'은 사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구절은 영어로 번역된 구절인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호라티우스는 미래를 걱정하는 여인에게 시간이 얼마나 덧없는지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을 맺는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현재를 즐겨라. 미래에 최소한의 기대만 걸면서)

이처럼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리고 실용적이고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 과거에 대한 후회 또는 그리움, 미래에 대한 걱정 또는 기대가 현재를 사려는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시종일관 괴롭힌다. 

실패로 점철된 현재를 잡으라고?

<오늘을 잡아라> 표지 ⓒ 민음사

노벨 문학상 수상자 솔 벨로의 1956년 작 <오늘을 잡아라 Seize the day>(민음사)는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테마를 가져온 듯하다. 

제목만 보고 바로 구매를 하게 되었다. 어떤 주옥같은 잠언들이 나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줄지 기대하면서. 소설로 '힐링'을 받고 싶었나 보다. 과거와 미래의 내가 보내오는 수많은 부정적 메시지들이 나를 너무 피곤하게 했던 것이다. 

내용은 너무 심플했고, 기대했던 잠언은 매우 짤막했다. 결정적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 현재에 대한 좌절로 완전한 실패를 맛본 주인공은 시종일관 실패자이다. 또한 그에게 사기를 치는 정신과 의사가 그를 달래기 위해 충고하는 사상이 '바로 지금' 철학이다. 

"사람들을 '바로 지금'으로 데려와야 해. 현실 세계로. 현재 이 순간으로 말이야.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지.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거야. '바로 지금'. 오늘을 잡아야 해."(본문 중에서)

심플한 내용은 실패로 가득 차 있고, 짤막한 잠언조차 사기꾼의 철학에서 나온 말들이다. 소설이 끝나기 직전까지 이런 실패와 사기로 점철된 '카르페 디엠' 철학은 계속된다. 곤란하고 막막하다. 희망 없는 현재를 잡으라고 하니 참으로 어이없다. 그래도 끝까지 보고 긍정적으로 해석해본다.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실패자 인생

주인공 '토미 윌헬름'은 직업을 잃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으며, 주지했듯이 과거의 실패만을 곱씹으며 후회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에 대부분에 시간을 할애하며 현실의 지독한 가난과 절망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호텔을 전전하고 있다. 

나름 부자 아버지를 두었고, 잘 생긴 외모를 가진 그는 자신만이 인지하고 있는 인생의 완전한 실패자이다. 스스로 알고 있듯이 더 이상 손써볼 수 없을 지경이다. 그는 같은 호텔에 기거 중인 아버지를 찾아가 금전적·정신적 도움을 요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쌓아온 업보인가 보다. 의사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바람을 어겼던 것이다. 

어린 시절 대학교를 중퇴하고 영화배우가 되려했던 때를 떠올리기도 한다. 잘 생긴 얼굴과 어느 정도의 연기 실력과 끼를 믿고 덤벼들었다가 호되게 깨진 바 있다. 인생의 전환점이자 그의 실패 인생의 화려한 시작을 알린 사건이다.

그는 아내한테도 버림을 받았다. 다름 아닌 바람을 핀 것 때문에.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사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짓이다. 그의 실패 인생에 제일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는 회사에서도 잘렸다. 화려한 임원으로의 길을 앞에 두고 밀려났다. 사장의 친척이 그 자리에 올랐다. 매우 운이 나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그 앞에 탬킨 박사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 자신에게 전 재산을 맡기라며 투자를 중용한다. 토미는 사기라는 걸 알면서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기꾼 탬킨 박사는 투자받은 돈을 들어 도망가 버리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토미는 방황한다. 

인류 전체를 대변하는 문학의 힘

토미의 모습은 나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어느 누구든 그의 생각과 그의 인생을 공유할 수 있다. 5년 전쯤인가. 외국에서 잠시 머물렀을 때, 우울증 비슷한 걸 겪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원인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이었다. 외국 생활이라는 인생에 다시 없을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과거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때는 과거에 살았다. 오늘을 잡을 생각 따윈 생각조차 못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금 현재를 찾았다. 더 이상 과거를 후회하지도 회상하지도 않았고 과거로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미래가 괴롭혔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다보니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그리고 기대가 나를 가득 채웠다. 지금, 그 상태이다. 

더 무서운 건 가끔씩 엄습하는 좌절의 현실이다. 무한 경쟁 시대이기 때문이겠지만, 자꾸만 남과 비교하며 자격지심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것이다. 오늘을 잡으려 하지만, 실패로 점철된 오늘을 잡고 싶지는 않다. 

토미는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소설이 끝나갈 때까지 나는 그의 기막힌 인생 스토리와 실패자로 지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걸 위로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다. 어느 누가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 힐링 따위는 집어 치우고서라도. 힐링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공감이다. 

공감은 주인공 토미에게만 통용되지 않는다. 다른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에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이 있다. 내가 토미의 아버지였더라도 토미가 못마땅하고 못미더웠을 것이고, 내가 토미의 아내였더라도 그를 절대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탬킨 박사였더라도 토미를 등쳐 먹으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걸 실행에 옮기는 건 미지수일지라도. 

소설은 마지막에 와서야 희망을 말한다. 토미는 탬킨 박사를 찾으러 밖을 횡행하게 되는 데, 장례 행렬에 휩쓸려 장례식을 목도하게 된다. 그때 토미는 죽은 자의 모습을 보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후회할 과거도 걱정할 미래도 좌절할 현재도 없는 죽은 자에게서 위로를 받았던 것일까. 위로와 공감은 올림이 아니라 내림인 것 같다. 자식의 올림사랑은 불가능할지라도 부모님의 내리사랑은 당연한 것처럼.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는 윌헬름의 눈에는 꽃과 불빛이 황홀하게 뒤섞였다. 파도 소리 같은 무거운 음악이 귓가에 들려왔다. 눈물이 가져다주는 위대하고 행복한 망각으로 인해 군중들 한가운데에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있던 그에게 음악 소리가 밀려왔다. 그는 그 음악을 듣고, 흐느낌과 울음에서 헤쳐 나와 그의 가슴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극치를 향하여, 슬픔보다도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어 갔다."(분문 중에서)

문득 생각나는 한 장면이 있다. 만화 <슬램덩크>의 한 장면이다. 한때 잘 나갔던 정대만이 부상으로 농구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삐뚤어져만 가고 있을 때, 옛날의 은사이자 존경하는 안한수 감독이 모습을 드러낸다. 토미처럼 실패자의 인생을 살고 있을 때 나타난 과거의 은사가 나타난 것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로 인한 폭력은 곧 과거에 대한 속죄의 눈물로 바뀌고 그는 그의 가슴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극치를 향하였다.

토미가 흘리는 눈물은 무엇일까. 과거에 대한 속죄일까. 그의 가슴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극치는 무엇이고, 슬픔보다도 더 깊은 심연은 어디일까. 일말의 희망일까. 무엇일지 모르지만, 그에게 최소한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를 바란다.


"오마이뉴스" 2013.5.14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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