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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나약한 인간이 세상과 싸우는 법은 자기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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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대학교 1학년 시절은 그리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쉽사리 적응할 수가 없었다. 온갖 열등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내성적인 성격과 변하지 않는 외모, 너무나 말랐던 몸 등. 결정적이었던 건, '나는 얘들과 달라.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라는 의식이었다(고백하건대, 모의고사 점수보다 수능점수가 상당히 많이 떨어져 원하지 않은 대학교를 갔다. 당시에는 많이 후회를 했고 오랜 시간 콤플렉스로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이겨냈다). 절대적 열등감과 상대적 우월감이 아주 교묘하게 자리 잡아 나를 괴롭혔었다. 

그렇다고 인간을 멀리하거나 왕따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종종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가식과 불신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진정한 친구 운운하며 테두리 안에 있으려고 하는 모습들이. 

나는 그 테두리를 벗어나기에는 너무도 나약했기에, 아웃사이더를 부러워하면서도 행동을 해야 했다. 그 행동이 제대로 된 행동이 아니었기에, 이도저도 아닌 최악의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엄밀히 말해 물리적인 소외를 맛보진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언제나 소외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어떤지 몰라도 소외되어 있다고 느꼈다.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무엇을 했어도 당시의 나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도. 일본 전후(戰後)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다시 읽으며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났다. 

다자이 오사무의 불운한 삶

<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하기 불과 3개월부터 2개월 동안 연재된 소설로, 그의 죽음 이후 1개월만인 1948년 7월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즉, <인간실격>은 그의 마지막 소설이다. 소설을 말하기에 앞서 다자이 오사무를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자이 오사무는 명망있는 집안의 아들(11남매 중 10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늘 바빴고 어머니는 유약해, 유모의 손에 키워졌다. 중학교 때까지는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수재였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좌익운동에도 참여했고 자살까지 시도하였다. 졸업할 때쯤에는 성적이 수직 낙하해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했고, 친가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방탕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그에 대한 자기혐오는 깊어져만 갔다. 

이를 이겨 내보려고 더욱 문학에 매진했고, 마르크시즘에 심취하기도 했으며, 여성편력이 심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영향력이 커지는 그의 문학세계와는 달리 그는 불운한 또는 불운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 그는 39년의 짧은 생애를 보내면서 총 5번의 자살시도를 했고, 결국 5번째 만에 성공(?)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심히 유약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으로 훌륭히 승화시킨 걸 보면 그는 영락없는 예술가였다. 

'인간실격자' 다자이 오사무를 연상시키는 주인공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표지 ⓒ 민음사



공교롭게도 <인간실격>이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 직전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라, 자전적인 면이 상당히 많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인간실격>의 주인공과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 사상이 매우 흡사하다. 소설은 주인공의 수기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마치 다자이 오사무의 수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요조는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었고,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그 외로움과 소외감, 불안감 등은 요조의 삶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이 뿌리 깊게 형성된 것이다. 

그럼에도 요조는 인간을 놓칠 수 없었고 '익살'을 통해 웃음을 유발해 인간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킬까봐 전전긍긍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며 술과 마약, 비합법 운동(좌익 운동)으로 도피하게 되고, 복잡한 여성관계를 반복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또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중 자신을 진정 믿고 사랑해주는 여자 '요시코'를 만나게 된다. 그녀 덕분에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 그리고 외로움과 소외감 등이 치유됨을 느낀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세상의 위선과 가식에 극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껴 힘들어 할 때, 그의 죽은 여동생과 살아있는 여동생이 유일한 안식처라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홀든 콜필드는 비오는 날 여동생이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 세상은 살 만 하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는 치유는 안 됐을망정, 최소한 살아갈 힘은 얻었다. 

반면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요시코'가 어떤 놈에게 겁탈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마지막이자 유일한 희망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치유는커녕, 기존의 깊은 상처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견딜 수 없었던 요조는 자살을 기도했으나 살아남았고, '인간실격자'가 되었다. 마지막엔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거악(巨惡)의 시대를 맞대면하다

이 소설은 전후 일본에서 젊은이들에게 신앙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젊은 시절 반드시 읽는 소설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불안, 혼란과 퇴폐, 비(非)윤리를 맞대면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한 단계 성숙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좋은 콘텐츠였다. 이 점이 그를 기성의 윤리와 도덕, 문학관에 반발한 작가를 뜻하는 '무뢰파(無賴波)' 작가로 칭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자기혐오는 일본에 대한 혐오, 나아가 인간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반면 전쟁이 끝난 시기는 아니지만 국가의 큰 위기가 10년을 주기로 연거푸 일어난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의 자기혐오는 말 그대로 자신을 향한 혐오에서 그친다. 종종 국가와 시대를 향해 자기혐오의 외연화를 행하려 하지만, 결론은 경쟁 사회에서 이기지 못한 자기 탓이다. 

물론 막무가내로 자기혐오의 외연화를 행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공허한 메아리로 끝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기혐오의 침참은 더욱 가속화되어 이 사회는 더욱 빨리 끝장나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자기혐오의 외연화가 자칫 자신의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려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불안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불안, 혼란과 퇴폐, 비(非)윤리는 도외시한 채 자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갔다가 너무 힘들거나, 어딘가에 부딪혔거나, 무서운 놈들을 만나 다시 애벌레가 되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서 자기혐오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 또한 그렇게 죽어갔다. 그의 본심은 알 수 없지만, 그의 삶과 시대적 맥락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자기혐오는 그 자신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거악(巨惡)의 시대와 맞대면한 결과인 것이다. 다만 그는 나약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강했기에, 자신이 나약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최대한의 저항인 자기파괴를 이용해 부딪치고 부딪히고 또 부딪혔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기파괴는 시대에 대항해 그가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지금은 수많은 대항무기들이 있다. 하지만 거대한 조직 뒤에 숨어서, 자신의 존재를 숨겨주는 익명의 숲에 숨어서 '대항하는 척' 하거나, 타인을 일방적으로 비난하여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짓은 안 하느니 못하다.

그렇다고 '젊음'이란 것이 '저항'과 같은 말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저항해야 한다고 느꼈을 때 저항은 못할망정 최소한 피하지는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알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맞대면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소름끼치게 힘든 일이다.



"오마이뉴스" 2013.6.3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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