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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이 두려워 사라지길 결심한 남자의 이야기 <오피스 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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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오피스 닌자>


<오피스 닌자> 표지 ⓒ현대문학



회사 중간 관리자 한 명이 사라졌다. 그런데 아무도 모른다. 관심도 없다. 어딘가에서 주어진 업무를 하고 있을 테고,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몸이 아파 며칠 쉬고 있을지도 모르고. 솔직히 말해서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난 내 일만 하면 되는 거다. 


옌스 얀센은 스웨덴의 중견 헬멧 수출 기업 '헬멧 테크'에서 9년 동안 일해온 브랜드 매니저다. 중간 관리자급이다. 그는 30대 중반으로 지극히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12년 동안 사귀어온 여자 친구와는 얼마전 헤어졌다. 그가 요즘 가장 두려워 하는 게 무엇일까? 승진이다. 


승진이 두려워 사라지길 결심하다


<오피스 닌자>(현대문학)는 승진이 두려워 사라지는 걸 택한 옌스 얀센의 처절한 이야기다. 승진이 두려워 사라진다는 게 말이 되나 싶을 거다. 그의 생각을 들어보자. 그는 더 이상 경쟁력 있는 승리자, 타인을 밀어젖히는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온갖 구조 개편을 극복했다. 기대를 충족시키긴 하지만 꼭 높은 직책을 맡겨야 할 정도는 아닌 사람으로, 팀장 정도면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끔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더 버틸 요량이 없는 것이다. 꼼짝 없이 권력과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그런 건 죽기보다 싫다. 그래서 선택했다. 죽고 싶진 않으니 사라지는 걸로. 어떻게?


비단 옌스 얀센 뿐이랴? 사라지고 싶은 사람이 한둘은 아닐 거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 아무리 사라지고 싶어 사라진다고 해도 그게 어디 사라지는 것일까. 모든 곳에 CCTV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진데,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하나 찾는 건 일도 아닐 거다. 어떻게 사라져야 할까? 영화 <김씨 표류기>처럼 도시 한복판 어딘가에 있을 무인도를 찾아가야 할까. 옌스 얀센이 생각해낸 건 다름 아닌 회사 안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발상이 재미있고 과정은 조마조마하며 실행은 탁월하다. 취직 걱정에 밤잠 못 이루는 수많은 청년들에게는 전혀 먹혀들 것 같지 않지만, 회사에서 밤낮 없이 착취당하는 수많은 청년들에게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설정이다. 물론 지켜야 할 게 아무 것도 없는 회사원들에게만. 옌스 얀센에게는 부모님도 아내도 자식도 없다. 


소설은 부조리한 회사 생활과 사라지는 발상과 과정, 그리고 처절한 생활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딜레마적인 상황을 생략한 것 같다. 개인 문제로 수렴하기 보다 전체를 대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딜레마와 그에 따른 고민은 없고, 대신 혁명적 생각과 방향 그리고 실행이 있을 뿐이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지는 미지수다. 


재미있는 발상, 그러나 공감은?


소설의 재미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재미를 느낄 만한 요소가 많다. 소설  내용적으로는 회사가 돌아가는 사정, 회사에 있는 직원들 군상 등의 풍자를 볼 수 있고, 소설 외적으로는 짧막짧막하게 진행되는 스토리, 전 세계 유명 회사의 광고 문구를 차용한 챕터 제목들이 그렇다. 무엇보다 '닌자'라는 단어에서 오는 궁금증이 꽤나 크게 다가온다. 


닌자라고 하면, 일본 전국시대의 특수 전투 집단으로 첩보, 파괴, 친투, 암살 등의 임무를 행했던 자들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그림자가 떠오르는데, 소설에서는 그런 느낌을 살린 것 같다. 분명히 존재하는데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과연 실생활에 도움되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회사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옌스 얀센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창고를 택한다. 그 창고는 다름 아닌 천장에 있었다. 설마 하니 천장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딨을까? '등잔 밑에 어둡다'는 속담이 통하는 경우가 여기 또 있다. 그는 직원들이 일하는 낮에 자고 모두 퇴근하고 없는 밤에 기어 나와 활동한다. 언제까지 계속 할 수 있을까?


발상과 소재의 재미가 확실하다면, 주제만 잘 잡아주면 된다. 공감하지 못할 부분이 곳곳에 눈에 띄지만 괜찮은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도통 알기 힘들다. 평생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고, 결국 언젠가는 들킬 것이고 제자리로 돌아올 텐데, 그 사이에 뭔가 깨닫거나 완전히 다른 무엇을 이룩해내야 할 것이다. 옌스 얀센은 누군가와 함께 완전히 다른 무엇을 해내고자 하지만, 심히 와 닿지는 않는 것 같다. 


달갑지만은 않은 주인공의 '외도', 아직 시기 상조다


최근 북유럽 소설이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고 있다. 아울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오베라는 남자> <소피의 세계> 등의 대박이 이어졌다. <오피스 닌자> 또한 북유럽 소설 특유의 캐릭터를 내세운 웃픈 이야기를 내세워 그에 편승해 성공을 노려본 듯하다. 아쉽게도 캐릭터가 잘 살지 못했고, 웃기면서도 슬픈 이야기가 어중간했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 미덕이 있다면,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해준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회사로부터 돈을 받고 나의 시간과 능력을 투자해 회사로 하여금 돈을 벌게 해주는 시스템에 대해서. 어느 누가 승진하기 싫어 사라지려고 생각해봤는가 말이다. 그것도 아이러니하게도 하필이면 회사 안으로. 그 이면에 무엇이 있든 탁월한 발상 전환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직 회사에서의 일에 대해서 그만큼 '심오'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갈 길이 멀고 주위를 살필 기력이나 기회는 많지 않으며 밀려날까봐 전전긍긍하기 때문이다. 그저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옌스 얀센의 '외도'가 달갑지 않게 다가왔다. 한편으론 내가 영원히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행동을 실천에 옮겼으니 일면 영웅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직 시기상조다. 


조금은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현재를 거부하고 바뀌길 원하는 건 지금의 나에겐, 그리고 수많은 이들에겐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렇게 되어 버린 게 슬프고 한심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경향이 있는 거다. 나도 모르게 시대에 편승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지만, 누가 뭐라하랴. 그렇게 옌스 얀센의 혁명적인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심금을 울리지 못한 채 잊혀질 듯하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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