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트럼보>
영화 <트럼보> 포스터 ⓒ그린나래미디
진정 멋진 삶이란 무엇일까. 명예로운 직업에 돈 많은 부자까지 겸하고 있는 삶이나, 자신이 믿는 신념을 죽는 한이 있어도 부러뜨리지 않는 삶이 멋진 삶이라는 진부한 생각은 접어 두자. 단조롭기까지 하다. 최소한 이 둘을 합친 삶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적이 많을 것이기에 무엇 하나는 잃을 게 뻔 하다. 그럼에도 그런 삶을 산다면, 더욱이 많은 걸 가졌었고 많은 걸 잃었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정녕 위대하다고 하겠다. 역사상 수많은 위인들에게서도 그와 같은 삶을 많이 보지 못했다. 대부분은 올바르지만 힘겨운 삶을 살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런 삶을 산 사람의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할리우드 최고의 고전으로 뽑히는 <로마의 휴일>의 각본가 '돌턴 트럼보'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제일 몸값 높은 작가로 부자였다가, 자신이 믿는 신념을 부러뜨리지 않아 힘든 삶을 살게 되지만, 흔들리지 않고 힘든 삶을 연명해가면서도 신념을 끌고 나가, 결국은 위대한 삶의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다.
위대한 인물, 트럼보의 매력적인 인생 역전
영화 <트럼보>는 이런 그의 인생 역전을 아주 매력적으로 풀어냈다. 매력적인 실화와 인물과 스토리를, 영화가 더욱 매력적으로 풀어내어 '완벽하다'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트럼보 같은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오른다. 그 재능, 그 유머, 그 신념, 그 뚝심, 그 아량, 적어도 영화로는 그 어떤 단점도 찾을 수 없다.
때는 1940년대 후반 미국, 냉전이 막 시작될 때다. 트럼보는 공산주의자로, 그를 위시한 영화계 종사자들은 모임을 결성해 스텝들의 파업을 지지한다. 감독과 작가와 주연배우 몇몇에 비해 터무니 없는 임금을 받는 영화계 종사자들이 지극히 합당한 요구를 해왔고 그에 지극히 합당한 지지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곧 불어닥친 반미활동조사가 그의 인생을 바꾼다.
영화 <트럼보>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
1947년 미 의회 반미활동조사위원회로부터 소환을 받고 출두하는 트럼보. 그는 진보적 판사가 다수를 차지하는 대법원의 판결을 믿고, 출두하여 '공산주의적인 발언'을 한다. 그건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었다. '사상의 자유는 의회도 빼앗을 수 없다.' '네, 아니오로만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나 노예일 뿐이다.' 하지만 진보적 판사가 사망하는 예기치 못한 일이 터지고, 아니나 다를까 트럼보를 위시한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할리우드 텐'은 감옥에 가게 된다.
이 감옥행은 당연하게도 트럼보와 트럼보 가족 인생의 분기점이 된다. 그는 이제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지 못하고, 그의 가족 괴로운 삶을 살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될까. 더욱더 자신을 불사르며 공산주의자로서의 적의를 불태울까, 백기투항해 다시 예전처럼 부자로서 살게 될까. 그것도 아니면 실의에 빠져 술로 날을 지새울까.
그의 선택은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이 시대의 가장 중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며, 자신의 꿈만을 좆으며, 자신의 신념만을 우선시 하며, 가족을 온전히 부양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아마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트럼보 또한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 대신, 자신을 버렸다. 그렇지만 자신을 버린 이상, 굽히지 않은 신념이 펴지지도 않았다.
바로 가족들이 그에게 신념을 되찾아 준다. 오욕의 세월을 함께 견뎌내준 가족들이 말이다. 그가 자신을 버리고 모든 시간을 바쳐 부양하고자 했고 어찌 부양할 수 있었던 가족들이 말이다.
영화 <트럼보>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
악당도 영웅도 없다. 인간이 있을 뿐이다.
가족들이 그를 다시금 지지하고 믿음을 건넨 건 여러 가지로 읽힌다. 무엇보다 자신을 되찾았다는 점이다. 뒤를 든든히 받혀주는 가족이 있기에, 자신의 신념을 영화에 투영시키고도 두려울 게 없었다. 자신을 되찾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영화는 신념과 가족을 전면 배치하면서도 자신으로 하여금 항상 뒤를 받히게 하여, 무엇보다 자신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시종일관 던지고 있다.
가족들을 부양한다는 일념 하에 오직 일에 파묻혀 오히려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 가장을 받아들이고 가장 또한 가족을 위한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건, 가족 해체의 위기를 훌륭하게 해쳐나가는 일면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트럼보가 지향하는 바가 모든 이의 행복이라고 했을 때, 그 저반에는 가족이 있다.
더 큰 의미로, 살인자, 배신자, 동조자, 피해자들 모두 '희생자'라는 한 그룹이라고 끌어안을 수 있을 때, 이들 간의 대승적인 결합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이들 모두를 같은 '희생자'이자 한 '가족'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보는 세월이 흘러 어느 수상식에서 이와 비슷한 논조의 연설을 한다.
"악당도 영웅도 없어요. 희생자만이 있을 뿐이지요."
영화 <트럼보>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하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 절대 트럼보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고난의 날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나도 자신 없으니까. 다만, 그런 삶이 '올바르다'라는 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건 꼭 말하고 싶다.
나, 가족, 우리.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삶. 거기엔 트럼보의 말처럼 악당도 없고 영웅도 없다. 그렇다고 그의 말처럼 희생자만 있지도 않다.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아니 알기 위해 조금의 노력이라도 기울일 수 있다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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