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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아이를 살리는 위대한 한 마디, "너는 착한 아이야" <너는 착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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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너는 착한 아이>



영화 <너는 착한 아이> 포스터 ⓒ아크 엔터테인먼트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는 게 있다. 타인으로부터 착한 아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내면의 욕구나 소망을 억압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심리적 콤플렉스다. 착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거니와 버림받을 수 있다는 믿음의 바탕에서 생성되었다. 부모에 의해 엄격한 집안 교육이 원인이다. 타인의 눈치만 볼 뿐 정작 내면을 살피지 못하기에 우울해지기 쉽다. 


'착한 아이'는 틀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는 착하다'라는 명제가 맞을 것이다. 아이는 모두 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착한) 아이'이기 때문에 굳이 '착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이들에게는 뭘 하든 착하다는 걸 깨우쳐줘야 한다. 잘못을 하든, 실수를 하든, 울든, 넘어지든, 싸우든 아이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섬세한 감정선으로 심각한 아동문제를 다루다


영화 <너는 착한 아이>는 섬세한 감정선을 바탕으로 심각한 아동문제를 다룬다. 집안의 학대로 인해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해 오로지 급식만 기다리는 초등학교 4학년생 간다와 간다의 담임으로 전쟁터 같은 초등학교 선생을 겨우겨우 연명하는 오카노, 밖에서는 상냥하고 멋지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어린 딸 아야카에 대한 폭력을 멈추지 못하는 미즈키와 활달하기 그지 없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미즈키의 이웃 오오미야, 그리고 가족이 없는 치매 할머니와 편집증 증세가 있는 히로야와의 가족애 풍겨나는 우정. 



영화 <너는 착한 아이>의 한 장면 ⓒ아크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이렇게 3개의 이야기가 서로 연관성 없이 진행된다. 다만 비슷한 감정선과 비슷한 유형의 문제들이기에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다른 이야기로 화면이 전환될 때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 연결 고리를 배치했다. 예를 들면, 전의 화면에서 다른 이야기의 누군가가 웃으면서 끝나면 이어지는 화면에서 다른 이야기의 누군가가 웃으면서 시작한다든지,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는 장면에서 처맛자락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는 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조금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이 영화의 분위기에 알맞았던 것 같다. 


폭력과 무관심, 그리고 관심과 '착한 아이'


오카노는 정녕 전쟁터 같은 교실에서 한 시도 마음 편하지 않다. 초등학생들이 더하면 더해서, 이지매는 물론이고 선생님을 골탕먹이기까지 한다. 그 와중에 매일 같이 집에 가지 않고 있는, 겉으로 보았을 때 더럽고 어딘가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이는 학생 간다를 알아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간다 말로는 자기는 착한 아이가 아니란다. 그래서 아빠, 엄마가 자기를 싫어한단다. 


간다는 오카노에게 어떻게 해야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는지 물어본다. 오카노는 "간다, 너는 착한 아이야"라며 진심어린 위로를 건넨다. 진심을 건네 받은 간다는 마음을 열고 오카노와 함께 아빠와의 약속을 깨고 5시 이전에 집으로 향하는데, 간다 아빠와의 실랑이 끝에 오카노는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오카노는 문 너머로 가정 폭력을 목격한다...



영화 <너는 착한 아이>의 한 장면 ⓒ아크 엔터테인먼트



미즈키는 어린 딸 아야카와 산다. 남편은 멀리 외국으로 출장을 갔다. 그녀는 이웃들과 함께 종종 공원에서 시간을 가지며 아이들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 와중에 활달하기 그지 없는 오오미야와 친해진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사랑하고 챙긴다. 반면 미즈키는 집에 와서는 아야카에게 심한 폭력을 일삼는다. 그녀의 손목에 담뱃불 모양이 남아 있는 걸로 봐선 어릴 때 집에서 학대를 받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녀의 아이에게도 되물림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도 그런 자신이 싫다. 


언젠가 오오미야의 집으로 초대를 받아 같이 간다. 오오미야의 어린 아들 히루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야카, 어린 아이이기에 '당연히' 실수를 저지른다. 문제는 그 대상이 엄마 미즈키였다. 미즈키는 역시 참지 못하고 아야카를 나무란다. 때릴 순 없으니 잘못했다며 울부짖는 아야카를 억지로 일으켜 집으로 가려 한다. 이때 오오미야가 조용히 와서 미즈키를 안는다. "미즈키도 어릴 때 학대당했지?"


히로야는 편집증 증세가 있는 아이이다. 그는 매일 아침 학교를 가며 어느 할머니께 첫인사와 끝인사를 함께 하곤 한다. 그럴 때면 그 할머니 또한 상냥하게 받아준다. 할머니는 치매에 걸렸는데, 히로야만은 잊지 않는 것 같다. 그녀에겐 가족이 없어서 히로야가 손자처럼 생각되는 모양이다. 


언젠가는 히로야가 열쇠를 잃어버려 집에 갈 수 없었을 때가 있었는데, 할머니가 자신의 집으로 오게 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나중에 히로야를 찾아온 엄마, 그런데 정작 엄마는 히로야를 잘 모른다. 히로야가 얼마나 착한지, 비록 편집증 증세가 있지만 호기심이 많고 기억력도 좋고 똑똑한지 말이다. 할머니 덕분에 히로야를 다시 알게 된 엄마다.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존감을 지켜라


<너는 착한 아이>는 일본 영화의 특징 중 한 가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심각한 문제나 이슈를 다룸에도 유머와 휴머니즘, 감동과 교훈을 져버리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도 아동 폭력과 무관심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일본 영화 특유의 감정선을 놓치 않는다. 그 감정선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머와 휴머니즘, 감동과 교훈이 있다. 


우리나라 영화였다면, 코미디 같은 유머와 눈물샘을 지극히 자극하는 감동을 다분히 심어놨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심각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거나 뭔가 더 보여주기 위해 많은 것들을 덕지덕지 붙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본 영화의 이런 특징은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영화 <너는 착한 아이>의 한 장면 ⓒ아크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세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착한 아이'의 위대함은 실제로도 통용될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내가, 그 다음은 나의 아이가,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나의 이웃이 '착한 아이'임을 인지해야 한다. 여기서 착한 아이란 건 다름 아닌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외려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증오한다면,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도 증오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너는 착한 아이'는 곧 '나는 착한 아이'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잘' 알고 있는 나조차도 나를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 문화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낮춰야 한다. 그건 자칫 나를 인정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으로 변질되기 쉽다. 하지만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나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자만심 이전에 자신감이고, 자신감 이전에 자존감이다. 바로 그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아동 폭력과 무관심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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