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작 열전/신작 도서

비극과 고통에서 행복과 사랑을 끄집어내다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반응형



[서평]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표지 ⓒ열린책들



책을 읽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나와 다른 삶을 구경하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다. 나보다 못한 삶 또는 나보다 나은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다. 아무래도 나보다 나은 삶보다는 못한 삶을 들여다보는 게 편할 것이다. 그래서 나은 삶은 거의 자기계발 영역으로 빠졌다. 반면 못한 삶은 소설이나 에세이, 자기계발에서 예전 삶으로 다방면으로 가능하다. 


<젖은 모래 위의 두 발>은 자전적 에세이이다. 그것도 치명적인 비극과 불행을 그리고 있다. 못한 삶의 정도가 한계를 넘어선 듯 보인다. 그럼에도 끝까지 책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의 필력뿐 아니라 치명적인 비극과 불행에 의한 압도적인 슬픔보다 그보다 더한 사랑과 용기 덕분이다. 이제까지 봐왔던 최루성 콘텐츠와는 결을 달리한다. 


서서히 죽어가는 두 아이와 함께 하게 될 가족


엄마 쥘리앙과 아빠 로이크는 영영 빼도 박도 못할, 일상에 아로새겨질 시련에 맞닥뜨린다. 그들의 두 살 된 여자 아이 타이스가 돌이킬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염성 백질 이영양증'. 심각한 유전병으로, 오래 살지 못하는 퇴행성 질환이다. 서서히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이 멀고, 결국에는 생명 기능까지 정지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환아의 동생이 태어날 경우 네 명 중 한 명 꼴의 발병 위험성이 있다. 엄마와 아빠의 나쁜 유전자들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기발랄하고 부산스럽고 자기 주도적이고 고집도 센 아이 타이스는 서서히 죽어간다. 죽어가는 타이스를 보며 쥘리앙과 로이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의학의 힘을 빌리고 24시간 곁에서 지켜보며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밖에. 이토록 치명적인 병은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 


그들에게는 여러 길이 있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압도되어 타이스의 남은 생을 눈물 바다로 보낼 것인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몸부림치는 타이스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슬픔과 고통과 불 보듯 뻔한 비극과 불행을 딛고 타이스의 예견된 삶을 행복과 사랑으로 채워줄 것인지. 마지막의 삶이 그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건 명백하다. 하지만 그 삶은 너무나 어렵고 가기 힘든 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길을 택한다. 무엇보다 타이스를 위해...


"네가 이제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게 된대. 엄마 아빠는 어떡하지. 그래도 우리 딸, 엄마 아빠는 너를 언제까지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뭐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우리 예쁜 아기, 엄마가 약속할게. 너는 아주 예쁘게 살다 갈 거야. 다른 아이들이나 가스파르 오빠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네가 뿌듯해 할 만한 삶일 거야. 그 삶에 사랑만큼은 모자라지 않을 거야." (본문 중에서)


그들은 처참하고 지옥 같다, 그런데 행복하다고 한다


쥘리앙과 로이크는 셋째 아이를 낳는다. 언니와 같은 병에 걸릴 확률이 25%에 달하는 아이. 25%의 확률은 100%가 되어 그들의 심장을 겨냥했다. 셋째 아이 아질리스도 이염성 백질 이영양증이란다. 소름이 끼치고 억장이 무너지고 눈물이 비 오듯 내린다. 심장이 너덜너덜해진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타이스를 잘 보내고... 아질리스를 잘 살려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이 모순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려니 너무 힘들다. 그들은 도움을 청한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그들을 돕는다. 숨통이 트이고 눈물이 흐른다. 기쁨의 눈물인가, 안도의 눈물인가, 체념의 눈물인가. 


그들의 이야기는 처참하다. 그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매일매일 순간 순간이 지옥처럼 느껴진다. 내 삶은 반대로 화창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그들의 처참한 삶에 압도되어 감히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그런 길을 걷기로 결연하게 맹세했기로서니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다름 아닌 죽어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타이스 덕분이다. 타이스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노래하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사랑한다. 그저 사랑밖에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타이스한테 '사랑'은 남을 것이다. 타이스가 준 사랑, 타이스에게 준 사랑. 


비극과 고통의 극단에서 행복과 사랑의 극단을 끄집어내다


흔히 비극과 고통을 억지로 이겨내려는 사랑을 보고 '오그라든다'는 말을 쓴다. 그럴 때 고통의 눈물과 사랑의 환희는 멀리 날아가 버리고 남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된다. 잘못된 선택이자 방법이다. 반면 이 이야기는 어떤가. 비극과 고통의 극단에서 행복과 사랑의 극단을 끄집어냈다. 극단으로 치닫는 건 좋지 못하고 극단과 극단은 서로 통한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전자는 틀리고 후자는 맞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극단에는 극단만이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귀여운 우리 딸, 엄마가 애원하잖니, 조금만 더 싸워 줘. 제발 버텨 줘. 네가 없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나의 태양이고, 나의 세상이고, 나의 마음, 나의 힘, 나의 급소란다. 네가 나의 반석이고, 나의 심연이야. 사랑한다, 내 딸아. 지금 가면 안 돼. 오늘은 여기 있어 줘.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본문 중에서)


이 짧은 소개로는 그들의 고통을 1%도 전해줄 수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접한다고 해서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전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또한 각자의 아픔이 있을 뿐이다. 온전히 그 아픔을 서로 나눌 수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 만은 이 짧은 소개로도 충분히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접하면 그들의 사랑을 더욱 이해하고 전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또한 사랑을 힘껏 공유하고 있다. 온전히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고 나누고 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