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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과잉의 시대, 도덕적 실재론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인간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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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인간의 품격>



<인간의 품격> 표지 ⓒ부키


이 시대를 한 마디로 무어라 규정할 수 있을까. '과잉 시대'라고 하면 맞을까. 정보 과잉, 자극 과잉, 기록 과잉, 유혹 과잉, 피로 과잉, 공급 과잉, 서비스 과잉, 학력 과잉, 음식 과잉, 긍정 과잉... '과잉' 앞에 거의 모든 것을 붙일 수 있을 시대이다. 어마어마한 과잉 앞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한다. 이를 수용하고 선도하는 소수의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가기 바쁠 뿐이다. 거기에서 능력이 갈리고 계급이 갈린다. 


또 하나의 과잉이 여기 있다. '자기 과잉'. 세상의 중심에 자신이 있고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이 중요하며 자신을 사랑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고 자신에 대해서는 겸손이라는 걸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이 곧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최우선의 능력이며 잘 해내지 못한다면 도태 당한다고 느낀다. 실제로 도태 당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는 명구는 유명하다. 


'자기 과잉'은 얼핏 자신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자신을 사랑하고 독려하고 단련하는 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송나라 성리학자인 주자는 <대학>을 통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설파했다.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건 모든 일의 기본이다. 


하지만 현대의 자기 단련은 이와 동떨어져 보인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자아를 들여다보고 겸손과 절제를 중요시하며 내적 성숙을 목적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성취와 성공을 위해 타인의 인정과 외적인 찬사에만 목적이 있다. '나'를 두고, 시선과 목적이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게 되었다. 그것도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급격히. 그렇게 불균형이 생기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온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도덕적 실재론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인간의 품격>(부키)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전통을 되살려내야 한다고 말한다. 다름 아닌 '도덕적 실재론' 전통 말이다. 한계와 도덕적 투쟁을 강조하는 실재론적 전통은, 긍정의 심리학이 꽃피면서 소셜 미디어의 자기 과시 풍조가 만연하면서 그리고 능력주의 시스템의 경쟁 스트레스로 인해 옆으로 밀려나고 말았으니 다시 원 상태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만연해 있는 풍조를 옆으로 밀어버리면 안 된다. 외적 야망과 내적 염원이, 외적 능력과 도덕적 본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을 관통하는 두 개념을 랍비 조셉 솔로베이치크가 1965년에 쓴 <고독한 신앙인>에 나오는 두 본성이 아담 1과 아담 2을 빌려와 규정한다. 아담 1은 경제학의 논리다. 들어가는 게 있으면 나오는 게 있다. 노력을 하면 보상이 따르고, 연습을 하면 완벽해진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효용을 극대화한다. 지금 우리 시대가 원하는 가장 완벽한 이상형일 것이다. 


반면 아담 2는 도덕적 논리다. 받으려면 줘야 한다. 성공은 가장 큰 실패, 즉 자만으로 이어진다. 실패는 가장 큰 성공, 즉 겸손과 배움으로 이어진다. 자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잊어야 하고,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을 잃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 시대가 원하는 이상형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가진 능력이 저게 다 라면,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들 것이다. 


책은 시종 일관 이 두 본성을 비교 대조한다. 이 시대는 누가 보아도 아담 1의 시대인데, 저자는 그 한계를 넘어섰다고 진단했다. 그러니까 저자는 두 본성의 가치 판단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담 1에 해당하는 본성의 과잉을 우려하고 아담 2에 해당하는 본성의 부활을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즉, 경제과 도덕의 균형을 바라고 있다. 그것이 포인트다. '균형'.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도덕으로의 길을 강하게 제시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 길을 8명의 사람들을 통해 말하고 있는데, 그들의 삶의 방식은 이제는 흔히 볼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결함'을 정확히 알고, 자신의 죄악을 극복하기 위해 '내적'으로 투쟁했으며, '자존감'을 얻었다. 그들의 발자취가 도덕으로의 길의 훌륭한 모범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주지했듯이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결함이야말로 도덕으로의 길에 가장 필요한 덕목


저자는 바로 그 '결함'이야말로 도덕으로의 길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주장한다. 평생 노력을 기울여 결함을 초월했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핏 <미움받을 용기>로 유명해진 '알프레드 아들러' 박사의 '열등감 이론'이 생각나게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열등감이 있는데, 용기를 갖고 그 열등감을 극복한다면 더욱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결함'과 '열등감', '구원'과 '건강한 삶'의 대구가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열등감과는 달리 결함이 없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시대의 자기 과잉은 자존감 하락의 소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균형이 깨지면 과도한 움직임이 일게 되기 마련이다. 지금이 딱 그렇다. 과도한 변화, 움직임이 모든 걸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이마누엘 칸트가 이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인간이라는 뒤틀린 목재에서 곧은 것이라고는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없다." 뒤틀린 목재란 즉, 결함이다. 그 사실을 직시한 사람들은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인격 형성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 과정과 결과야말로 진정한 성공이라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결함이 없다고 믿어 왔던, 또 그렇게 교육 받았던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시대착오적이고 도태된 이야기라고 비춰질 지 모르겠다. 도대체 그런 것들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냉정하게 봤을 때, 도덕이니 결함이니 인격이니 하는 것들이 이 시대에서 통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이 능력주의 시대에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만 말하고 있다가는 오래지 않아 도태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되길 바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시대에 맞는 성공을 한 사람에나 도덕으로의 길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책을 통해 저자가 워낙 강력하게 도덕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렇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균형'이 아닌가. 문제는 언제나 동일한 것 같다. 투표랑 비슷하다. '나 하나 안 해도 대세에 지장은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가능하다는 것. 그렇지 않고는 비록 잘못된 방향일지 모르지만 사회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로 가는 게 쉽지 않다. 조금씩이나마 실천에 옮겨보자. '너무 큰' 나에서 '작은' 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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