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 읽기]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표지 ⓒ아시아
작가 지망생인 나는 숙부를 대신해서 팬션과 낚시터를 관리하고 있다. 어느 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팬션에 찾아온다. 알고 보니 제작자와 다툼 끝에 도망친 거였다. 언론들은 쿠바와 멕시코를 유력한 은신처로 뽑았는데, 정작 그는 한국으로 도주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서부의 영웅이 아니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푼 돈을 빼돌린 추잡한 도망자이자 고집 센 늙은이에 불과했다.
오한기의 소설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아시아)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인 나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찾아오며 시작된다. 도망 다니는 주제에 거장이라 불리는 감독들과 주옥 같은 작품을 폄하하면서, 자신의 아주 오래된 영화 만을 대단하다고 치켜세우곤 한다. 그러며 자신이 여전히 누구나 한 번만 뵙길 청하는 정도의 거물로 인식하고는, 자신을 찾는 이가 없는지 묻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팬션 관리실에 몰래 들어와 숙박비나 훔치는 비참한 노인네일 뿐이다.
영웅이자 살아 있는 전설 클린트 이스트우드, 지금은?
왜 하필 '클린트 이스트우드'일까?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 배우이자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에 딱 맞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1955년 단역으로 시작해 올해로 데뷔 60년이 되었다.
그 유명한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의 주인공이자, 70년대부터 감독을 시작해 1992년에 정점을 찍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휩쓴 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그는 영화에서 주로 약자를 위해 타락한 공권력과 싸우고 악당을 처단하는 영웅으로 분했다. 그러며 실제로도 위대한 감독이자 모범적인 '진짜' 보수 공화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야말로 영화라는 허상과 삶이라는 실제가 멋들어지게 들어맞는 진귀한 사람이 그다. 그런 그조차 냉혹한 자본주의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힘든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소설은 그런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해 복잡한(상반된) 시선을 던진다. 그의 성향을 존경하면서도 그를 존경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 그의 영웅은 영웅답게 타락한 게 아니라 비참하게 추락했다. 또한 직선적이고 화끈한 그의 고전적인 영화 스타일, 그의 성향은 많은 영화인들에게 비판을 받아왔다. 바로 그 직선적이고 화끈한 성향 때문에. 그가 보수적인 공화당원인 것도 마찬가지다. '보수'를 벌레 보듯이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럴 텐데 그는 억울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이 그립다
소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빌어 현대 영화를 이루고 있는 사조를 비판한다. 영화에 대단한 철학이라도 불어넣은 것처럼 별 거 아닌 것을 부풀어 놓는 것이다. 소설 속 나는 그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총알 하나로 그들의 수다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비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나'의 영웅이다. 영화로서나 인간으로서나. 그러며 그리워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식 영화를, 다시 오지 않을 그런 영화를.
그렇지만 그가 겸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평가를 받고 더 많은 인기를 누릴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단지 '그 시절 그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나에게 최고의 우상이었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건 죽고 없는 사람한테 어울리는 칭호가 아닌가.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참으로 복잡한 심경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꽉 막힌 신념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그의 영화에선 도무지 유연함을 찾을 수 없다. 이 시대가 바라는 최고의 성향인 유연함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그의 스타일이 벌써부터 그립다. 그가 사라지면 더 이상 그런 영화를 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창이 아니라, 굳건하고 단단한 방패다. 지금은 그런 방패조차도 유연함이라는 무기로 충분히 위협이 가능하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그 방패 뒤에 숨긴 창으로 대항해야 하고, 그는 바로 방패가 아닌 위험한 창을 가진 이가 된다. 참으로 교묘하고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인종 갈등과 베트남전처럼 더 이상 명확한 적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이 교묘한 현실에서 작가라는 건맨은 어디에다 멋지게 한바탕 총을 쏘아댈 수 있단 말인가. 오한기의 이 슬픈 농담은 정의를 찾아 헤매는 현실의 투사들에게, 그리고 멋진 이야기를 찾아 방황하는 작가들에게 오래 공명하리라."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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