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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이윤기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책, 여러 모로 괜찮다 <조르바도 춤추게 하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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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조르바도 춤추게 하는 글쓰기>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표지 ⓒ웅진지식하우스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그리스인 조르바』 등의 번역서, 『그리스 로마 신화』 등의 신화서, 그리고 동인문학상을 탄 『숨은 그림 찾기1』와 대산문학상을 탄 『두물머리』까지. 번역과 신화와 소설 어느 한 분야에서도 모난 게 없는 업적을 이룬 이 사람은 누구일까. 지난 2010년 타계한 고 이윤기이다. 


그의 저서를 처음 접한 건 대학에 갓 입학해서이다. 다름 아닌 내 인생 최고의 소설 중 하나인 『장미의 이름』. 정말 오랫동안 힘들 게 읽었지만 영원히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 이후 접한 게 그의 신화서인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내가 알던 그 이윤기 번역가의 저서가 맞는 지 의심이 갈 정도로, 기존과 완전히 다른 지식 세계를 보여주었다. 아쉽게도 그의 소설을 접한 기억은 없다. 그래서 나에게 이윤기는 제1로는 번역가, 제2로는 신화전문가로 남아 있다. 


그 고정관념을 깨뜨리게 해준 게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딸에 의해 출간된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이다. 그가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어떤 생각과 태도로 작업을 해왔는지, 그에 대해서 적확하게 알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책이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난 이윤기를 번역 잘하고 신화를 많이 아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을 터였다. 


이윤기는 글쟁이다. 그를 설명하는 가장 큰 분야인 ‘번역’만으로는 ‘글쟁이’가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리 번역이 제2의 창작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번역은 단지 다른 나라 말을 우리나라 말로 옮기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를 더 부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윤기 선생의 번역은 달라 보인다. 아니, 그의 번역에 대한 태도와 생각이 다르다고 봐야 하겠다. 그는 “번역은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번역가 발레리 라르보을 인용하며 번역의 중요성과 함께 그 대체할 수 없는 무게감을 강조했다. 그와 함께 딸려 오는 건 한없이 무거운 책임감이겠다. 오독과 오역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파하며, 번역가로서 짊어져야 할 것에 도망가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말인데, 나는 우리말과의 씨름을 이렇게 하고 있다. 첫째는 사전과의 싸움이다. 사전을 열어야 말의 역사, 단어의 진화사가 보인다. 그런데도 번역가는 사전 안 펴고, 어물쩍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가고 싶다는 유혹과 하룻밤에도 수십 번씩 싸워야 한다. 그러나 사전도 맹신할 물건은 못 된다. 거기에 실려 있는 말은 화석화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사전 속의 말은 박물관의 언어이지 펄펄 살아 있는 저잣거리의 말이 아니다. 사전적 해석만 좇아 번역한 문장이 종종 죽은 문장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말의 어구와 어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일이다. 나는 복문 속의 종속절은 되도록 어구로 정리하여 단문으로 만드는 주의다. 복문은 글월의 복잡한 성분상 가독성을 엄청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셋째는 살아 있는 표현, 전부터 우리가 써왔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을 찾아내는 일이다. ‘숙어’가 무엇인가? ‘잘 익은 말’이다. 원문의 배후에 숨어 있는, 푹 익은 우리말을 찾아내는 일이다." (본문 중에서)


그 때문일까? 그는 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와도, 어느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이다. 사전을 무엇보다 가까이하며 글과 싸웠지만, 사전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저잣거리의 말을 찾아다녔고 선호했다. 또 번역투 표현을 견디지 못했지만, 요즘 사람들의 신조어에는 관대했다. 얼핏 보면 모순 그 자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자신만 정답이고 남은 오답인 듯한 행동. 그렇지만 명확한 기준이 있으니, 원칙주의자라고 불렀겠다. ‘살아 숨 쉬는 말과 글’이 그 기준이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 말과 글이 어떤 종류이던 상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자유의 상징인 조르바가 나한테 주인님이 아닌 두목으로 부른 게 그 단적인 예다. 자유의 상징이 어떻게 ‘주인님’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책은 이윤기를 이루는 척추인 번역, 신화, 소설을 중심으로, 글쓰기와 언어까지 뻗쳐 있다. 전적으로 그만의 생각이 깊고 넓게 투영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이윤기처럼 될 수 있다’라기보다 ‘이 책을 읽으면 이윤기를 알 수 있다’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의 글쓰기는 그를 알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이윤기 선생도, 이 책을 엮은 그의 딸 이다희 선생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중구난방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의 수많은 글 중에 39편의 에세이를 골라 이 정도로까지 나열해, 그의 글에 대한 태도와 생각을 전달해준 건 기적까지는 아닐지라도 차라리 감동이다. 


이 책을 읽고는, 글쟁이라면 글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잡고 일반 독자라면 이 시대 글쟁이에 대한 생각을 다잡는다면 좋을 것 같다. 평생 자신의 언어로 살아갈 사람이라면 이윤기의 태도와 생각이 큰 도움이 될 것이고, 평생 언어를 대하며 살아갈 사람이라면(사실 모든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윤기의 말과 글이 즐거움을 줄 것이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는 여러 모로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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