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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스파이, 국가 전복 사태 때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베리아의 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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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이베리아의 전갈>



<이베리아의 전갈> 표지 ⓒ아시아



2, 3년마다 겨울 시즌이 시작될 때 쯤에 어김 없이 돌아오는 영화 '007 시리즈'. 이번 겨울 초입에도 <007 스펜더>로 돌아왔다. 2006년부터 10년 간 4편의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로 열연한 다니엘 크레이그가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찍지 않을 거란 루머가 도는 가운데, 지난 2012년 <007 스카이폴>이 기록한 007 시리즈 역대 흥행 기록을 경신할 지 관심이 간다. 


올해 유독 스파이 영화가 많이 선보인 것 같은데, <킹스맨> <스파이>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맨 프롬 엉클> <스파이 브릿지> <007 스펜더>까지. <맨 프롬 엉클>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좋은 평가와 함께 부족함 없는 흥행을 맛본 작품들이다. 


요즘 나오는 스파이 영화들은 예전과 완연히 다르다. 예전에는 지령을 받은 일급 스파이가 비밀스럽게 임무를 완수한다는 게 기본 골자였다. 반면 요즘은 그런 일급 스파이가 기관에 의해 내쳐지거나 배신을 당해 위기에 빠져 사방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면서 자신의 판단에 의한 임무를 완수하곤 한다. 거대 시스템 대 개인의 구도가 된 것이다. 


스파이, 국가 전복 사태 때 그가 할 수 있는 건?


<이베리아의 전갈>(아시아)이라는 짧은 스파이 소설에는 3명의 스파이가 등장한다. 옐로, 블랙, 브라운. 이들의 관계는 이렇다. 옐로는 평생 회사에 헌신하며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그 공로로 표창도 받았다. 일선에서 물러나서는 사무실에서도 복잡한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무던한 상관이자 큰 야심 없는 부하로 평가받아 명예로운 은퇴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해외 지부 부임 인수인계 과정에서 있었던 사소한 오해와 다툼이 크게 번져 급기야 옐로가 회사의 부패를 언론에 폭로하는 사태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러고는 그걸 바탕으로 책을 쓰려고 하고 있었다. 


국장은 블랙을 급파해 옐로를 극비리에 귀국시키게끔 한다. 브라운은 블랙과 함께 하는 해외 주재원이었다. 그들은 함께 옐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작전을 구상한다. 하지만 그러는 도중 그들의 조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한다. 그들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그 중에서도 블랙은? 연락이 닿지 않는 본부, 명령이 없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블랙. 난감하기만 하다. 저냥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 


국가가 전복될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부속품이나 마찬가지인 비밀요원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라가 아닌 정부를 택해, 현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결사항전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부가 아닌 나라를 택해, 자연스럽게 전 정부가 아닌 현 정부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가? 이 소설이 던지는 딜레마적인 메시지는 실존적인 문제를 담고 있다. 적어도 이 소설의 주요 인물 세 명한테는 말이다. 


시스템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브라운은 극단적 선택을 한다. 현 정부에 대항하는 민병대 조직의 대장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전 정부를 옹호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는 쿠데타 와중에 자신의 가족을 잃고 자유 의지로 현 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을 뿐이다. 반면 옐로는 당연한 수순인 양 현 정부로 넘어간다. 전 정부의 구린 부분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이기 때문에, 현 정부로서는 그를 보호하는 한편 이용해 먹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 블랙은 어떠한가?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다. 전 정부와 현 정부 모두로부터 명령을 받은 상태로, 옐로를 암살해야 하면서도 보호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처지에 있다. 한 마디로 그는 버려진 상태에 있는 것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 하에서 그의 존재는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어필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양 쪽의 명령을 무시한 채 자유 의지에 따른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영화를 보면 거대 시스템의 강한 손아귀 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스파이(비밀요원)들이 등장한다.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을 가진 건 아니지만 수십 명의 비밀요원들을 처치할 만한 힘은 지니고 있고, 거의 천재에 필적하는 동료가 있으며, 운이 지지리도 좋다. 그렇지만 과연 현실은 그럴까. 직접 보지 못해서 알 수는 없지만, 전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그러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그들은 아마 시스템에서 절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운 좋게 벗어났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랑 뭐가 다를까.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거대한 시스템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행보, 특히 블랙의 행보를 보고 애처롭다고 생각하는 내가 우리가 더 애처로워 보인다. 그렇다고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던가 시스템을 파괴해버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또 다른 시스템을 찾거나 종속될 수밖에 없는 숙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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