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미친 국어사전>
<미친 국어사전> 표지 ⓒ뿌리와이파리
실로 오랜만에 국어사전을 꺼내들었어요. 감개가 무량하네요. 예전에는 모르는 게 있으면 무조건 사전을 찾았었죠. 국어사전뿐만 아니라 영어사전도 있고 백과사전도 있고 옥편도 있었습니다. 느렸지만 느린 대로 재미가 쏠쏠했죠. 그렇게 지식을 습득하면 잘 잊지 않게 되었어요.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부터는 더 이상 종이로 된 사전을 보기 힘들어졌어요. 모르는 게 생기면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되거든요. 어느 검색 사이트를 가든지 온갖 사전을 이용할 수 있고요.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게 더 정확하고 방대하기도 하지요. 그래도 사전의 위상은 여전하겠죠? 세상의 모든 지식이 그곳에 집약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지식이 그곳에서 나오기 때문이에요.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언어에 대한 모든 것, 국어사전의 위상은 특별합니다. 어느 민족이든, 어느 나라이든 언어란 게 척추와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어사전은 국립국어원에서 편찬하는 '표준국어대사전'이에요. 1999년 초판이 나왔고, 2008년에 나온 개정판 이후로는 웹 서비스를 통해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서만 볼 수 있죠.
'표준국어대사전'을 두고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비판이 있었는데요. 몇 가지 일별해보면, 우리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쓰지 않는 한자말을 실어 우리말에서 한자말의 비중을 높였다는 비판, 일제가 우리말을 한자말로 바꾼 낱말을 그대로 실었다는 비판, 남북한 언어를 아우르겠다는 미명 하에 1992년에 나온 '조선말 대사전'을 그대로 베껴썼다는 비판, '사랑'을 이성 간의 사랑으로만 서술한 것에 대한 비판 등이죠.
부끄럽기 그지 없는 '표준국어대사전'
<미친 국어사전>(뿌리와이파리)는 제목부터 본문까지 강한 어조로 '표준국어대사전'을 비판하고 있어요. 국립기관에서 펴낸 국어사전이라면 당연히 그 나라의 언어 정책과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갉아먹고 있다는 것이죠. 이게 사실이라면 부끄럽기 그지 없다고 할 수 있겠어요. 아무리 사람이 하는 일이라 실수가 나올 수 있다고 하지만, 정도가 심하다면 굳이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을 필요가 없겠죠. 민간 출판사나 연구소에서 나온 사전이 더 믿음이 갈 것 같아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적어도 수 백 군데에서 수 천 군데에 이르는 오류와 문제점을 짚어냅니다. 위에서 말했던 비판들도 역시 속해있는데요. 저자도 이 비판을 상당히 심각한 수준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특히 한자말의 비중이 높다는 부분이 심각한데요. 이는 한자말을 포함한 외래어의 비중이 엄청나다는 사실로 이어집니다.
물론 한자말을 포함한 외래어도 우리말이므로 국어사전에 실려야 함이 마땅하지요. 그렇지만 저자가 지적하는 부분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낱말들입니다.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면 도무지 알기 어려운 낱말이 부지기수인 것이죠. 아주 살짝만 보여드릴까요? 프라디오마이신(fradiomycin), 로브몽탕트(<프랑스어>rove montante), 라셸레이스(Raschel lace), 페이퍼크로마토그래피(paper chromatography). 아는 낱말이 있으신가요?
그러는 한편 당연히 사전에 있음직한 낱말이 실리지 않은 경우가 또 엄청나게 많습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요? 몇 가지 예만 들어도 '표준국어대사전'의 허술함을 직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다음은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에서 제외된 낱말들이에요. 커피잔, 콩나물무침, 내장탕, 내공, 심사위원, 첫경험, 오리알, 머리끈, 막창, 제육덮밥, 우산꽂이, 노선표, 대표곡, 관리비, 흑염소, 빅뱅, 늪지 등. 이 밖에도 당연히 실려야 할 낱말이 실리지 않은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도무지 그 기준을 이해할 수 없어요.
국어사전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져달라
위에서 말했던 비판 중 '사랑'을 이성 간의 사랑으로만 해석해 놓은 점이 있는데, 국립국어원에서 2014년 이례적으로 그 뜻을 바꾼 사건(?)이 있었어요. 사랑을 기존의 '이성의 상대에서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에서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꾼 것이죠. 하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보수 기독교 단체들의 비판으로 인해 다시 원상태로 돌려 놓았다고 해요. 허술함에 더해 차별과 편견을 부추기기까지 하는 파렴치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작년에 봤던 영화 중에 <행복한 사전>(원작: <배를 엮다>)라는 좋은 작품이 있었어요.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작업으로 '사전'을 만드는 이들의 고군분투를 그린 작품인데, 그들의 언어에 대한 사랑과 관심 그리고 소명의식이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한편 아리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분명 소설이자 영화이기에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언어를 다루는 사전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글을 만지는 편집자, 글을 쓰는 기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요. 새삼 더욱더 사랑과 관심을 갖고 치열하게 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네요.
이 책의 저자가 시종일관 보이는 강력하기 그지 없는 비판은, 사실 그 이상의 사랑과 관심이 내재되어 있기에 가능한 걸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자세하고 꼼꼼할 수가 없죠. 국립국어원은 최소한 이 책에 나와 있는 문제점들이라도 검토하고 보완할 것은 보완했으면 좋겠어요. '이건 아니다', '이건 너무 하다' 싶은 게 너무 많단 말이에요. 영화 <행복한 사전>이나 소설 <배를 엮다>도 함께 보시고 반성(?)도 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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