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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구원과 멕시코 역사의 질곡을 짚어보다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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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 표지 ⓒ새움


마야, 아즈텍 등의 당대 최고 문명을 이룩하고, 스페인의 일방적 식민지 통치 시대를 거쳐, 미국의 영향을 받은, 다분히 혼합적인 문화 색체를 띠고 있는 나라 멕시코. 그래서인지 멕시코 하면 어딘지 불안하고 위험한 나라라는 편견과 함께, 정열적이고 충동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야말로 온갖 것들을 들이부어도 다 녹여버리는 용광로와 같은 나라이다.


우리나라 소설가 구광렬의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는 그런 멕시코의 특징을 고스란히 소설로 옮겼다. 사실 멕시코 소설이나 마찬가지다. 충동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전개, 평화롭지만 불안이 숨 쉬고 있는 공간,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정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함께 한다. 그 중심에 유학생 강경준이 있다.


소설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유학생 강경준이 어이없기 짝이 없는 이유로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나우칼판 감옥에 갇히면서 시작한다. 고문과 날조, 배신이 이어진다. 돈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도혁명당의 부정부패가 절정에 이르고 나라 경제는 외환위기로 파탄이 나며,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기에 어이없는 이유는 어이없지 않은 것이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는 오히려 상식이 비상식이 되지 않는가. 당시 우리나라와 다를 바 없는 멕시코였다.


대지진으로 강경준은 탈옥 아닌 탈출을 감행한다. 그는 감옥 생활 중에 사랑하는 연인을 얻었는데, 대지진 때문에 그녀를 잃고 만다.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 강경준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강경준은 곧 첼탈족 전설에 나오는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 전사 치첸이었다. 만년에는 빨리 죽었으면하곤 죽음을 기다리는 즐거움으로 살았다는 그, 강경준에게도 그와 같은 삶이 남아 있었다.

 

강경준은 세계 최악의 나우칼판에서 세계 최고의 파라다이스 치아파스로 간다. 첼탈족 전설은 그곳의 어느 노파에게서 들은 말이다. 강경준은 그곳에서 파라다이스에 걸맞은 생활을 이어간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또 다른 연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기도 갖는다. 하지만 고래 힘줄보다 더 질긴 인연이 그들을 찾아온다. 나우칼판 감옥에서 그를 괴롭혔던 간수들이었다. 결국 강경준은 그녀를 잃고 그녀의 언니와 함께 반란군에 합세한다. 그와 함께 하는 여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터인데...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어온 미국은 과연 평등한 국가일까?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언급했을 때 그는 백인국인 벨기에의 권리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이나 제3세계의 유색인종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불굴의 백인우월주의자’였던 그는 각료회의에서 ‘검둥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뱉었으며, 흑인에게 주어졌던 관리직마저 빼앗았다. 미합중국이 정착한 해는 언젠가? 미국 역사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당연히 1620년이라 답할 것이다. 백인들이 인디언을 몰살시키고 정착했던 버지니아 지역의 역사는 지워버리고, 평화적 정착에 성공한 뉴잉글랜드 지방을 최초 정착지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천연두 등 악성 전염병이 신대륙에 번져 면역력이 전혀 없는 인디언들이 힘없이 죽어감에도, 백인 식자층들은 이러한 천연두 같은 역병을 두고 야만인 제거를 위한 ‘신의 놀라운 기적이자 은총’이라고 했다. 콜럼버스 일행이 도착했을 무렵 아메리카 대륙에는 적게는 800만, 많게는 1,600만 정도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수백 개의 부족국가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그중에서 멕시코에 터를 잡은 마야와 아즈테카, 페루 지역에 터를 잡은 잉카족은 그 당시 유럽 문명과 궤를 달리하였을 뿐, 지구상 그 어떤 민족보다 훌륭한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대륙의 정복자들은 진보와 문명의 이름으로 불과 십여 년 만에 절반 이상의 원주민을 학살하고 말았다." (본문 중에서)


소설은 짧지만 서사는 거대하다. 멕시코 중부와 하부를 관통하며, 영어(囹圄)의 몸에서 멕시코의 국민 영웅까지. 그와 함께 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 그중에서도 여자의 목숨으로 살아간 사람. 결국엔 나라를 위해 그 목숨을 가차 없이 내던진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다루는 데 전혀 거침이 없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이 활극에는 사랑과 배신, 증오와 용서, 기쁨과 슬픔, 의문과 깨달음, 혁명과 영웅 등 인간이라는 대서사시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있다.


거침없는 와중에도 곳곳에 서정적인 울림이 있는 건 작가가 시인이기도 하겠지만 멕시코 특유의 이성적이지만은 않은, 충실하게 감정적인 느낌과 일맥상통하는 감정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서사의 품에서 참으로 많은 에피소드들이 혼란스러운 듯 일정하게 진행되는 건 읽는 이에게 축복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헤쳐 나가는 강경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구원과 멕시코 역사의 질곡을 짚어볼 수 있다. 


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 - 10점
구광렬 지음/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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