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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책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하다 <독서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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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독서인간>



<독서인간> 표지 ⓒ알마


8살, 초등학교 1학년, 한글은 물론이고 영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런데 영어는 고사하고 한글도 제대로 못 띄었다. 국어가 제일 어려웠고 제일 싫었다. 그 때문인지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책읽기에서 '발전'이라는 걸 거듭하고 있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원해서 책을 읽었고, 이후 20년 가까이 책과 떨어지지 않았다. 책과 함께 하는 직업을 원했고, 그 꿈을 이루었다. 오랜만에 보게 된 친구들은 정녕 놀라움을 금치 못하곤 한다. 다름 아닌 나의 이야기다. 


글과 가장 먼 아이였던 내가 책과 가장 가까운 직업을 가져서 책으로 먹고 살고 있다니 아이러니다. 이 아이러니를 풀 수 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로 내가 '글'이 아닌 '책'에 관심이 있고 좋아했기 때문이다. 책 읽기 보다 책 사기를 좋아했다. 맛보는 걸 제외하고 책을 보고 책을 만지고 책의 종이 냄새를 맡고 책 넘기는 소리를 듣는 걸 좋아한다고 하면, 조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까? 그런데 그게 사실이다. 


'책벌레'라는 말 들어보셨는지? <독서인간>(알마)에 따르면 거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현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벌레가 되었지만, 이 벌레는 책을 즐겨 갉아먹는다. 전분과 섬유를 매우 좋아하는데, 현대 서적에 사용되는 종이에는 전분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섬유질도 많지 않다. 


다른 하나는 벌레가 아닌 사람이다. 병적으로 책을 좋아하며 책에 빠진 사람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다시 두 가지 책벌레가 있는데, 보통 책벌레와 애서광이다. 보통 책벌레는 순수한 마음으로 책을 대하면서 내면에서 우러난 이성적인 사랑을 보내는 반면, 애서광은 독서 자체에는 흥미가 없고 책에 강렬한 점유욕을 보인다. 나는 애서광에 가까운 듯하다. 


<독서인간>은 위에서 이야기한 책벌레를 비롯해 책과 독서에 관한 25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국 태생의 이 책은 젊은 책벌레인 저자의 작품이다. 왜 전 세계적인 출판 불황에 하필 책과 독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일까. 나 같은 사람 좋으라고? 일단 그 점에서는 성공한 듯하다. 벌써 몇 번이나 들춰보면서 감탄을 지어내고 환호 아닌 환호를 질렀으니까. 아니면 책이 사라지기 전에 정리를 하는 차원에서? 그런 거라면 논문으로 수십, 수백 편이 나와 있을 테다. 그러면 남은 건 한 가지다. '책의 위기' 시대에 책을 재조명함으로써 책에게로 시선을 끌어오기 위해서. 그런 면에서 이 책은 가치가 있고, 읽어야 한다. 


인터넷이 나오고 결정적으로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사실상 전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 전 세계 사람들은 전 세계의 정보를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이상 책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얻을 이유가 없어졌다. 더 저렴하게 더 신속하게 더 정확하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방편이 있는데 굳이 책을 통해 힘들 게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로 하여금 책의 내용으로 어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독서인간>의 전략은 다르다. 제목에 '독서'가 들어가 있는 게 조금 걸린다. 사실 이 책의 진짜 제목은 '도서인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공교롭게도 책을 읽으라고 하지 않는다. 이 책의 위기 시대에 나오는 많은 '책 부흥' 책과는 다르게 말이다. 대신 책 자체에 대해 말한다. 문화적, 정신적, 물질적인 측면에서 그야말로 책의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어느 작가가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봐야 하겠다. 그 역시 책을 많이 봤다. 그런데 그가 책을 대하는 태도는 나와 정반대였다. 그는 '책'이라는 물질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책을 이루고 있는 '글'이 중요했다. 그 글만 있다면 책 쪼가리던, 간단한 메모지던 상관없었다. 단적인 예로, 아주 두껍고 질 좋은 책이라도 거기서 원하는 한 줄만 빼내면 더이상 쓸모가 없었다. 그런 사람은 <독서인간> 같은 책을 쓸 수도 없을 테고, 이 책이야말로 아무 쓸모 없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책에 얽힌 사연 하나 쯤은 있지 않겠는가. 책을 사랑하고 동경했던 마음이 있었겠지 않겠는가. 지금도 가슴 깊이 어디 쯤엔가 그런 마음이 자리 잡고 있지 않겠는가. 나에게 그 첫 시작은 다름 아닌 '위인전'과 '위인 사전'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수십 권의 위인전이 일렬로 책장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집으로 와서 동생과 합세해 부모님께 졸랐고 곧 우리집에도 위인전 세트가 생겼다. 동생과 경쟁하듯 순식간에 위인들의 삶을 훑었다. 그들의 삶을 동경하고 책을 동경하고 역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흔한 사연이지만, 내 삶에서는 크게 작용한 걸 부인할 수 없다. 


<독서인간>은 나와 책의 오랜 동거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보상을 받은 느낌까지 들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나와 같은 느낌을 들었으면 좋겠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만나고 싶다. 그리고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게 했다. 신비롭고 경이롭고 아름다운 책의 세계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나는 책에 관한 바람이 있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정확히 '글'이 아닌 '책'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지만, 글과 책은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글과 책으로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책에 글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전자책이라는 개념이 나오기 전까지 책이란 종이를 묶어 맨 물건이라는 뜻이고, 또 글 아니면 그림으로 표현해 적거나 인쇄하여 묶어 놓은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글과 책은 한 몸이라고. 


이 책, 책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는 이 책 <독서인간>. 책의 위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책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감당하면서 이런 책을 내준 점에 대해서 아낌 없는 박수를 보낸다. 역사상 많은 책벌레들이 죽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책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 생전 책과 헤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비교할 수 없는 슬픔의 강도가 우리를 덮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고맙다. 많은 분들이 이 슬픔에 동참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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