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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억울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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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표지 ⓒ아시아



평소 왕래를 않던 어머니가 칠백만 원 사채 때문에 도움을 청하자 권순찬 씨는 있는 돈 없는 돈을 모아 대신 갚아줍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어머니도 여기저기 돈을 모아 갚았다는 거예요. 그러고는 목숨을 끊고 말았고요. 그 사채꾼은 천 사백만 원을 챙긴 거죠. 어느 날, 권순찬 씨는 그 사채꾼이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와서 자리를 깝니다. 사채꾼을 상대로 일인 피켓 시위를 시작한 거죠. 


이 아파트 단지는 지은 지 이십오 년이 넘었어요. 아주 낡은 아파트인 거죠. 주민들은 참 착해요. 가난해도 서로를 챙기고 항상 안부를 묻지요. 권순찬 씨에게도 마찬가지예요. 그의 계속되는 시위에 주민들은 김치를 가져다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취업을 알선해주기도 해요. 급기야 십시일반 돈을 모아 칠백만 원을 만들어 가져다 주죠. 여기서 갈등이 발생해요. 


눈앞에 억울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기호 소설가의 짧은 이야기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은 여전한 이야기꾼 이기호 특유의 색채가 살아 있는 소설입니다. 그는 그야말로 굴지의 웃긴 이야기꾼이에요. 그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정말 '낄낄거리며' 웃게 되죠. 결이 조금 다를 수도 있겠는데, 영화 감독 장진이 생각나더군요. 이야기 그리고 유머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이 소설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려 했을까요. 개인적인 이유로 피켓 시위를 하는 권순찬 씨와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채꾼 김석만, 권순찬 씨를 가엽게 여겨 도와주려는 주민들, 그리고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져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는 교수이자 작가인 나. 짧은 소설에 적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이기호 소설가라면 기대감이 충만합니다.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칠백만 원을 권순찬 씨에게 건넸을 때 권순찬 씨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몇 개월 동안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한 채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 사채꾼을 상대하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성가시다고 쫓아내지는 않고 오히려 진심을 다해 도와주려는 주민의 마음이 얼마나 고맙겠어요. 받아야 마땅하지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권순찬 씨는 받지 않아요. 일거에 거절해요. 답답할 노릇이죠. 착한 사람들이기에 눈앞의 어려움을 그냥 넘어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도와줬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다고 사채꾼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사채꾼이 산다는 103동 502호에는 사채꾼의 어머니만 있다고 하는데, 그 분이 폐지를 줍고 사는 형편이라고 해요. 그런데 아들 녀석 때문에 밖에 나오질 못하는 거죠. 아들 녀석하고는 연락이 끊긴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안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에요. 


만약에 우리 아파트, 또는 우리 동네에 권순찬 씨와 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이 와서 다짜고짜 진을 쳤다고 생각해 봅시다. 상대는 몇 개월 동안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요. 몇 년 전부터 보이질 않았으니 앞으로도 보지 못하겠죠. 가여워서 도와주고는 이제 그만할 것을 중용 했어요. 그런데 거절 당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더욱이 주민 중 한 사람이 생계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보고 있고, 알게 모르게 주민들도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이에요. 


저라면 어떻게 하든 그 사람을, 권순찬 씨를 쫓아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착하지 않고, 남들이 뭐하든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쫓아내려 하지 않을 거예요. 누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만 낡은 아파트가 아니라 강남의 초호화 아파트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지요. 이미지에 타격을 입어 집값이 떨어지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요. 


애꿎은 사람들끼리 싸우는, 웃지 못할 우리네 모습


문제는 '착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가난하지만 이기적이지 않아 남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네 사회를 지탱하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죠.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권순찬 씨를 보살펴줄 수는 없어요. 평화롭고 조용한, 거의 유일한 이점만 가지고 있는 동네인데 이런 평지풍파라뇨.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죠.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으로, 결국 주민들은 권순찬 씨를 쫓아내고 말아요. 정말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어요. 정작 당사자는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애꿎은 이들끼리 싸운 꼴이잖아요. 


2014년, 작년이죠. 4월에 세월호가 침몰했어요. 사측의 명백한 범죄였죠. 그리고 제대로 대응하고 수습하지 못한 정부의 잘못도 컸어요. 그런데 싸움은 애꿎은 사람들끼리 하더군요. 유가족들, 피해당사자들이 시위를 하는 게 못마땅했나 봐요. 많은 이들이 그들을 비난하고 나섰어요. 소설에서 처럼 착한 사람들이 아니죠. 그렇지만 당사자가 아닌 애꿎은 사람들끼리 싸운 건 똑같아요. 중요한 게 바로 이 점이죠. 애꿎은 사람들한테 화내고, 애꿎은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 다름 아닌 우리네 모습이에요. 


강자라고 해야 할까요, 악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강자이자 악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는, 또는 그들은 왜 나타나지 않을까요. 왜 애꿎은 사람들끼리 싸우는 걸까요. 누군가는 강자이자 악인을 대신해서 싸울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사실도 모르는 채 싸우고 있을 거예요. 훗날에 깨닫겠죠.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면 무관심이 답일까요?


현대 사회에서 제일 가는 악(惡)이 다름 아닌 '무관심'일 거예요. 어느 곳이든 불통의 시대를 외치는 마당에 무관심은 최악인 거죠. 그런데 관심과 소통의 결과가 이런 식이라면 어처구니 없어 지죠.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밖에 설명이 안 돼요.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 부분에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개인과 사회의 소통, 관심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이요. 말하자면 '구조적' 차원이 아닐까요.


이 너머까지 다룰 성질의 소설은 아니지만, '계급 구조'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려 하는 것처럼 보여요. 강자와 약자의 계급 구조가 곧 악인과 선인의 이분법적 구조까지 집어삼키게 되는 때에 직면하면 답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소설 속 화자는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옮겨요.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시달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그가 말이죠. 그로 하여금 글을 쓸 수밖에 없게끔, 그래서 사람들에게 전말을 알려주고 싶게끔 했어요. 안 그러면 이 사건에서 나쁜 놈은 보이지 않고 끝나버려요. 그는 기어코 나쁜 놈을 출현 시켜야 해요. 착한 사람들, 애꿎은 사람들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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