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 읽기]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 표지 ⓒ이야기공작소
한국 근현대사는 참 재미있는 것 같다. 마치 삼국지처럼 대단한 인물들이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낭만과 격이 다른 처절함으로 시대를 창조하고 해체하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리라. 그 풍부하고 다양한 이야기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박진감를 선사해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이면에는 '나와는 동떨어진' 그러나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이야기의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마냥 편안하게 그리고 재밌게 접할 수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겠다. 그 박진감을 마냥 재미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재밌겠는가? 그들끼리 치고박고 죽고죽이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야기들. 그들만의 이야기들. 난 3자의 자세로 보고 즐기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또는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을 것 같다면 말은 달라진다. 특히 그 이야기가 극악무도하고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치가 떨리는 내용이라면,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게 된다. 배워야 하고 깨우쳐야 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재미, 감동, 분노, 슬픔이 모두 있는 평전 아닌 소설
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이야기공작소)는 그 경계선에 있다. '민주화운동의 대부'라는 별칭이 달릴 정도의 인물인 故 김근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평전이 아닌 '소설'이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김근태의 어릴 적, 의외로 학생 운동에 거리가 멀었던 학창 시절, 그리고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진 대학생 이후의 이야기까지. 소설은 위에서 말한 두 대척점을 오고 간다. 결과는 대성공. 시종일관 재미도 있고 그를 넘어서는 감동, 분노, 슬픔도 있었다.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
이 소설은 어떻게 두 가지를 모두 섭렵할 수 있었을까? 소설적 재미를 잃지 않으려고 장치를 삽입하면서도, 철저히 사실에 근거한 전개를 기반으로 소설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분명 김근태라고 하는 사람은 인터넷만 쳐봐도 그 일생을 대략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작가는 모험 아닌 모험을 시도한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철저히 장치를 넣었다고 봐야 하겠다.
소설은 김근태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작가가 어지간하게 김근태를 연구하고 그 시대를 연구하고 사람을 연구하고 사상을 연구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행인건지 필연인건지, 작가 방현석은 일찍이 1980년대 노동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였다. 김근태 그리고 그 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소설가인 것이다.
그러면서 소설이 진행되는 중간 중간에 두 가지의 장치를 해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미시적 장면이다. 소설의 큰 줄기가 한국 근현대사 통사라고 본다면, 김근태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장면 장면들은 소설가가 지은 것이다. 이 장면들 중 어느 장면은 유독 소설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데, 아마도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나 싶다.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대하소설 같다는 느낌도 든다.
김근태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하나는 소설가가 만든 장면 뒤에 따라 오는 인터뷰 형식의 증언들이다. 일종의 증거라고 할까. 이 소설은 100% 사실에 기반해서 지어졌다고 항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 인터뷰들이 적절하게 잘 들어가 있고, 그래서 믿음과 생생함을 더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재미와 함께 또 다른 걸 전해줄 수 있게 되었다.
그 인터뷰를 볼 때마다 소설 속에서 현실로 나왔고, 현실이 그때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인지하고는 치가 떨리곤 했다. 그건 소설가가 자신을 버리고 완벽히 김근태에 빙의 되어 나를 당대로 데려갔다가 현실로 데려오곤 하는 걸 계속 반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것에는 김근태라는 인물이 있다. 그 덕분에 가능했다. 그의 이유 있는 의식의 전환이, 이후 보여주는 그 지난하지만 고귀하기까지 한 여정이, 그리고는 오금이 찌릿찌릿 저리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정도의 고문에도(글로 느끼는 치명적인 상상이란...) 끝내 굴복하지 않은 인간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토록 끈적끈적하고 음습한 시대를 단백한 모습으로 헤쳐나오지 않았나.
당분간 쉬이 빠져나오지 못한 터널에 들어선 기분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김근태가, 그가 살았던 그 시대가, 그리고 이 소설이 그러하다. 내가 살고 있는, 앞으로 살아갈 이 시대는 어떠한가? 끈적끈적하지는 않고 더 음습해지기만 하지 않았나? 메마르고 음습한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헤쳐나가야 할까. 외려 내가 끈적끈적해져야 할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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