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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대한민국의 탄생은, 반공산주의이자 반자본주의 하에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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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표지 ⓒ 역사비평사



대한민국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너무나 당연하게 상식화 된 사실 아닌 '사실'이 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 즉, 친미와 반공의 기치 아래에서 세워졌다는 것. 새삼스레 이 '사실'에 대해서 왈가왈부 논할 수도 없이 되어버린 상식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미개하기 그지없는 미생물조차 그 탄생을 궁금해 하고,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연구 결과도 뒤짚어 생각해 보건만, 한 나라 탄생의 진짜 모습을 궁금해 하고 계속 연구하는 건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대한민국에서, 구체적으로 대한민국의 탄생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성역'을 건드려 제대로 규명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자료도 많지 않을 뿐더러, 해방 후의 그 복잡미묘한 관계를 제대로 설정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그런 한계들을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해방 후의 '잃어버린 8년'을 규명한 책이 나왔다. 일본인 후지이 다케시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쓴 <파시즘와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역사비평사)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해방 후 8년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다루지 않았던 혹은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다루며 실증적으로 그 시대를 규명했다. 그 한가운데 있는 존재가 '족청계'로, 이는 청산리전투로 유명한 이범석이 만든 '조선민족청년단'을 뿌리로 두고 있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반미를 내세우며, 초기 이승만 정권의 즉 대한민국 정부 초기를 이끌어 가다시피 한 이 세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책의 부제가 '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 8년사'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족청계'는 책의 주제이자, 대한민국의 초기 역사를 아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민족청년단을 재조명하면서, 대한민국 초기의 전체적인 지형도를 재발견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범석과 조선민족청년단의 재발견


청산리대첩하면 누가 생각나는가? 김좌진과 홍범도일 것이다. 이범석이라는 인물도 빼놓을 수 없다. 김좌진을 도와 제2제대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그렇다면 이범석하면 무엇이 떠오를지? 광복군이 떠오르며 국내 진공을 위해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한 독수리 계획이 떠오르며, 민족주의자가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책에서는 이범석이 단순한 민족주의를 넘어서, 파시즘에 그의 사상의 기초가 있다고 말한다. 광복군의 초기와 이범석이 1946년 10월에 결성한 '조선민족청년단'의 기치가 '민족지상 국가지상'인데, 이는 1938년 파시즘적인 경향이 강화된 중국의 장제스가 발표한 '항전 건국 1주년을 기념하여 전국 군민에게 알리는 글'에서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구호는 중앙훈련단의 필독서로 지정되었는데, 이범석은 그 훈련단 출신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범석과 조선민족청년단은 파시즘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 되는데, 조선민족청년단 출신이 대한민국 초기에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는 함으로써 대한민국 초기는 파시즘적 성향을 띠게 되는 것인가? 저자는 어느 정도 그런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중국 장제스의 경우와 같이 세계 2차대전 때, 많은 국가들에서 파시즘과 결합한 민족저항주의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아니,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족청계의 '일민주의'와 대한민국 초기


대한민국 초기 이승만 정권의 핵심 지도이념이라 불리는 '일민주의'란 무엇인가? 이 이념은 족청계의 주된 이념이기도 하였는데, 이를 가장 정력적으로 설파한 사람은 철학자 안호상이라 한다. 그의 사상은 나치즘과의 관련이 지적되곤 한다.(67쪽) 또한 족청계 이념의 특징은 반공적이면서도 반제국지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이라는 점인데, 그런 측면을 대표하는 인물은 양우정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일민주의를 통해 족청 세력과 결함해 족청계의 중심 인사가 되었다.(76쪽)


저자는 일민주의가 이승만의 여당 조직 공작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며, 그를 영도자로 하는 여당인 대한민국당이 채택한 정강을 통해 일민주의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민족은 하나여야 한다는 이념하에 민족 내부의 분열을 없애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일민주의의 위상은 공보처에서 발행하는『주보』4월 20일호에 실린 이승만의「일민주의란 무엇?-헤치면 죽고, 뭉치면 산다」를 통해 분명해졌다. (중략) 이승만이 이글에서 "나는 일민주의를 제창하여 이로서 신흥 국가의 국시를 만들고저 한다"라고 했듯이 이제 일민주의가 당시 수준을 넘어 국시로 등장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227쪽)


일민주의는 공산주의를 지양하고, 좌익들을 포섭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지양하며 제국주의까지 비판하는 그런 사상이었다. <이 대통령 건국 정치 이념>의 시작을 보면 일민주의의 주요 이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병들고 공산주의에 독된 세계와 인류가 세계와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고 새 세계를 건설할려고 하는 의욕이 날로 높아져가는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을 고한 이후에 있어서 동방의 하늘에는 여태 구름 속에 파묻혀 있던 한낱의 거대한 샛별이 구름을 헤치고 요요히 빛나고 있다."(238쪽)


분단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에서는 족청 인사들이 33명 당선되어 국회로 진출했다고 미군정은 보고 있었다. 그들의 정치노선은 어떠했을까? 족청 간판을 내걸고 출마한 홍희종의 주장을 보며 그 일말을 엿볼 수 있겠다. 남북통일과 국방군 언급이 눈에 띈다.


1. 삼팔선을 철폐하고 남북통일을 촉진할 것

2. 통화를 정리하고 저물가 정책을 수립하야 국민 생활의 안정을 기할 것

3. 종합적 누진세제를 창설하고 중소 국민의 부담을 경감할 것

4. 토지의 소유를 극도로 제한하고 농민본위의 균등권을 확립할 것

5. 국방군을 급속 편성할 것  

(187쪽)


이들 족청 인사들은 정부에도 진출한다. 대표적으로 이범석은 국무총리 및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안호상은 문교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이범석은 국무총리로서는 특별한 업무를 하지 않고 단지 대통령을 보좌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방부 장관으로서는 분명한 방침을 내세운다. '반공 군대' 건설이 그것이다.(200쪽) 그가 생각한 반공 군대의 모델은 중국 국민혁명군이었는데, 이를 위해 이범석은 정치국을 설치하여 공산당의 활동을 봉쇄하기 위한 정치 교육을 실시하고자 한다. 


문교부 장관이 된 안호상이 내세운 방침은 '민주적 민족 교육'이었다.(206쪽) 이는 자본주의적도 아니고 제국주의적도 아니고 공산주의적도 아니고 팟쇼주의적도 아니고 민주주의적인 민족 교육으로, 민족을 강조하고 있다. 


족청계의 활동과 몰락


족청(조선민족청년단)은 이승만 정부의 청년단 통합 움직임에 맞서 1949년 1월 해산한 바 있다. 하지만 6·25 전쟁이 터지며 족청계는 국회에서 활발이 움직였고 1951년 주중 대사로 타이페이에 있었던 이범석이 귀국한다. 이때 이승만은 민국당에 맞서 대통령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정당을 만들고 헌법을 개정하려 하는데, 결국 12월에 일민주의를 내세운 '(원외)자유당'이 발족된다. 이범석은 부당수로 추대된다. 자유당이 발표한 임시부서의 명단을 보면 족청계 인사가 상당수 보인다. 비록 그 이념이 일민주의에서 협동주의로 대체되었지만 말이다. 


이후 족청계의 운명은 '부산정치파동'에서 크게 요동친다. 1950년 5 ·30일 선거 결과, 야당이 압승하여 대통령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1951년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이듬해 국회가 이를 부결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정부와 국회간의 알력이 시작되고 만다. 이승만은 "후방 지역 내에 반거하는 공비를 완전 소탕하고 반국가적 공산 세력의 침투를 완전 봉쇄하여 급속한 후방 치안을 확보하기"위해(369쪽) 부산을 중심으로 23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해산을 강행하려 한다. 이를 계기로 부통령 김성수는 사임하고, 7월에는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안을 발췌 ·혼합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어 이승만 독재정권의 기반이 굳어지고 만다. 


이에 정력적으로 앞장선 원외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을, 부통령 후보로 이범석을 추대한다.(403쪽) 하지만 다양한 세력들이 이범석을 낙선시키려 한다. 이는 이범석의 당선을 우려한 미국의 공작에 의해서였다. 미국은 이범석이 "반미는 아니지만 민주적인 사고나 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미국과의 협조가 어려운 인물임을 지적하며 그의 부각을 못마땅해 했다. 결국 이범석은 부통령에서 낙선하고 만다. 


이후 이승만은 자유당에서 족청계의 입지를 좁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거의 배제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족청계의 반발은 여전했고, 이승만의 마음은 족청계 제거로 기운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난 후 1953년 9월, 이승만의 족청계 제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자유당 내에 통일정신이 미약하게 되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위한 부분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족청계에게는 흉악한 이미지가 들씌어진다. 나치즘이나 파시즘, 반민주 등의 모습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미국이라는 당시 냉전체제의 한 축이 자리잡고 있었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에서 "반제, 반공, 반자본주의인 민족주의"가 설 자리는 없었다. 


해방 8년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족청계는 이승만 정권의 초기, 정부 요직을 독차지하며 주요 이념을 제창하고 정치 지형도의 많은 축을 담당했다. 그 사상의 뿌리는 1930년도 자본주의의 위기(세계 대공황)에서 확산된 파시즘에 있었는데, 몰락이 냉전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한 1950년대라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할 점이다. 즉,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다.(459쪽) 또한 이들의 사상은 제3세계주의적이기도 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들의(족청계) 사상은 파시즘의 자장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지만, 주변부에서 발현된 모습은 제3세계주의적인 것이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파시즘이 패배한 1945년 이후에, 그리고 세계적으로 제3세계주의가 발흥하는 1960년대 이전에 활동한 그들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 위치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459쪽)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해방 8년의 모습은 고스란히 족청계의 활동과 몰락으로 귀결된다. 건국과 함께 정부 요직에서 반제국, 반공산, 반자본 기치를 내건 일민주의를 내걸고 1953년 몰락할 때까지 8년 동안 남한 체제의 내부에 깊숙이 개입한다. 여기서 저자의 말을 들어본다. 족청계의 사상이 '민족주의적'이었으며 '포퓰리즘적인 대중민주주의'에 가깝다는 사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의 몰락은 역사적 전환기였던 '해방 8년의 종언, 즉 냉전이 남한 체제 내부에까지 관철되면서 대중이 직접 정치적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소멸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19쪽)


이 말에서 '해방 8년'의 진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해방 8년 간의 대한민국은 냉전에 의해 절대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다는 것. 기사의 초반에 말했던 '사실'인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 즉, 친미와 반공의 기치 아래에서 세워졌다"는 해방 8년의 가짜 모습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승만이 아닌 이범석이, 조선민족청년단의 족청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 사상의 뿌리가 파시즘이었다고 해도, 아직 국가의 틀이 확실히 잡히지 않은 다분히 유동적이던 그 시대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성격으로 지어진 이 책으로 해방 이후 휴전까지의 8년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진짜 역사는 지금의 시각이 아닌 그 당시의 시각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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