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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스틸 앨리스> 그녀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도 연기는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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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스틸 앨리스>



영화 <스틸 앨리스> 포스터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알츠하이머병. 각종 콘텐츠의 단골 손님이다. 2004년 정우성, 손예진 주연의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같은 해 같은 달에 개봉해 진검 승부를 벌였던 영화 <노트북>, 2013년 김영하 작가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그리고 작년 2014년 장예모와 공리의 재결합 <5일의 마중>까지. 이 밖에도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만큼 '기억의 소멸'은 그 자체로도 깊은 슬픔을 안겨준다. 


알츠하이머병 못지 않게 루게릭병 또한 단골 손님인데, 알츠하이머병이 정신적으로 기억이 쇠퇴해 소멸되어 가는 거라면 루게릭병은 육체적으로 세포가 쇠퇴해 소멸해 가는 것이다. 20세기 공전의 베스트셀러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대표적이다. 이 병이 무서운 건 거의 무조건 사망에 이른 다는 점이다. 


'기억의 소멸'과 '육체의 소멸'. 우열을 가릴 수 없겠지만, 인간으로서 기억의 소멸이 더욱 치명적일 것 같다. 내가 더 이상 나일 수 없다는 게 너무 끔찍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딱히 어떤 고통이 수반되지 않으니 당사자한테는 괜찮을까? 영화 <스틸 앨리스>가 그리는 알츠하이머병은 어떨까. 


과장되지 않게 편하면서도 빛나는 연기


앨리스(줄리안 무어 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언어학자이자 자그마치 콜럼비아 대학교 교수이다. 그녀는 이제 50대에 진입해 그야말로 절정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찾아온 불행. 다름 아닌 희귀성 알츠하이머병. 누구보다도 똑똑한 언어학자가 서서히 언어를 잃어버리게 된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지만 받아들여야 하고, 그녀는 미래의 '나' 한테 메시지를 남겨 자살을 중용한다. 


그녀에겐 듬직한 남편과 4 남매가 있지만, 일찍이 10대 때 보낸 엄마와 여동생이 그립다. 그 기억이 그녀를 지탱해주는 힘이다. 한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지워버렸다. 그는 알콜 중독으로 죽었다. 앨리스와는 달리 일찍 아내와 딸을 보내고 남은 세월을 술에 의지했을 것이다. 기억의 파편들이 그녀를 괴롭힌다. 



영화 <스틸 앨리스>의 한 장면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영화는 주인공 앨리스 역을 맡은 줄리안 무어에 의해 흘러간다.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를 모두 석권하고 아카데미까지 접수한 그녀, 작년 말에 개봉한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줄리엣 비노쉬'를 생각나게 한다. 명성이나 실력으로 영화를 거의 혼자 이끌고 가다시피 하는 원톱 여자 배우로서, 과장되지 않게 편하면서도 빛나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의 옆에 있던 '크리스틴 스튜어트'. 그녀는 <트와일라잇> 시리즈 등으로 2013년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탈 때와는 너무나 다른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1990년 생의 현재 할리우드의 제일 핫한 여배우인 그녀가, 마치 지난 날의 방종을 뉘우치고 다시 태어나고자 대배우들에게 사사받는 느낌인 것이다. 그녀의 행보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어


한편 앨리스는 알츠하이머병 확진이라는 믿기 힘든 사실에 더해 그녀가 앓는 병이 희귀하게도 가족력이 있어 자식들과 그 자식들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또다시 좌절한다. 자식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자신을 힐책한다. 바보가 되어가는 것도 모자라 직접적인 피해까지 주다니. 남편에게는 이런 말도 서슴지 않는다.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부끄럽지는 않잖아."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언어 능력이 쇠퇴하는 도중 담당 의사의 주선으로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대신해 연설을 하기도 한다. 길지 않은 원고를 작성하는 데만 3일이 걸렸다는 그녀. 아마 이 작업은 그녀가 그녀일 수 있을 때 할 수 있었던 최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 연설은 영화의 끝에 나옴 직 하지만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 



영화 <스틸 앨리스>의 한 장면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연기, 그리고 연기


영화에서 앨리스는 크게 보아 3단 변신을 한다. 초반의 똑똑하고 지적인 언어학자이자 교수로서의 모습. 중반의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이 쇠퇴하고 스스로를 컨트롤 할 수 없게 되어 가는 모습. 후반의 모든 기억을 잃고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완연한 환자의 모습. 표정과 행동, 무엇보다 눈빛의 변화가 완벽하다. 


한편 100분의 짧은 듯한 러닝 타임이 조금 애매했다. 의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앨리스의 알츠하이머병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지나치듯 말하는 대사로 유추할 뿐이었다. 대략 몇 년의 시간이 지난 걸로 나오는 데, 체감 상 몇 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듯하다. 영화 자체가 너무 연기와 분위기에 치우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놓친 혹은 포기한 부분이리라. 


영화는 반전 없이 예상한 대로 흘러간다. 앨리스는 점차 기억을 잃어 가면서도 옛날 엄마와 여동생이 살아 있을 때는 거의 끝까지 잊지 않는다. 오랫동안 남편(알렉 본드윈 분)이 그녀를 간호해 왔지만 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되었고 그 자리를 막내 딸 리디아(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이 대신한다. 그녀는 엄마 앨리스가 제일 걱정하고 또 제일 못 미더운 딸이었는데, 아이러니다. 


사랑, 그리고 가족


이 영화는 결국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최고의 언어학자지만 다른 무엇보다 사랑한 가족들의 기억을 끝까지 끌어안고자 했다. 사랑하는 가족들만이 끝까지 그녀가 그녀일 수 있게 해주었으며, 끝까지 옆을 지켰다. 그녀는 기억을 모두 잃고 서도 '사랑'을 느꼈을까? 리디아는 앨리스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글을 읽어준다. 그리고 앨리스에게 묻는다. 이 글이 무엇에 대한 것이냐고. 앨리스는 답한다. '사랑'. 모든 걸 잊어도 사랑은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앨리스의 연설 중 한 소절을 전해드리고자 한다. 영화에서는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중 한 부분이 위에서 말한 '차라리 암이었으면 좋겠어.'이고 다른 한 부분이 바로 이 연설이다. 


"우린 우스꽝스럽고, 무능하고, 웃겨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병일 뿐이지요. 저는 살아 있습니다. 사는 동안 하고 싶은 일도 있습니다. 저는 아직 인생에 행복한 날들과 즐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억은 사라질 거예요. 내일이면 잊을지 몰라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제게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에 매료되어 굉장히 열정적이었던 옛날의 제 자신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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