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83일-어느 방사선 피폭 환자 치료의 기록>
<83일>-어느 방사선 피폭 환자 치료의 기록 ⓒ뿌리와이파리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 지진과 쓰나미가 대비할 수는 있지만 원천적으로 막을 수 없는 자연에 의한 자연 재해라면, 원전 사고는 그야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인간에 의한 인재이다. 그래서 분노가 치밀고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더욱이 원전 사고는 절대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방사능 피폭의 직격탄을 맞는 후쿠시마현은 거의 유령 마을과 다름없게 되어 버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었으며, 아직까지 타지역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대지진과 쓰나미 때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원전 사고에 의한 방사능 피폭 때문이었다. 방사능 피폭은 무엇을 의미할까? 한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방사능 피폭의 위력이라면 일개 개인에게는 죽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2011년 대규모 방사능 피폭을 당한 이웃나라 일본은 이미 20세기 말인 1999년에 일본을 떠들썩 하게 했던 방사능 피폭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곳이 도쿄에서 북동쪽으로 약 22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면, 1999년 방사능 피폭 사건은 도쿄에서 북동쪽으로 1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 이바라키 현 도카이무라 'JCO 도카이 사업소'에서 핵연료 가공 작업을 하던 불과 서른다섯 살의 남자 오우치가 대량 중성자선에 피폭당했다. 피폭량은 일반 사람이 1년에 받을 수 있는 방사능 량의 2만 배에 달했다. 일본에서 최초로 일어났던 방사능 피폭 임계 사고였다.
피폭 환자의 치열한 사투를 담다
책 <83일-어느 방사선 피폭 환자 치료의 기록>(뿌리와이파리)은 1999년 당시 오우치가 피폭 당한 후 83일 간 병원에서의 치열한 사투를 담은 2001년의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옮긴 것이다. 다른 그 어떤 콘텐츠보다 원전 사고와 방사능 피폭에 관해 훨씬 더 경각심을 일으키게 할 만하다. 그만큼 피폭 당했던 오우치와 그를 치료하고자 했던 의료진들의 사투가 끔찍했고 지난 했으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책은 그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수많은 사람이 방사능 피폭을 당해 죽고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간다는 통계적 전달보다 단 한 사람에 집중해 최선을 다해 치료하고 살고자 하지만 결국은 죽어갈 수 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강렬하다.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시각각 파괴되어 가는 몸과 정신, 그리고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몸의 상태. 그 앞에서 어느 누군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방사능 피폭 환자 오우치는 이틀째만 해도 멀쩡하게 보였다. 농담도 할 수 있을 만큼. 그냥 여기저기가 조금 아플 뿐이었다. 직접적으로 피폭을 당한 오른팔 정도. 그러던 그의 상태가 며칠이 지나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게 되었고,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의식이 사라졌고, 염색체가 산산이 부숴져 내장도 혈액도 피부도 되살아나지 않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부디 편히 쉬세요.
여동생의 조혈모세포를 이식해 희망이 생기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유전자가 파괴되어 버렸다. 방사능에 의한 잇따른 장애, 한번 장애가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신체가 된 오우치, 그리고 결국 심장이 멈추고 만다. 겨우 겨우 심장을 다시 뛰게 했지만, 그로 인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갔다. 국내외에서 아직 상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한 온갖 약물까지 투여해 목숨만 부지해 놓은 상태가 되고 만다.
여기서 간호사와 의사들은 어쩔 수 없는 의문이 들고 만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고통스러운 치료를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 어느 누가 보아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전혀 없는 이 환자를 왜 붙잡아 놓고 있어야 하는가. 이것이 정녕 환자를 위한 것인가. 이런 딜레마는 오우치를 치료했던 모든 의료진의 숙제이자 숙명이었다.
결국 피폭 당한지 83일만에 오우치는 심장이 멈추고 말았다. 그런 그를 보며 의료진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오우치씨,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부디 편히 쉬세요."라고 말한다. 종교적이기까지 한 이 말은, 방사능 피폭의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는 아주 통렬한 말이다.
남의 일도, 오래전 이야기도 아닌 원전 사고
그런 와중에 우리나라는 현재 23기의 원전을 가동하고 있고 11기의 원전을 더 지어 올리고 있다. 규모로는 세계 5위지만, 단위 면적당 용량은 세계 1위에 빛난다. 또한 설계 수명을 다한 월성 원전 1호기의 수명을 연장하는 위험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고리 원전과 월성 원전 주변에는 족히 500만 명은 될 만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주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일어난 그런 일들을 보고도 말이다. 원전 사고가 모두 인재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 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나면 반드시 누군가는 피폭을 당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원전의 폐쇄를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원과 파멸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는 원자력이니 만큼 말이다. 다만 원전 사고가 남의 일만은 아니며, 오래전 이야기만도 아니며, 만약 일이 터지면 그 어느 곳보다 많은 피해를 당하게 될 곳이 우리나라라는 걸 잊으면 안 되겠다. 파멸의 위험이 다분한 구원의 길은, 그 자체로 이미 구원이 아니지 않은가. 이는 도박이나 마찬가지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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