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가장 사소한 구원>
<가장 사소한 구원> ⓒ알마
그다지 끌리지 않는 표지, 유명하다지만 개인적으로는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는 저자, 더군다나 노교수와 청춘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이라니... 세대 담론을 앞세워 사회를 진단하고 끝에는 힐링으로 끝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앞서 들었다. 그럼에도 이 책 <가장 사소한 구원>(알마)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다. 바로 '구원'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두 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마' 출판사에 대한 믿음도 한 몫 했다.)
'구원'은 굉장히 종교적인 단어인데, 일반적으로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함'을 뜻하고 기독교적으로는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냄'을 뜻한다. 그래서 인지 일반적으로 아무 때나 쓰지는 않는 듯하다. 뭔가 거룩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지금 시대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 구원이다.
이 시대의 아픈 청춘들은 얼마나 구원을 원하고 있는가. 그런데 들여다보면 엄청난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일을 하고 싶고, 연애를 하고 싶고, 결혼을 하고 싶고, 아이를 낳고 싶고, 집을 갖고 싶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고, 노후에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나열해 보니 너무 많은 걸 원하는 건가? 전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당연히 누리고 싶은 것들이다. 하지만 지금 많은 청춘들이 이런 것들을 포기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정말 '사소한 구원'을 원한다.
노교수의 뻔하지 않은 방법으로 구원하다
<가장 사소한 구원>에서의 구원은 위에서 말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70대 노교수와의 서른 두 통의 편지를 통해 30대 청춘이 받는 지극히 개인적인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녀 개인이 겪었던 아픔과 상처들에 대한 구원 말이다. 그녀 김현진에게 그 아픔과 상처들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지독히 괴롭힌 악마 같은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 사랑과 이별, 죽음 등. 그녀의 아픈 이야기는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없다.
"저는 지금 속이 끓는 것 같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때 제 팔의 큰 상처 자국을 보시고 왜 그러냐고 물으신 적이 있지요. 누군가를 죽이고, 저도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제가 목숨 바쳐 죽일 만큼 가치가 없었고, 제 목숨도 그렇게 헐하게 버릴 만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만두었지요. 그런데 제 인생의 숨통을 반쯤 끊어놓은 사람이 희희낙락 즐거워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고 나니 누군가 심장을 쥐여짜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잔인하고 얼음 같은 손으로 말이죠." (본문 중에서)
그런데 이 아픔과 상처를 70대 노교수인 라종일 교수는 누구나 겪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종류는 다를 수 있겠지만 아픔의 강도는 비슷하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외의 충고를 해주기도 한다. '세상에 무서운 일은 없고, 우스운 일뿐이다', '이야기된 고통은 더이상 고통이 아니다'와 같은 주옥 같은 문구로 위로하기도 한다. 그만의 뻔하지 않은 위로의 방법이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슬픔을 자세히 이야기해주며 역시 그만의 방법으로 공감한다.
인생을 먼저 살아가며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선배가 후배에게 보내는 따끔하고 현실적이지만 따뜻한 조언이자 위로로 보이기도 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대동해 할아버지가 손녀를 어르고 달래는 장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김현진의 말마따라 '남자친구'와 '여자친구'의 대화로는 보이지 않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만약 남자친구를 선택할 때 '존경'을 제일로 놓는다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그들의 대화는 톡톡 튀고 진득하며 예리하고 두루뭉술하며 따뜻하고 자연스럽게 물 흐르는 듯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게 없다
김현진이 라종일 교수에게 보내는 16번의 편지와 라종일 교수가 김현진에게 보내는 16번의 답장은 일관성을 유지한다. 김현진이 자신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이 시대의 문제를 묻는다. 라종일 교수는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때론 부탁하는 투로, 때론 강압적이기까지 한 태도로 답한다. 책을 다 보면 라종일 교수가 이 시대의 청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걸 알 수 있다. 김현진은 이 시대의 청춘을 대표해서 그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답이 뻔하지 않기에, 생산적이기에, 때론 김현진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기에 그 가치가 출중하다. 하나하나 곱씹어 볼 만하다.
하지만 그의 답이 모두 정답인 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의 보수적인 측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김현진이 지금 청춘들이 일도, 연애도, 결혼도, 아기도 포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물었을 때 그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으며 옛날 자신이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다. 그 끝에는 항상 '무슨 도움이,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하는 자조 섞인 말을 하는 걸 보니, 그도 별 수가 없어 보인다.
그러며 시종일관 아기에 대한 찬양(?)을 설파 한다. 인구 감소 때문도, 노동력 부족 때문도, 민족 융성 때문도 아니라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소감을 전하며 아기를 낳아 부부가 함께 양육하면서 겪는 특별한 경험을 말한다. 그에게는 그런 경험이 사람으로서 존재에 매우 중요한, 불가결한 일면이다.
한편 그는 모든 면을 두루 살피려 한다. 오직 상대적인 면을 강조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스탈린과 히틀러까지 포용한다. 심지어는 일베와 서북청년단까지 끌어 안는다. 가히 충격적인 생각과 발언이라고 생각되지만,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이해가 되는 신기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마치 인간 사회가 굉장히 작아지면서 한 눈에 모든 걸 바라보게 되는 느낌이다.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게 없어진다. 적어도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때는 말이다. 신기한 경험이다.
"현진은 이런 일에 관해 너무 판에 박힌 쉬운 의견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는 일베이건 서북청년단이건 좀더 심층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중략)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무리 우리 입장에서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사람도 아니다' 혹은 '미친놈들'이라고 말하지 말자는 뜻이었어요. 사람으로서 특히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본문 중에서)
"이제 아무 걱정 마라, 나는 네 편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이들의 대화.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 평생 가져 보지 못했던, 갖기 힘든 생각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생각들을 잘 이끌어 낸 김현진이 대단하다. 라종일 교수는 이 책 하나로 이 시대 청춘들에게 멘토 이상의 버팀목이 될 것 같다. 단적으로 말해, 30대의 나이지만 흔치 않은 슬픔과 상처를 안고 있는 그녀가 낫기 위해 매달릴 만하다. 사소한 구원을 위해서.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속만 상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다면 그의 말을 한 번 쯤 들어봄이 어떤가. 마지막으로 라종일 교수가 김현진에게 건네는 세 가지 이야기를 올려 본다. 첫째,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둘째, 나는 네 편이다. 셋째, 글 쓰는 사람은 원래 어느 정도 불행해야 한다. 당신도 그것을 알지 않느냐?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라, 나는 네 편이다." 책을 덮고 나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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