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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행복한 사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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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행복한 사전>


영화 <행복한 사전> 포스터 ⓒcineguru



2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출판계 불황의 늪. 더불어 출판계 종사자들의 위치도 애매해졌다. 여전히 서양에서는 출판편집자가 지식계 전문가 집단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출판편집자로서 밥 벌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인식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다보니 점점 팔기 위한 책을 만들게 되고, 지식 종사자라는 타이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전' 출판은 완전히 다른 격이 필요하다. 수집하고 배열하고 창조까지 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 어떤 사전이든지, 이는 출판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전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빨리 디지털화된 콘텐츠 중 하나이다. 데이터베이트 작업이 주를 이루다보니, 아나로그가 아닌 디지털로 할 때 빠르고 쉽고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워낙 방대한 작업이다보니, '장인 정신'이 없을 수 없겠지만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들었던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겠다. 그래서 영화 <행복한 사전>에서 보이는 아날로그적인 사전 편찬 작업의 모습이 아련하게 다가오는 것일 게다. 편찬자가 직접 발품을 팔아 언어를 수집하고 해설을 붙이고 배열하고 교정하고 출간한 뒤 계속해서 개정을 해나가는 모습 말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사전


영화는 1995년 어느 대형 출판사의 사전편찬부에서 시작한다. 20년 넘게 사전 편찬 외길을 걸어온 편집자가 정년 퇴직을 하게 된다. 회사 내에서 알맞은 사람을 골라와야 하는데 과연 누가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사전편찬을 하고 싶어 하겠는지... 


와중에 영업부에서 자신과 맞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이를 발견한다. 그는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사전에게로 달려가 찾아보곤 하는 마지메였다. 얼마나 성실하면 이름이 성실(마지메)이겠는가?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말에 대한 사랑이 제일 크게 작용했다. 


우여곡절이 없을 수 없지만 마지메는 특유의 천성과 동료들의 도움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장대한 프로젝트 '대도해' 사전편찬을 잘 해나간다. 기존의 사전에 계속 생겨나는 현대어를 모두 포함시키는 작업이다. 


"단어의 의미를 안다는 건 누군가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뜻이죠. 그건 타인과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사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도해'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전이 되어야 합니다"



영화 <행복한 사전>의 한 장면. ⓒcineguru



영화는 하루종일 사전을 들여다보며 하나하나 확인하고 수정하고 재차 확인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수차례 반복하는 사전편찬부의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만 같은 모습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그리고 있다. 잔잔한 바다에 조용한 파문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지루할 틈이 없다고 할까. 그렇지만 그 파문들이 어떤 큰 사건이나 사고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터에서 항상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공감할 수 있다. 


대도해(大渡海)라고 명명할 정도로 장대한 프로젝트. 사전을 만드는 일이 곧 바다를 건너는 정도의 공력이 필요하다는 뜻을 게다. 영화는 원작인 <배를 엮다>(은행나무)가 목적했던 바를 놓치지 않고 잘 그렸다. 문제는 누구나 짐작할 만한 뻔한 결론을 어떻게 그리냐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오랜 세월에 걸쳐 포기하지 않고 외길의 장인 정신으로 사전을 훌륭히 완성해낼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그 사이 사전을 편찬하지 못할 뻔한 사건사고들이 일어날 것이었다. 


 '사전'에 대한 '소통'에 대한 '말'에 대한 이야기


'대도해' 프로젝트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난관에 부딪힌다. 사전 편찬이 회사에 이익을 주지 않는다는 판단 하에 없었던 일로 하려는 수뇌부의 의견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니시오카를 위시로 한 사전편찬부 3명은 외부에 '대도해' 프로젝트를 알려 출간을 기정사실화 시킨 다음 수뇌부에게 가 부탁을 하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대답은 출간을 계속하라는 지시, 하지만 니시오카는 사전편찬부에서 홍보부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사전편찬부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더욱 힘들어진다. 앞으로 10년 이상 계속될 이 작업의 행방은 어찌 될 것인가? 



영화 <행복한 사전>의 한 장면. ⓒcineguru



이 영화는 '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주요 소재인 사전편찬도 그것을 위한 밑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어수룩함과 소심함으로 남들과 소통을 잘 하지 못하는 주인공 마지메. 반면 누구보다 붙임성 있고 활달한 성격과 태도로 소통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니시오카. 


한편 달필이지만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말로 일관하고 있는 마지메의 연애 편지에 경악하는 니시오카, 그리고 연애 편지의 당사자 카구야. 결국 카구야는 마지메에게 편지가 아닌 말로 사랑을 전해달라 청하고 카구야는 그에 응한다. 


그리고 사전 '대도해'에는 영화가 '말'에 대해 전하려고 하는 바가 정확하게 함축되어 있다. 사전편찬부 편집주간이자 '대도해' 프로젝트의 기획집행자의 말을 들어본다. 그의 말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사전'에 대한 '소통'에 대한 '말'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있다. 


"단어의 바다는 끝없이 넓지요. 그 넓은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 인간은 사전이라는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해 줄 말을 찾습니다. 유일한 단어를 발견하는 기적과, 누군가와 연결되는 기적을 바라며, 광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전, 그것이 바로 '대도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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