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작 열전/신작 영화

<현기증> 가족들 간의 보이지 않는 작은 충돌과 균열들

반응형




[리뷰] <현기증>


영화 <현기증> 포스터 ⓒ 한이야기 엔터테인먼트



이보다 더 아플 순 없다.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순 없다. 이보다 더 가슴 치게 만들 순 없다. 영화 <현기증>을 보는 내내 든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 제목처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어떤 연기이기에, 어떤 연출이기에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인가. 일단 감독이 궁금해지고, 배우들이 궁금해진다. 


먼저 신인 '이돈구'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그는 이 영화가 두 번째 연출작이다. 데뷔작은 2012년 

<가시꽃>(관련 리뷰: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한 남자의 잔혹한 속죄)이다. 충격적인 데뷔작으로 개인적으로 정말 인상 깊게 봤다. 한 남자의 잔혹한 속죄이자 아름다운 비극이기도 했다. 수작이었고 영화적 가치가 무궁무진했지만,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고 보고 나서 기분이 굉장히 나빴던 기억이 난다. 


밀도 높은 잔혹함, 비극이 주는 아름다움


이번 영화는 그 강도를 훨씬 더했다. 잔혹함은 더욱 밀도 높게 표현되었고 역설적으로 비극이 주는 아름다움은 전작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전작이 다분히 한 남자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현기증>은 그 대상이 가족 전체이기 때문이리라. 


그 가족들은 총 4명으로, 가히 모두 연기파들이다. 먼저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엄마 순임(김영애 분), 큰 딸 영희(도지원 분), 작은 딸 꽃잎(김소은 분), 큰 딸 사위 상호(송일국 분). 이야기는 이 가족들을 중심으로, 즉 '현기증'은 이 가족들을 비극으로 이끄는 동기이자 비극의 과정이자 중간 종착지이기도 하다. 현기증 때문에 사건이 벌어지고, 사건이 벌어져서 현기증이 나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기증은 현대의 가족들, 그 구성원들 간의 건널 수 없는 강의 넓이와 깊이 만큼 그들을 괴롭힌다. 그 상징과도 같다. 


영화의 시작은 전형적인 가족의 저녁 식사 시간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고, 사위가 장모님을 모시고 혹은 얹혀 살고 있다. 엄마는 깜빡 깜빡 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듯하고, 큰 딸은 만삭이다. 사위는 산부인과 의사인 듯한데 눈치가 없어 보인다. 작은 딸은 수능이 100일도 남지 않은 고 3인데 큰 딸과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 큰 딸에게 애기가 신호를 보낸다. 나가고 싶다고. 


그렇게 영화 초반은 순조롭게 흘러간다. 한 번에 유산을 뒤로 하고 순산한 큰 딸, 그리고 예쁜 애기와 가족들. 애기는 가족들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흩어지고 삐걱대던 가족들이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뭔지 모를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다. 그 불안감에 정체는 왠지 이 가족들 자체인 듯하다. 감독의 출중한 연출 덕분일텐데, 역시 오래 지나지 않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벌어진다. 현기증 때문에. 


현기증이 불러오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영화 <현기증>의 한 장면. ⓒ 한이야기 엔터테인먼트



엄마 순임이 잠 못 자고 고생하는 큰 딸을 위해 애기를 목욕 시킨다. 목욕을 끝내고 몸을 닦던 중 정전이 된다. 그리고 일어서려는 순간 현기증이 일어 발을 헛디디고 애기를 놓치고 만다. 애기가 물에 빠진 상태로 순임은 기절한다. 큰 딸 영희는 자고 있어서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잠에서 깨어난 영희는 이 사실을 알고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애기는 죽은 지 오래다. 순임은 그 후부터 속죄의 침묵을 이어간다. 그리고 영희와 상호 부부는 더 이상 순임과 한 집에서 살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분가를 한다. 


한편, 작은 딸 꽃잎은 뜻하지 않게 일진과 어울리게 된다. 사실 어울린 다기 보다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고 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 영희와 순임은 그런 꽃잎에게 무차별적인 공격을 한다. 꽃잎의 말은 들어보려 고도 하지 않고 그녀의 탓만 한다. 너무나 무지막지한 그녀들의 꾸중에 꽃잎은 혼자가 되어 간다. 심지어 일진들이 꽃잎을 이용해 미성년자 인신매매를 자행하려 해도 말이다. 꽃잎은 이를 버틸 수 없었다. 


이런 현기증 나는 일은, 현기증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일은 상호에게도 일어난다. 그는 부인 영희의 정신 나간 상태가 계속되자 지쳐가기 시작한다. 그는 본래 친구가 말하는 '몸은 줘도 된다. 마음만 주지 않으면 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나서서 친구와 함께 유흥 업소를 간다. 그곳에서 결국 몸을 주고 만다. 중간에 뛰쳐 나온 그는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린다. 


순임은 어떻게 되었을까? 큰 딸과 사위를 내보내고도 그녀의 죄책감은 더욱 커진다. 급기야 그 죄책감은 그녀를 다른 곳으로 안내하는데, 곧 '치매'의 세계이다. 다른 사람이 되는 엄마를 견딜 수 없는 꽃잎은 결국 언니 영희에게 도움을 청하고, 영희와 상호는 다시 순임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그들에게는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까? 


가족에 대한 무서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과 포근함


<현기증>은 전작에 이어 이돈구 감독의 색깔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그야말로 '잔혹 미사'이다. 내용은 한 없이 잔혹한데, 거기에 아름다운 미장센이 존재하는 것이다. 화면이나 연기 말이다. 얼핏 정반대로 상충되는 잔혹과 아름다움이지만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영화 <현기증>의 한 장면. ⓒ 한이야기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보는 내내 가족에 대한 무서움에 짓눌렸다. 안 그래도 외딴 단독 주택에 살고 있는 이들이라 의지할 대상이 가족 밖에 없는데, 바로 그 가족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소름 돋고 눈물까지 날 지경이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외려 가족에 대한 왠지 모를 그리움과 미안함과 포근함이 든다. 왜 일까? 어째서? 이 영화를 다시 거꾸로 돌려보면, 결국 이 가족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파국은 순임의 현기증이 원인이 되었지만, 파국까지의 과정에서 보여지는 가족 구성원들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순임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파국은 가족 전체에게서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순임의 그 현기증에도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가족들 간의 보이지 않는, 그러나 피 말리게 하는, 과도하게 신경 쓰이게 하는 작은 충돌과 균열들이 그녀로 하여금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의 '현기증'의 진짜 상징은 바로 그런 것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