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읽기] <새벽 출정>
<새벽 출정> ⓒ아시아
대한민국 역사 중에서 몇몇 굵직한 시위나 농성은 전환점을 마련해 흐름이나 방향을 바꾸곤 했다. 1960년 4.19 혁명,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항쟁,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 등. 그 시위나 농성에 가담한 사람들의 숫자도 숫자지만, 그 의미나 성과가 남다르다.
1987년 6월 항쟁에 이어 7, 8, 9월에 있었던 노동자대투쟁 역시 그 규모면에서나 의미, 성과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이 투쟁을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투쟁으로 민주화 열기로 고양된 노동자들의 생존권 확보 및 노조 결정 움직임이 분출된 결과였다. 그 움직임의 격렬함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도였다고 한다.
비록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중산층의 외면으로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이후 노동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겠다. 방현석의 소설 <새벽 출정>은 이런 배경 위에서 지어졌고 또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1988년 7월 17일 제헌절에 죽고 만 인천 세창물산 故 송철순씨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그녀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설은 노동운동 현장을 떠나는 조합원의 모습을 그리며 시작된다. 그 조합원은 학생 조합원의 실질적 리더였는데, 사장의 비열한 반격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나가게 된 것이었다. 세광물산 사장 김세호는 학생 조합원의 학교와 학부모에게 공문을 올려, 학생을 제적조치 취할 수 있다는 협박과 함께 그들이 하는 농성과 시위 등의 노동운동이 '비합법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주지 시키려 했다.
노동운동 현장의 문제는 이 뿐만 아니었다. 성과 없는 농성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다들 지치기 시작했다. 그건 각오한 일이라고 치지만, 당장 먹을거리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날씨는 추워지는데, 따뜻한 국 한 그릇은커녕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도 힘들었다.
"날이 갈수록 인원이 줄어들어 취사량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줄어드는 인원보다 농성자금은 빠르게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부식비를 최소로 줄일 수밖에 없었고 식사는 점점 부실해졌다. 추위에 까칠해진 조합원들의 입끝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본문 중에서)
소설의 초중반은 이처럼 당시 노동운동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투쟁은 굉장히 이상적일 것이다. 외부로 보여지는 투쟁은 올바르고 이상적이고 멋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실상은 보여지는 것 외의 것에서 진짜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외부로 보여주는 투쟁을 실현 시키기 위한 투쟁. <새벽 출정>은 그것을 온전히 보여주며 노동운동을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소설은 이어서 그들이 어떻게 농성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위원장 미정, 회계감사 민영, 그리고 철순. 이들은 세광물산 공순이들이다. 이들은 회사측의 비열한 계략으로 어쩔 수 없는 과도한 경쟁으로 피폐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끝없는 경쟁이 계속 되더라도 나아지는 건 없다는 것을 직시한다. 그 이익은 회사에게 돌아갈 뿐 정작 자신들에게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이들은 처음에 자신들을 물로 보는 관리자들에게 만만히 보이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단체 결근을 시행한다. 하지만 돌아온 건 사직서와 각서였다. 몇 년을 몸 바쳐 충성을 다해도 세광물산은 결코 그들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사장의 것이었을 뿐.
"강민영, 너는 일당 4,080원짜리 고용인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야. 그리고 이제 사장은 네가 필요없어졌어. 매일 구매하던 4,080원짜리 물건을 이제는 다른 곳에서 구입하겠다는 거야. 내가 앉혀졌던 자리에 다른 누군가 앉혀져서 도료를 만지게 될 거야." (본문 중에서)
노동자의 진짜 뜻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이윤을 창출하게 해주는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하나의 물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제나 대체할 수 있는 무엇이 지천에 널려 있어, 이게 아니면 저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무섭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 말은 25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노동자의 서러움 투쟁으로 끝장내자"라는 플래카드를 굴뚝에 걸려다가 떨어져 죽은 철순. 철순의 죽음으로 조합원들은 한때 뭉치게 된다. 그러며 세광물산 사장 김세호의 정중한 사과문으로 상황이 역전되길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뒤로 하고 사장은 폐업을 선언한다. 그는 생산량의 증가도 임금의 인하도 아닌 노조의 해산과 조합원들의 퇴직을 원했다.
"우리가 아직 눈뜨지 않은 노동자였을 때 우리의 시간들은 오로지 사장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으로 살기를 갈망하며 싸워온 지난 날들은 비록 어렵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동안 우리는 해방의 세상에 살았습니다... 우리가 원했던 돈은 인간다운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것이었을 뿐, 돈에 대한 탐욕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본문 중에서)
2014년 현재 최저 임금이 5,210원이다. 여전히 한 끼 식사를 겨우 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루 8시간이면 41,680원이다. 하루 세 끼와 차비를 해결하면 2/3이 남을 뿐이다. 여기에 주거 관련 비와 통신비 등을 제하면 마이너스가 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소설 속 철순의 말대로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미정의 말대로 라면 만성두통, 신경통, 소화불량, 위장병이 남을 뿐이다.
인간다운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돈을 최저생계비라 치면, 2014년 1인 가구 최저생계비는 603,403원이고, 2인 가구는 1,027,417원이다. 한 달 평균 일수를 23일로 치면 958,640원이다. 2인 이상은 책임질 수 없는 실정인 것이다.
소설은 마지막에 돈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돈보다 더욱 소중한 것, '동지에 대한 변할 수 없는 애정'과 '참 인간다운 삶'이 그것이다. 이는 인간이 돈보다 중요한 것이며, 인간애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겠다. 이들이 캄캄한 새벽 하늘에 출정을 거행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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