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읽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표지 ⓒ 민음사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2009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이동진의 부메랑 인터뷰 그 영화의 비밀>(예담)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남자, 여자, 침대, 술이라는 욕망의 4대 원소로 삶의 허망한 구조를 드러내온" 것으로 평가한 바 있다.
또한 프랑스 최고 권위의 일간지 <르 몽드>에서는 홍상수 감독을 두고 '그는 현대의 연애와 성생활의 실태에 대한 씁쓸한 페시미즘의 초상을 명료하게 그리면서, 자기표현의 도구를 사상의 방법으로 변형시킬 줄 아는 예술가다'라는 극찬을 하기도 했다.
다소 어려운 말인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홍상수 감독은 현대인에 내재된 욕망을 에둘러 표현할 줄 아는 예술가라는 거다. 그리고 그 모습들이 숨기고 싶어하는 우리네 진실된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기에, 그의 영화를 보며 감탄하고 재밌어하면서도 마냥 즐길 수 만은 없다. 그래서인지 클라이막스가 없는 단조로운 일상을 그리고 있음에도, 그의 영화는 긴장감이 넘친다.
욕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명한 고전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제목에서 주는 강렬함과 맞물려 내용 또한 적나라하기 그지없다. 욕망을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뜻이다. 잔잔한 물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고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사라지는 파동처럼, 주인공 블랑시 또한 그녀의 동생 주위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고 사라져간다.
주요 등장인물 4인방을 보면 현실과 이상을 상징하는 두 인물(스탠리와 블랑시)이 첨예하기 대척점을 이루고 있고, 다른 두 인물(스텔라와 미치)은 현실 쪽에 무게를 두고 있거나 가운데에서 무기력하게 대응하고 있다.
블랑시는 전형적인 미국 남부 백인 귀족 출신이다. 집안 대대로 살아온 저택 벨 리브(아름다운 꿈)를 잃은 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뉴올리언스의 '극락'이라는 지역을 찾는다. 그곳에는 블랑시의 여동생인 스텔라와 그녀의 남편 스탠리가 살고 있었다. 스스로를 굉장히 이성적인 식견을 가졌고 이상적인 여인이라고 생각하는 블랑시는, 귀족 출신인 여동생 스텔라가 그런 곳에서 적응한 채 살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너무나 동물적인 본성의 스탠리와 그의 친구들을 경멸한다. '현실'과 '이상'의 전쟁 아닌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작품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들
테네시 윌리엄스는 블랑시를 두고 자신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삶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의 아버지는 호탕하고 시끌벅적한 사람이었던 반면, 어머니는 히스테리 가득하고 극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누나 로즈는 사회적인 적응을 못하였고 정신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테네시 윌리엄스는 그 자신 굉장히 예민해졌고, 캐릭터성이 짙은 그의 가족들을 작품에 투영시켰다.
여기에 시대성이 반영된다. 이 희곡이 나왔을 때가 1947년으로,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세계 최고의 국가로 발돋움한 시기였다. 그때까지도 미국은 청교도적인 보수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사회로 인종, 여성 차별을 비롯한 각종 차별이 여전히 팽배했다.
희곡의 배경이 되는 남부 사회의 분위기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당시 미국 남부는 상당히 발전이 더딘 곳이었고,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밀려나온 사람들이 찾곤 하였다. 블랑시는 그런 사람들을 상징한다 하겠다. 하지만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살아온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단조롭고 소박하지만 거친 힘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었다. 스탠리가 이를 상징한다.
수많은 상징의 충돌
스탠리의 부인이자 블랑시의 여동생 스텔라는 귀족 출신이지만 모든 걸 뒤로 하고 스탠리를 만나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남편을 잃고, 가족을 잃고, 직업을 잃고, 고향을 잃고 낙향하다시피 한 블랑시를 못 본 체 할 수 없다. 이 섬세하고 서정적이며 귀족의 전통과 문화를 알지만, 막장에 이른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과거의 영욕에 집착하는 여인을.
반면 스탠리는 블랑시를 가차 없이 몰아붙인다. 그는 가식적이고 가녀리기까지 한 블랑시가 못마땅하다. 한편으론 용서할 수가 없다. 전통, 문화가 다 무언가, 지나간 과거의 영욕 따위가 현실에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블랑시 또한 스탠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와 같은 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치욕스럽기까지 하다. 저렇게 폭압적이고 막무가내인 사람과는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의 충돌은 수많은 상징의 충돌을 말해준다. 도시, 귀족 출신의 블랑시와 시골, 빈민가 출신의 스탠리. 과거를 살아가는 블랑시와 현실을 살아가는 스탠리. 건전한 성(性)을 상징하는 블랑시와 왜곡된 성을 상징하는 스탠리.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한 대척점의 상징은 블랑시의 '이성'과 스탠리의 '욕망'이다. 결국 블랑시는 스탠리에게 굴복하고 마는데, 애초에 그녀가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묘지'(죽음)라는 전차를 갈아타는 장면에서 예상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찾은 '극락'은 무엇일까.
이 밖에도 수많은 상징성들이 출동하는 이 희곡을 평가하고자 할 때, 이동진 평론가가 홍상수 감독을 평가한 말을 그대로 옮겨와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과거와 결별을 고하는 것이 필요할 때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과거와 결별을 고한다. 아련한 추억, 젊음의 화려함, 돈이 주는 풍요로움 등. IMF 때는 국민 대부분이 물질적 풍요로움과 결별했다. 그리고 금융 위기 때는 겨우 쌓아올린 아주 소소한 풍요와 또 다시 결별을 고했다. 유럽은 이미 그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잃었고, 오래전 잃었던 풍요로움과 화려함을 되찾으려는 일본의 움직임은 블랑시를 연상시킨다.
극 중에서 블랑시는 계속되는 정신착란 끝에 결국 정신병원으로 가고 만다. 우아한 귀족 출신의 그녀가, 아픔과 고통을 우아하게 견뎌내지 못하고 파국을 맞이한 것이다.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이 투영된다면, 이제는 과거와 우아하게 결별을 고할 때가 온 것이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우아하게 화려함과 결별하고 스탠리와 스텔라처럼 쿨하게 현실에 적응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블랑시 : 난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 왔어요."(본문 속에서)
그런 면에서 스탠리의 친구 미치야말로 나약한 현대인을 전적으로 투영한다. 그는 스탠리와는 다르게 감수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면이 있는데, 블랑시에게 반하고 만다. 하지만 블랑시의 남다른 과거를 알게 되고 갈팡질팡 마음을 못 정한다. 현실에 발을 담구고 있으면서도, 포용으로 과거를 감싸주지 못하는 인간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욕망? 현실? 이상? 과거? 환상? 어느 것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가. 누구 하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등장인물들의 초상을 비켜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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