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읽기] <완장>
<완장> ⓒ 현대문학
이명박 정부가 물러가고 새 정부가 출범한 지도 어느덧 일 년 반이 지나갔다. 5년 임기 중 벌써 1/3 지점에 다다른 것이다.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한시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권력의 속성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왜 그리 목을 맸던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왜 그리 휘둘러 댔는가. 권력이란 그물은 언젠가 휘두른 본인을 향한다는 사실도 모른 채.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으면 그리 되는 것인가. 누구라도 '완장'을 차면 눈이 뒤집히는 것인가. 글쎄, 모를 일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 배긴스와 친구들은 한낱 완장보다도 훨씬 어마어마한 권력·힘의 근원인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목숨을 건 여행길에 오르지 않았는가. 하지만 완장은 절대반지처럼 유일무이하지 않다. 절대적이지도 않다. <반지의 제왕>에서 악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우론의 설치는 부하들이 완장의 속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비슷한 점이 있다면 착용하는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변해버린다는 것이다. 사실 도처에 도사리면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완장의 힘이 더 막강할지도 모른다. 비록 권력에 기생하는 잔챙이에 불과할지라도. 권력이 완장을 대변하지는 않겠지만, 완장이 권력을 대변할 수는 있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현대문학)은 하찮은 권력을 미끼로 나약한 인간들을 유혹하는 완장의 속성과 그에 얽혀버린 어떤 이의 이야기이다. 어떤 이는 임종술이라는 이름의 동네 건달이다. 그는 항상 완장을 찬 이들에게 당하고만 살았다. 그러다보니 완장이란 허울을 던져 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경하는 권력의 실체는 보지 못한 채, 완장에 눈이 멀어 버렸다.
그런 그에게 거짓말같이 완장이 뚝 떨어진다. 기업가 최씨가 저수지에 양어장을 만들어 그 관리를 종술에게 맡긴 것이었다. 그렇게 안하무인이 된 종술은 완장의 힘을 이용해 못할 것이 없었다. 어느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고, 급기야 저수지 주인인 최씨가 낚시질하는 것도 막아서지 않는가? 결국 관리인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완장도 같이 빼앗길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그에게 저수지의 관리인이라는 완장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국가는 국민의 것이고 자신들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거부하고, 국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과 그에 맞는 지위의 완장을 차고 외려 국민을 핍박하는 모습의 정치인들이 생각나게 한다. 어디 정치인들뿐이겠는가. 어디에서 '한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87년도 작품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 이문열은 권력의 형성과 붕괴를 한 1950년대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그려낸 바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한병태가 반장이라는 완장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자 완전히 바뀌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그 시절에는 '선도'라는 권력적 자리는 물론이고, '주번'이라는 비권력적 자리에도 완장이 목을 디밀고 있었지 않은가. 권력이라는 괴물이 잉태한 기이한 작태였다.
또 하나의 유명한 완장이 있다. 독일 나치즘의 상징이자 히틀러의 왼쪽 팔에 항상 둘러있던 하켄크로이츠(또는 갈고리 십자가). 이 문양은 본래 깃발로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욱일승천기와 함께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공포의 상징이었다. 이런 완장의 속성을 알아챘는지 박정희는 새마을운동을 실시하면서 모자와 완장을 만들었고, 이는 곧 새마을운동이라면 물불가리지 않는 또 하나의 까막눈을 양성했다.
그렇다면 완장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떨까? 권력의 무서움을 느낄까? 아니면 완장을 두른 사람의 무서움을 느낄까? <완장>의 서두를 살펴보며 생각해 본다.
"그 해 이른 봄부터 이곡리 일대를 온통 휘젓고 다니며 마냥 으스대는 종술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물론 종술의 성깔을 익히 아는 주민들은 그의 행패가 두려워서 감히 맞대놓고 그를 어쩌지는 못했다. 주민들은 그저 먼발치에서 그의 뒷모습을 겨냥하며 주먹으로 쑥덕감자를 먹이기도 하고 혓바닥을 날름 내밀어 보이기도 할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구름 의자에라도 앉은 것같이 더욱 거드름을 피우고 다녔다.
그 자신이 생각하는 임종술과 마을사람들이 보는 임종술 사이에는 사실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마치 때까치 종류에서 하루아침에 보라매 같은 당당한 모습으로 탈바꿈한 양 굳게 믿었다. 반면에 사람들은 때까치이던 그가 물까마귀쯤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들은 때까치 시절의 종술이 그래도 사람 꼴에 가까웠다고 회고하곤 했다."(본문 중에서)
임종술이 생각하는 자신은, 권력의 상징인 완장을 찬 권력자 임종술이다. 반면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임종술은, 임종술이 권력의 상징인 완장을 찬 것이다. 즉, 사람들은 완장 찬 임종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임종술이 찬 완장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완장 찬 임종술의 행패가 두려운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정확히 30년 전에 나온, 군부 독재의 권력에 눈이 먼 사회상을 비판하는 이 책이 여전히 현재성을 발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쫓겨난 임종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저수지를 지키고 있었다. 가뭄이 들어 저수지의 물을 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도 그는 자신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수리 조합 직원들과의 충돌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술집 작부 부월이의 절규에 찬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작가가 정녕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닌가 싶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자기는 지서장이나 면장 군수가 완장 차는 꼴 봤어? 완장 차고 댕기는 사장님이나 교수님 봤어? 권력 중에서도 아무 실속 없이 넘들이 흘린 뿌시레기나 줏어먹는 핫질 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인 게여!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어서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여!"(본문 중에서)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는다는 말과 진수성찬은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이 종술에게 뼈아프게 다가왔을 것이다. 결국 종술은 완장을 저수지에 버리고 부월이와 함께 자취를 감춘다. 다음 날, 저수지 위에 종술의 것이었던 완장이 나타나고 소용돌이치면서 빠지는 물과 함께 사라진다.
일시적인 권력의 속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이 장면을 보며, 그 허망함에 속이 시원하다기 보다 씁쓸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권력이라는 거대한 욕망 앞에 휘둘려 하수인 노릇이나 한 완장 두른 사람들이나, 그 앞에서 완장의 힘이 두려워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언젠가 다시 찾아올 줄도 모르고 다시는 안 올 것처럼 멀리 가버리는 권력의 상징을 보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불행해 보이는 건 왜일까.
작가는 진짜배기 완장을 찬, 눈에 뵈지도 않는 자들은 지서장이나 면장 군수, 사장님이나 교수라고 말하고 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진짜배기 완장을 찬 분들은 같은 분들인가 보다. 더 무서운 게 무엇인지 알겠는가? 지금은 그나마 눈에 보이던 '완장'이라는 뚜렷한 표상체도 없는, 말 그대로 '눈에 뵈지도 않는'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화의 진화를 거듭하는 권력은 이제 아무 실속 없이 뿌시레기나 흘리진 않는다. 그럼에도 '벨 볼일 없는 하빠리들'은 존재하는가 보다.
독특한 리얼리즘 기법에 입각해 권력의 속성과 그에 얽힌 사람들의 비루한 삶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 이 작품 <완장>을 눈에 뵈지도 않는 진짜배기 완장을 찬 분들께 권하고 싶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고 레닌과 스탈린이 생각난 어린 친구들께도 과감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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