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읽기] <사다리 걷어차기>
<사다리 걷어차기> ⓒ 부키
지난 2008년 9월, 미국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을 시작으로 세계는 80여 년 전의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여파는 5년이 다 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당시에는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파산하면서 결국은 정부가 직접 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유방임주의 정책이 또 다시 철퇴를 맞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통해 급격한 경제 발전을 이루어 지금의 선진국을 건설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알려져 있다(1980년대 영국의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이 신자유주의 아래의 자유방임경제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이런 인식을 더욱 굳힌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도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해왔고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그 고정관념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그 통설이 또 다시 깨어져 버린 것이다(대공황 당시에도 자유방임주의정책).
이론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사실과는 다르게 자유방임주의는 만능이 아니라는 말인가. 이런 면에서 출간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사다리 걷어차기>(부키)라는 경제서적은 나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통설과는 다르게 저자는 지금의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이었을 당시에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철저한 보호주의 아래에서 지금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ITT정책(산업, 무역, 기술)과 자국유치산업 보호 정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경제발전에는 자유방임주의 정책이 실효가 없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사실과는 반대라는 것인데, 혼란스럽다 아니할 수 없다. 과연 그 충격적 내용의 전말이 무엇인지. 총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선 1부에 대해 감상해보도록 하자.
현재의 선진국들이 국가탄생과 동시에 지금의 위치에 오른 건 아니다. 그들도 개발도상국인 시절이 존재하였는데 과연 지금의 개발도상국처럼 자유방임주의 노선 아래에서 ITT정책을 쓰지 않도록 압박받았을까? 그건 결코 아니라고 1부에서 말해주고 있다.
선진국 "개발도상국, 너희는 올라올 생각하지 마!"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스위스, 네덜란드 제외하고서라도)이 급격한 경제 발전 단계에서는 철저한 보호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렇게 선진국이 되고 나서는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자유방임주의를 반 강요 하다시피 한 것이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히고 입맛에 맞지 않은 음식을 건강식품이라고 속여서 먹게 하는 격이 아닌가?
그뿐이 아니다. 지금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ITT정책을 집중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세를 대폭 인상하여 수입을 억제 시킨다든지 자국 산업 보호 정책을 이용한다든지 하면서 강력한 보호주의를 행사하였다. 이는 현대에 와서는 상당히 실행하기 힘든 정책이다. 세계화 운운하면서 모든 면에서 문을 열 것을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에(예를 들어 FTA) 지금 시대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높이 올라선 사람(국가)들의 행동(높은 곳에서 혼자 또는 집단이 모든 걸 독차지하며 더 이상의 경쟁 상대를 만들지 않으려는 행동)은 이해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숨기려 하면서까지 그러는 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아무리 좋은 정책으로 나라를 이끌고 나가려해도 그에 알맞은 제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현재의 세계에서는 모든 나라들이 거의 같은 종류의 제도를(선진화된 바람직한 제도) 채택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투표권, 재산권을 비롯해 금융제도, 사법제도, 나아가 선진국의 기준이 되는 제도 중의 하나인 사회보장제도와 여성, 노인, 아동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제도 등 무수히 많은 제도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중 대부분이 개발도상국에게도 꼭 필요한 제도이지만 그 중 몇몇 제도는 그들의 경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부담이 가는 게 사실이다. 비록 정책에는 알맞은 제도라 할지라도 말이다.
2부에서는 과연 이런 제도들의 역사를 살펴봄으로써 현재 개발도상국이 행하는 제도들이 지금 선진국의 과거 개발도상국 시절에 행하였던가 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폭로하면서 작금의 상황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진 사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제목인 '사다리 걷어차기.' 누군가가 사다리를 먼저 올라가 목적지에 다다르면 다른 누군가가 올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걷어 차버린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그걸 이 상황에 대입해보면 정말 딱 맞는 것 같다. 자신들이 과거에 행했던 정책의 우수함을 알아버린 이상, 이제는 쓰지 못하게 한다니.
'선진화된' 정책(선진국들의 주장에 의하면)과 '선진화된' 제도를 갖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어감 상으로도 선진국에 맞추어진 체계를 개발도상국에게 억지로 맞추려는 행동이 보이지 않는가. 건강한 몸에 맞는 음식이 허약한 체질의 몸에 알맞을까? 그건 이기적인 생각이다. 사람도 체질에 따라 다른데 말이다. 하물며 나라는 말할 것도 없겠다.
3부에서는 이 책의 궁극적인 초점으로 돌아와서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들이 올라올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앞서 말했듯이 과거에 지금의 선진국들은 보호주의 아래에서 ITT정책과 자국유치산업 보호, 관세인상 등을 철저히 경제발전에 이용하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현재 개발도상국들이 채택하고 있는 수준 높지만 경제발전에는 그다지 득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제도를 그 당시의 개발도상국(지금은 선진국)들은 채택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현대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제도조차도 등장하지 않았던 시대의 국가들도 많았다.
그런데 현재는 어떤가. 마치 군대에서 병장이 이등병, 일병에게 병장 급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하고(물론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고 수준 높은 군인 생활을 강요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매우 교활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왜 선진국들은 이러는 걸까? 세계화를 외치는 이면에는 그들의 진짜 목적이 교묘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의문점들
이 책은 경제서적이지만 '리스트'의 역사적 접근법을 적용하고 있어서 그런지 역사 서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역사 속의 숨겨진 사실을 찾아 들추어내는 그런 역사서들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추측이 아닌 오직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패턴을 찾고 이론을 들어서 현재의 문제와 적용하여 신뢰를 얻고 도움도 되는 소재를 잘 선택한 것 같다. 그래서 경제에 거의 문외한인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드는 의문이 있었다. 보호주의 노선을 걸어간다면 자연스럽게 국가의 개입이 많아져 국가가 힘이 세지고 국민은 상대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한계가 생기지 않겠나 하는 의문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라는 것을 3부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정책과 제도는 상호작용이 필요하고 매우 긴밀한 관계지만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보호주의 아래에서 큰 정부를 표방해도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한 그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있게 해주는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개발도상국들은 보호주의 아래에서 체계적이고 선진화된 제도를 채택하여 경제 발전 및 국민 복지를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굳이 경제 발전에 득이 되지 않는 제도는 채택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선진국의 압박이 없어야 가능하겠지만. 그런데 선진국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들의(선진국) 경제수준에 맞는 정책과 제도를 강요하고 있다.
또 다른 의문점은(위와는 성격이 다른 의문점) 지금의 개발도상국들이 선진국 반열에 오르면 기존의 선진국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길래 저자는 선진국이 개발도상국들의 도약을 도와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저자는 책의 끝에 아주 간략하게 써놓았다. '무역과 투자의 기회를 증가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 선진국에게도 유익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렇게 끝나버렸기 때문에 이 의문점을 풀지 못하고 있다.
필자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 의문점(이 책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을 풀지 못하는 한 걷어치워진 사다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현대 세계의 주최는(아마도) 언제까지나 '선진국'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려면 꼭 이 책을
결론이 의외로 부실한 책이었지만 그동안 망각하고 있던(알면서 애써 부정했거나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사실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정형화된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작금의 시대 상황에서 꼭 필요한 책이 아닌가 한다.
이후에 저자 장하준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 그리고 최근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부키) 등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서 경제학 전반의 허와 실을 아주 적나라하고 날카롭게 파헤쳐 공고한 베스트셀러 저자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였다. 특히 앞의 두 책은 가히 '충격'에 가까웠는데, 이 책 <사다리 걷어차기>가 그 시발점이지 않았을까.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논리적인 비판과 함께 고정관념을 깨뜨리게 하는 글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나라 같이, 선진국도 아니고 개발도상국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면 과연 어떠한 정책과 제도를 바탕으로 국가를 이끌어야 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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