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과학의 민중사>
<과학의 민중사> ⓒ사이언스북스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역은 크게 5개로 나뉜다. 국어, 수학, 영어, 사탐/과탐, 제2외국어. 해마다 조금씩의 변동이 있지만, 이 5개는 변하지 않고 있다. 이 중에서 사탐/과탐을 흔히 '암기과목'이라 일컫는다. 물론 문제를 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해'와 '실용'에 방점을 둘 테지만, 문제를 푸는 입장에서는 암기가 기본적인 과목이다. 사탐/과탐은 주로 역사적 사실이나 시대적 배경, 그리고 정설이 된 사항들을 다룬다. 한 마디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중요하게 치부되는 사항들은 더더욱 중요해지고, 그렇지 않은 사항들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시험에 나오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시험에 나오지 않은 사항들은 살아가면서도 딱히 알 필요가 없는 것들로 치부된다. 그렇다면 중요한 사항들은 주로 무엇일까? 유명한 사건과 사고, 인물, 발견과 발명 등일 것이다. 자연스레 과학하면 뉴턴과 아이슈타인이, 수학하면 피타고라스와 아르키메데스가 떠오른다.
이런 '메이저 맹목주의' 현상은 사실상 모든 면에 나타나곤 한다. 이런 사고는 자칫 인류가 행했던 거의 모든 행동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몇몇 영웅적 인물의 업적으로 치환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중이다. 하지만 현실과의 괴리감은 엄청나다.
유명 과학자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다
<과학의 민중사>(사이언스북스)는 이런 '메이저 맹목주의' 현상을 일면 인정하면서도 가차없이 일침을 가한다. 과학사에 있어서, 몇몇 영웅적이고 천재적인 인물의 업적은 분명 사실이고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들의 업적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을 드러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부분에 자리하고 있는 이들이 '민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으로 '민중'이라는 단어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민중'은 문화비평적인 시선으로 보는 게 알맞다. '역사를 창조해온 주체이면서도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한 사회적 실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문제는 과연 '과학'의 범주에 '민중'이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냐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지금의 과학은 예술이나 체육이 그렇듯이 일반 사람과는 동떨어진 먼 세계의 영역이다. 한 마디로, 타고난 천재들이나 할 수 있는 영역이란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상식적인'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과학이 지금과 같이 다른 세계의 영역에서 군림하게 된 건 20세기 이후였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20세기 전까지 과학은 민중에게(일반인에게) 훨씬 가까운 존재였다. 많은 과학자들이 글을 남겼듯이, 수많은 과학 이론의 모태가 집단적 민중에 의해 발견/발명되고 알려졌다. 그만큼의 수많은 유명한 과학자들은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이었다.
"과학의 시작은 말이 아니라 행위였다"
이 책은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몇 가지 주류의 모순들을 파헤친다. 먼저 현재 주류의 이론 중심 사상을 반대하고 있다. 저자는 이 역시 20세기에 비로소 대두된 사상으로, 예전에는 실험 과학이 중심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실험 과학의 진보에 있어 과학과는 도통 거리가 멀 것 같은 장인이나 기술자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론 중심의 현재 주류는 그들은 대다수 민중의 기술 노동을 폄하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정확한 자료와 근거로 파헤치고 있다.
다음은 과학사를 특정 인물에 편중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가 평생 과학을 배우는 기간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관련된 지식은 대부분 학생 때 교과서로 배운 것들 뿐이다. 그런데 그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으로 비춰볼 때, 수천 년의 과학사는 불과 몇몇 과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으로 추렴할 수 있어진다. 몇 백년에 하나씩 나온 천재들에 의해서 말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저자는 이를 지적하며, 과학은 수많은 집단 구성원에 의해 오랜 세월 동안 발전되어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이론이 아닌 실험과 직접적 경험으로 말이다. 이론은 이렇게 쌓아 올려진 토대 위에서 모든 걸 수렴하고 정리하고 체계화 한 것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론에 대한 비난은 둘째 치고, 먼저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다음의 말은 진정한 '과학'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당신의 땅을, 집을, 옷과 보석들을 파시오. 당신의 책들을 태워 버리시오. 그리고 튼튼한 신발을 사서 산에 오르고 계곡과 사막, 해안, 그리고 지구의 가장 깊은 곳들을 탐색하시오. 동물들의 특징, 식물들 간의 차이, 다양한 광물의 종류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기원의 특성과 양태에 대해 주의 깊게 기록하시오. 농민들의 천문학과 지상의 철학을 부지런히 연구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마시오. 마지막으로, 석탄을 사고, 가마를 짓고, 참을성 있게 불을 곤찰하고 움직여 보시오. 다름 아닌 이 방법으로 당신은 사물들과 그 특징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게 될 것이오." (본문 중에서)
시선을 조금 더 넓혀 드러나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아라
역사의 왜곡은 곳곳에서 자행될 수 있고, 실제로 자행되고 있다. 누구처럼 아주 대놓고 왜곡을 일삼는가 하면,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자연스럽게 왜곡을 일삼기도 한다. 비교도 안 되게 후자가 훨씬 무섭고 악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과학사에 자행된 왜곡과 미화도 후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주로 주류 기득권층에 의해서 자행된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 각인된 프레임을 바꾸기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즉, 과학사를 보는 눈에서 메이저 과학이 차지하는 비율을 줄이기란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누가 뭘했던 우리는 그 결과만을 보기 때문에, 그 기원과 과정을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다만 시선을 조금 더 넓혀 드러나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아주길 원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눈을 넓히려는 노력과 과정이 세계를 올바른 눈으로 바라보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분들에는 대다수 민중, 보통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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