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읽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2000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듯 생동하는 사람이 있다. 왕이나 황제가 아니었음에도 역대 그 어느 수장보다도 뛰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실제로 영어의 시저(Caesar), 독일의 카이저(Kaiser), 러시아의 차르(Czar)는 모두 '황제'라는 뜻으로 카이사르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그가 마련한 일인 독재 체제는 그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황제가 됨으로써 완전하게 확고히 되었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이 입증된다 하겠다.
대부분의 영웅들처럼 그의 어린 시절도 평탄하지는 않았다. 그는 유서깊은 가문 출신이었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그의 정치적 기반은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민중파였기 때문에, 한때 귀족세력이 득세했을 때는 해외로 도망을 나가기도 하였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귀족세력의 수장이었던 사람의 손녀와 결혼하게 되면서, 민중과 귀족의 양쪽에서 지지를 얻게 될 수 있었고 결국 BC 59년에는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에 오른다. 이후 그는 민생법안으로 민중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되었지만, 반대로 귀족들에게는 불만과 불안을 초래하여 이 갈등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갈리아 전쟁기> 표지 ⓒ 사이
집정관을 역임한 후 BC 58년부터는 로마의 속주였던 일부 갈리아 지역의 총독이 되어 갈리아 전체의 정복을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 장장 8년 동안 계속되는 대장정이다. 카이사르는 이곳에서의 8년 동안, 꾸준한 글쓰기로 한 권의 책을 남긴다. 일명 <갈리아 전쟁기>(갈리아 전기라고도 한다.) 당시 라이벌인 폼페이우스가 동쪽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기에 카이사르도 큰 성공을 거두어야 했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일환으로 자료가 필요했던 듯하다. 그 증명 자료가 곧 <갈리아 전쟁기>인 셈이다.카이사르의 연적이자 공화정의 수호자인 키케로조차 찬사를 보냈다는 이 저작물은 문화사적 사료로도 그 가치가 대단하지만, 카이사르를 훌륭한 정치가이자 무사(武士)에서 위대한 문사(文士)로까지 스펙트럼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저작 하나로 혹자는 카이사르의 문학 능력에 '위대함'의 칭호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위인이 한 분 계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그 또한 7년동안의 전쟁을 '난중일기'라는 뛰어난 전쟁 문학으로 승화시킨 분이다.(사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의 8년 동안의 8권 중에서 7년 동안의 7권만을 저술했고, 8년째 한 권은 그의 참모이자 비서인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써서 추가하였다.) 동서양의 다른 지리적 조건에서 1600년의 시차를 두고 다른 목적이지만 같은 기간 동안의 전쟁 일기를 쓴 이들의 모습에 찬사를 보낸다. 전쟁이라는 것에 압박에 못이겨 숱한 사람들이 도망치는 곳에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에 대해 객관적인 글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을 초월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갈리아 전쟁기>는 본인을 3인칭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시점을 표방하고 있다. 이는 주관적 요소를 배제하고 완전한 객관화에 의한 저술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 문학에서 최정점에 서는데 한몫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카이사르는 총독이 되자 빠르게 북상해서 알프스를 넘고 대서양에 접근한다. 그런 다음 4년과 5년 째 되는 해, 도버 해협을 건너 그 유명한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 원정을 떠난다.(영국의 처칠은 '영국의 역사는 카이사르가 도버 해협을 건너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갈리아 인을 도와주던 세력을 일소했지만, 그 사이 많은 로마군이 공격을 당해 섬멸당하고 만다. 7년 째에는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유일하게 인정한 베르킨게토릭스가 대반란을 일으켜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고, 사실상 갈리아는 평정된다.
책은 BC 50년까지의 상황을 그리고 끝을 맺는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이듬해인 BC 49년 1월,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며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면서 내전이 시작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 역시 <내전기>를 통해 볼 수 있다.) 이후 BC 45년 3월에 폼페이우스의 두 아들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4년 간의 내란이 막을 내리는 것이다.
<갈리아 전쟁기>는 제목만 보고는 따분한 전쟁 이론서라고 치부하기 일쑤일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 저작은 훌륭한 전쟁 '문학'이다. 수많은 후대 군인들에게 '전쟁의 교과서'로 읽히며 그 안에 있는 자세한 전략과 전술을 본받으려 하면서도 '라틴 문학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하다고 하겠다.
카이사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조조'이다. 그 또한 훌륭한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문학에 그 능력이 출중하여 일명 '건안문학의 흥륭'을 이끌기도 하였다. 또한 시에 뛰어나 아들 둘인 조비와 조식과 더불어 '삼조'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들 사이의 평행이론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황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황제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영향력을 떨쳤고 그의 후계자가 황제가 되었다. 이들의 삶을 비추어 극단의 평가를 내리는 점에서도 똑같으니, 이야말로 조조의 전생이 카이사르가 아니었는지 의심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사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란 사람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 분이라면, 카이사르를 일방적으로 '추앙'하고 있는 듯한 그녀의 글을 보셨을 테다. 또는 그가 남긴 몇몇 명언에서 그의 삶의 단면만 볼 수 있었을 테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디서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까?
이 책을 통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란 '인간'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심이 어떠하신지. 나아가 기원전 1세기 유럽의 생활, 환경, 문화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인지라.
"오마이뉴스" 2013.3.11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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