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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우리 선희> 공감가다 못해 소름끼치는 장면들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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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


<우리 선희> ⓒ (주)영화제작전원사



얼마 전 영화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은 그 위상이 확연히 달라진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으로, 1996년 작품이다. 역시 지금은 그 위상이 엄청나게 달라진 배우 송강호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그는 이 작품에 이어 1997년에만 3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특히 그 중에서도 <넘버 3>로 그이름을 널리 알렸다. 


한편 홍상수 감독은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로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서양의 영화시상식에서도 상을 휩쓸어 단번에 최고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추구하는 '일상의 낯섬'의 시작이었다. 그의 영화는 분명 우리네 일상을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만, 낯설고 불편하기까지 하다. 그의 영화가 우리가 서로 다 알고는 있지만 드러내지 않고 나 혼자 또는 우리만 간직하고 싶은 생각과 일상의 모습들을 만천하에 까발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공통적으로, 공감에서 시작해 감탄이 일고 불편함이 들었다가 두려움까지 생기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 인물들의 생각과 대사,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까지 전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더 소름돋는 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특히 남자들은 홍상수 영화에서 정말로 지독한 공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감가다 못해 소름끼치는 장면들의 연속


그의 최신작이자 얼마 전 개봉했던 <우리 선희>도 비슷한 전례를 따른다. 주인공은 당연히 선희(정유미 분)이고, 남자들 셋이 딸려 나온다. 최교수(김상중 분), 전 남자친구 문수(이선균 분), 선배 재학(정재영 분). 선희는 영화과 졸업생으로,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최교수에게 추천서를 부탁한다. 그녀를 특히나 이뻐한 최교수이기 때문에 잘 써줄거라 기대한 것이다. 한편 선희는 우연히 문수와 재학을 만나 술자리를 갖는다. 이후 최교수와의 술자리도 주선한다. 


'술자리'는 홍상수 영화의 주요 설정 중 제일 큰 것으로, 이 영화에서도 수 차례 비춰진다. 선희와 문수의 술자리를 비롯해, 선희와 최교수, 선희와 재학, 문수와 재학. 그리고 최교수와 재학, 최교수와 문수는 술자리가 아닌 만남을 가졌다. 누구나 알고 공감하는 바겠지만, 일반적인 술자리에서 오고가는 얘기는 극히 일상적이거나 굉장히 형이상학적일 뿐이다. 여기서 형이상학적인 얘기들에는 많은 경우 어줍잖은 충고가 뒤따른다. 


홍상수 영화에서의 술자리는 이 광경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내가 언제고 술자리에서 했을 법한 행동과 생각과 말을 소름끼치게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공감을 넘어서 두려움까지 일게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재학: "그러니까 걔가 판단한대로 따라가라고. 무리하지 말고. 너 절대 무리하지 마라!"

문수: "아니, 무리를 해야 아는 거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진짜 좋은 걸 알 수 없잖아요."

재학: "그렇구나. 응."

문수: "아니, 끝까지 파봐야, 끝까지 파봐야, 끝까지 파봐야, 아는 거고. 끝까지 파고 가고, 끝까지 파고 들어가야 나를 아는 거잖아요. 그죠?"

재학: "끝까지 파는 건 좋은데, 그건 니가 원하는 걸 아는 게 아니라, 니가 뭘 못하는 지 아는 거야."



<우리 선희>의 한 장면.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두 사람과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술집 여주인. ⓒ (주)영화제작전원사



그런데 더욱 소름끼치게 만드는 건, 이 주제가 영화의 모든 술자리에서 돌고 돈다는 것이다. 이 대화는 애초에 선희와 문수의 대화에서 선희의 주장이었는데, 문수가 이를 재학에게 말하고, 재학이 다시 최교수에게 말하고, 최교수가 다시 선희에게 말하는 식이다. 제3자가 보기엔 웃기기 짝이 없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얘기로, 이것이야말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새삼 이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는 술집 여주인의 웃음이 눈에 띈다. 그녀는 이 우스꽝스러운 대화를 옆에서 들으며 입을 앙다문 채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다. 그녀가 극 중 화자로 나와서 관객을 대변해주지는 않지만, 그 모습으로도 충분히 대변해주고 있다. 반면 이들은 너무나도 진지한 모습이다.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방법?


<우리 선희> 또한 대부분의 홍상수 영화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목적 하의 스토리라인은 정해져 있지 않다. 서로 오묘하게 얽히고 섥힌 관계 설정과 소름끼치게 하는 일상의 장면들, 그리고 술자리가 있을 뿐이다. 다만, 이 영화는 19세 관람불가임에도 정사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 선희>의 한 장면. 공교롭게도 세 남자는 선희를 만나러 같은 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선희는 어디에? ⓒ (주)영화제작전원사



홍상수 감독은 이 영화를 "진짜 선희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각각 선희와의 술자리를 가진 세 남자가 말하는 '선희'가 어쩌면 그리도 똑같을 수 있다는 말인가하는 점이다. 이는 몇몇 영화에서 보여지는, 한 사람을 또는 한 상황을 두고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와는 정반대되는 설정이다. 오히려 정반대이기 때문에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거나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편안한 술자리에 동석한 것처럼 웃고 즐겼다. 소름끼쳤다고 표현했지만, 박장대소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격한 공감을 했단 얘기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 또한 감독이 원했던 바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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