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차임>

어느 요리 교실, 10명 정도의 수강생을 가르치는 강사 마츠오카는 젠틀하다. 하지만 친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분히 비즈니스적으로 대하고 있는 듯하다. 와중에 어느 수강생에게 지적을 한다. 또 하고 또 한다. 소금을 많이 너무 많이 넣거나, 양파를 너무 잘게 썰거나, 양파를 태우거나 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 수강생이 마츠오카에게 말하길 차임벨 소리가 들리지 않냐고 한다. 그는 들리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수업을 이어가 별 탈 없이 마친다. 한편 마츠오카는 비스트로 앙 빌이라는 레스토랑의 셰프 자리를 제안받고 곧 요리 교실을 그만 둘 생각이다. 이전에는 계속할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바뀌었다.
다음 날 요리 교실, 어김없이 강의가 이어지는데 예의 그 수강생이 또 이상한 행동을 한다. 제지하는 마츠오카, 하지만 이내 수강생은 자신의 뇌에 기계장치가 심어져 있다느니 하는 말을 하더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놀라 자빠진 마츠오카, 하지만 그의 표정이 금세 평온을 되찾는데…
구로사와 기요시, 서스펜스의 장인
일본이 자랑하는 서스펜스의 대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그를 존경하는 명감독들이 많은데, 특유의 질감으로 묘사하는 현대 사회의 뒤틀린 면모는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방법론, 특히 롱샷과 롱테이크의 병행은 서늘함을 가중시킨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2024년 작 <차임>은 채 50분이 되지 않는 중편이다. 당해 <차임>을 포함해 세 편의 영화를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출품했기에 특별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꽤 시간이 지난 후 국내 개봉에 성공했다. 그이 팬이라면, 서스펜스를 좋아하는 이라면 매우 좋아할 것이다.
제목에도 버젓이 나오지만 극 중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듯한 차임벨 소리, 즉 종소리는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니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의 머릿속에 각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으니까, 스스로를 해할 수 있으니까, 사람이 사람을 해칠 수 있으니까.
뒤틀린 일상과 무관심의 공포
<차임> 속 사람들은 하나같이 뒤틀려 있다. 겉보기에는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예의를 차릴 줄 아는 사람들이지만 설명하기 힘든 이상 행동을 보이곤 한다. 돌이킬 수 없을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마츠오카가 퇴근해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할 때, 아이가 마츠오카의 물음에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고 부인이 갑자기 수십 개의 재활용캔을 버리러 가선 기괴한 웃음을 띠는 것이다. 그런 가족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마츠오카도 섬뜩하다.
현대 사회의 문제점 혹은 미덕, 타인을 향한 무관심 혹은 타인과의 거리 두기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를 멀리하고나 끊는 건 의도적일 수밖에 없고, 계속되다 보면 병폐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영화는 환청과 환각, 폭력, 살인으로 나타난다고 봤다.
조용한 도시, 응축된 45분의 메시지
영화의 배경을 한번 살펴보자. 조리실에는 1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차가운 철제 테이블들이 줄지어 있으니 더 황량해 보인다. 밖에 나가도 황량한 건 매한가지다. 사람이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모를 것 같거니와 알아도 모른 채 할 것 같은 도시의 풍경이다.
마츠오카로 대변되는 현대인의 초상도 한번 들여다보자. 수강생들에겐 친절하고 상냥하며 고용주에겐 자신이야말로 꼭 필요하고 또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어필하니, 거기에 진짜 ‘나’의 모습이 있긴 한 걸까 싶다. 끊임없이 자신을 포장하니 본질은 오갈 데 없다. 심지어 가족들한테 돌아가서도 다르지 않다.
사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방법론과 메시지는 대체로 비슷하다. 절제된 연출, 절제된 캐릭터로 서스펜스를 만들어 현대 사회의 병폐를 꼬집는다. 더군다나 <차임>은 짧기까지 하니 더욱 집약적으로 응축해 놓았다. 이 중편 영화 한 편으로 그의 팬이 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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