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남쪽>

1930년대 하반기를 오롯이 할애한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러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편 스페인 내전은 미술, 문학, 음악, 영화, 사진과 게임까지 만들어지며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영화의 경우 21세기까지도 다뤄지고 있는데 페드로 알모도바르, 기예르모 델 토로, 켄 로치,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등 거장들이 한 번쯤 다뤘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빅토르 에리세다. 1973년 작 <벌집의 정령>이 작년 1월에 국내에서 최초 개봉했고 1983년 작 <남쪽>이 올해 2월에 국내에서 최초 개봉했다.
영화 <남쪽> 역시 스페인 내전의 후일담이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의 이야기인데, 곧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시대를 들여다보는 작업의 일환이다. 다름 아닌 아이의 아버지가 프랑코 정권의 압제를 피해 스페인 남쪽에서 북쪽으로 도망쳐 오다시피 한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남쪽’을 향한 소녀의 호기심
소녀 에스트레야는 아버지 어구스틴을 곧잘 따른다. 어구스틴은 의사라는 본업이 있으나 진자를 이용해 수맥도 짚을 줄 아는 신비로운 인물이다.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에 카리스마까지 겸비하니 굉장한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다만, 에스트레야로선 아버지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다.
낮 동안 집에 있으면 방에서 혼자 뭘 하시는지 궁금하고, 남쪽에서 올라왔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고, 결정적으로 ‘남쪽’이 너무나도 궁금하다. 그런 와중에 에스트레야의 첫 영성체 행사를 보러 남쪽에서 계속 살고 있는 할머니가 올라오기도 한다. 오랫동안 할머니를 보필해 온 밀라그로스가 그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준다.
그러다 에스트레야는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을 때 몰래 방에 들어갔다가 비밀을 알게 된다. 확실치는 않지만 아버지에게 어머니 말고 다른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녀는 그 여자가 남쪽에 있을 거라 생각하며 남쪽에 가야 한다는 열망을 키워 가는데…
‘남쪽’이라는 상징, 상처와 분단의 기억
영화 <남쪽>에서의 ‘남쪽’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어구스틴에겐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자 지식인으로서 정체성 상실의 원흉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육체적으로 북쪽에서 살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남쪽에 살고 있으니, 신비로워 보이는 한편 매사에 무기력하고 세상사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편 에스트레야에겐 꼭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판타지 속에 나오는 ‘가지 말아야 할 곳’처럼 여겨진다. 다름 아닌 아버지 어구스틴의 과거와 관련된 곳이라 갈 수 없는 곳일 뿐더러 말할 수도 없는 곳이다. 하지만 에스트레야로서는 남쪽에 할머니가 살고 있기도 하거니와 내 나라를 가 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스페인 내전은 크게 봤을 때 남쪽의 공화파와 북쪽의 국민파가 맞붙었고, 결국 국민파가 승리해 정권을 장악했다. 하여 우리나라처럼 둘로 쪼개지진 않았으나, 프란시스 프랑코의 파시스트 독재정권이 30년 넘게 지속되며 큰 상흔을 남겼다. 이를테면 어구스틴처럼 국민파에 반대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이들은 빈 껍데기만 남은 삶을 살아가야 했다.
보이지 않는 남쪽, 그래서 더 깊어진 감정
<남쪽>은 미완성의 걸작으로 불린다. 영화 촬영 중반부, 그러니까 에스트레야가 남쪽으로의 여정을 결심하고 떠나려 할 때 빅토르 에리세는 제작자로부터 투자 중단 통보를 받는다. 어쩔 수 없이 반쪽짜리 영화를 내놓아야 했지만, 오히려 다른 의미의 걸작이 탄생했다. 정작 ‘남쪽’은 나오지 않으나 ‘남쪽’을 향한 절절한 감정들이 잘 표현되었다.
어구스틴은 남쪽에 관련해 정치적인 상처만 있지 않다.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옛 연인, 그녀와의 사랑이 실패했다는 점도 그를 힘들게 한다. 뿐만 아니라 국민파를 지지해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와의 관계도 그를 아프게 한다. 그러니 과거에만 매몰되어 현재를 제대로 살아 내지 못하는 것이다.
에스트레야는 그런 아버지가 신비로워 보이기도 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애처롭고 가엽게도 느껴진다. 아버지를 향한 양가 감정이 그녀를 꽤나 괴롭히지만 성장의 마중물로 기능하기도 한다. 아버지에 대해 더 알아가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녀가 기어코 남쪽으로 가지 않아 오히려 완성도가 높아진 것 같이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신작 열전 > 신작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50분의 공포, 구로사와 기요시가 또 해냈다 (0) | 2026.02.26 |
|---|---|
| 사라져버린 ‘나’, 엄마로만 살아가는 시간 (1) | 2026.02.24 |
|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비극 뒤에 남겨진 이름, 아그네스 (0) | 2026.02.19 |
| 가짜 가족을 연기하다, 진짜 인생을 만나다 (0) | 2026.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