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햄넷>

16세기 영국, 매를 돌보고 식물을 들여다보며 자연에서 삶의 위안을 찾는 자유로운 영혼의 아그네스는 그녀의 동생들을 가르치는 라틴어 교사 윌과 사랑에 빠진다. 이윽코 윌은 아그네스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마녀로 오인 받고 있는 만큼 윌의 부모가 허락할 리 만무할 터, 하여 그들은 아이를 갖는다.
윌은 예술혼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버렸는지,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아이가 나왔을 때는 런던으로 가서 연극 배우이자 극작가로서의 꿈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하여 수잔나, 햄넷과 주디스는 아빠가 지켜보지 않을 때 태어났다. 그래도 윌이 나름 성공해 큰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집에는 가끔 들렀을 뿐이지만.
친오빠, 시어머님와 함께 집을 돌보는 아그네스는 주디스를 지켜보고 있다. 그녀 특유의 예지력으로 주디스가 역병에 걸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급기야 주디스가 역병에 걸리고 만다. 윌은 런던에서 달려오고 있고 주디스는 촌각을 다투고 있을 때, 햄넷이 모두의 인생을 영원히 바꿔 버릴 일을 저지르는데…
클로이 자오의 귀환, 셰익스피어를 다시 쓰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2021년 작 <노매드랜드>로 베니스, 미국 영국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토론토, 크리틱스 등을 싹쓸이하다시피 하며 당대 최고의 영화를 만든 이로 우뚝 섰다. 하지만 같은 해 내놓은 마블 히어로 영화 <이터널스>의 흥행 실패로 자존심을 구겼다. 이후 4년여 만에 내놓은 영화가 <햄넷>이다.
매기 오패럴의 소설을 원작으로, 클로이 자오와 매기 오패럴이 함께 각본을 썼으며 클로이 자오가 연출을 맡았다. 스티븐 스필버그, 샘 멘더스 등이 제작에 참여했고 제시 버클리가 주연으로 출연했다.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강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점처지고 있다. 그녀의 연기 인생 정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윌)의 걸작 비극 <햄릿>의 뒷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충분한 허구를 기반으로 재탄생시켰다. 셰익스피어가 허망하게 죽고만 햄넷을 생각하며 <햄릿>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러 전설과 구전을 바탕으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보통의 이야기를 뒤집는다.
영감이 아닌 고통에서 태어난 예술
예술이라는 것이 ‘위대함’이 담보되어 있는 만큼 절대적 존재의 힘이 잠시 내려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행해진다고 여긴다. 즉 불지불식간에 영감을 받아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책상에 앉아 머리를 싸매며 몇 날 며칠이고 골몰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통념을 <햄넷>은 뒤집는다.
영화 속 윌이 만든 <햄릿>은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겪은 일의 집합체다.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말이다. 윌은 살아가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데, 햄넷이 죽은 이유를 떠올리면 결코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없다. 그 고민을 예술로 승화해, 상황을 만들고 캐릭터를 탄생시키고 대사를 지어 냈다.
그렇게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인류를 관통하는 실존적인 철학 내지 신념을 내재하려 했다기보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현실적인 이야기에서 탄생했다고 봤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팩션으로 다분히 영화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방점은 다른 곳에 찍혀 있다.
아그네스, 상실을 견디는 얼굴
다름 아닌 아그네스다. 제시 버클리가 역대급 호연으로 보여 준 아그네스는 신비로움에서 출발한다. 숲을 제 집마냥 드나들며 스스럼없이 동식물을 대하니,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윌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 두 발을 현실에 단단히 붙인다. 윌이 훨훨 날아가려 할 때도 말이다.
몇몇 장면에서 그녀의 절규가 섬뜩하다. 마치 새끼 잃은 어미가 포효하는 듯하다. 슬픔 이상의 분노가 엿보인다. 온몸이 저릿저릿하다. 마지막 10분의 그녀는 모든 이를 눈물 짓게 하기에 충분하다. 상실의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영혼이 빠져 나간 듯했던 그녀는 비로소 상실을 받아들인다. 그 변화의 모습이 황홀하다.
상실은 상상만으로도 금식한 고통을 수반한다. 내게만은 오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누구나 반드시 상실의 때를 맞는다. 그때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실의 시절, 죽느냐 사느냐는 추상적이거나 철학적이지 않고 바로 내 눈앞에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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