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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유곽이라는 우주, 사랑과 권력이 뒤바뀌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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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해상화>

 

영화 <해상화> 포스터. ⓒ영화사 진진

 

아편전쟁 후 상하이는 개항장으로 지정되며 중국을 대표하는 도시로 급부상한다. 동시에 서구 열강들의 조계가 설치되어 근대 도시로 일찌감치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평천국운동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자연스레 유흥업이 번창했다. 특히 상하이 조계지 북쪽에 화류계가 생겨났다.

19세기 말에 한방경이 써낸, 중국 최초의 창작 연재소설 <해상화열전>은 바로 그 상하이 조계지의 화류계를 배경으로 유녀들의 지극한 일상을 그렸다. 확실한 줄거리 없이 등장하는 기녀들이 모두 주인공으로, 나름의 일상이 주요하게 다뤄지는 식이다. 거기에 상당히 미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당대를 엿보기에 제격이다.

대만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 허우샤오시엔의 1998년 작 <해상화>는 100여 년 전 소설 <해상화열전>을 원작으로 했다. 단 38번의 테이크로 만든, 영화 미학의 끝판왕이라 불러도 될 만한 이 작품은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정식 개봉된 적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28년 만에 국내에서 첫 개봉에 성공한 것이다. 이 대단하지만 재미없는(?) 영화를 어떻게 들여다봐야 할 것인지?

개항 도시 상하이의 유곽에서

19세기 말 상하이 조계지의 한 유곽, 고위 외교 관리 왕대인은 유녀 소홍의 단골이다. 그녀의 빚을 전부 탕감해 주고 그녀를 첩으로 삼길 원한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가 분명하지 않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좋으면서 티를 내지 않는 건지 알 수 없다. 이윽고 왕은 다른 유곽의 혜정과 하룻밤을 보내고 소홍에게 알려져 대놓고 면박을 당한다.

한편 쌍주는 늙은 홍대인의 후원을 받고 있는 바 매사 현명하게 대처한다. 어린 예비 유녀들 간의 시시비비를 직접 가릴 정도다. 루대인의 후원을 받고 있는 쌍취는 직설적이고 가멸찬 편이다. 심지어 자신을 키워준 이모에게도 정확하게, 한편으론 매몰차게 이야기한다. 둘 다 유녀의 대모 격이랄까.

소홍과 혜정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던 왕은 점차 혜정 쪽으로 기울던 때 홍의 부탁 어린 제안을 받고 소홍을 챙겨 보려 한다. 하지만 그녀의 방에 그녀가 좋아하는 오페라 가수가 있는 걸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하는데… 왕은 결국 누구를 선택할까? 이렇게 된 이상 혜정일까, 그럼에도 소홍일까.

사랑의 주도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영화 <해상화>의 공간적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 상하기 유곽에선 매우 평범한 듯 해괴망측한 일이 벌어졌다. 유곽 주인이 버려진 여자아이를 데려다 키워 유녀로 만든다. 그렇게 빚이 생긴다. 그리고 남자 손님을 받는 일을 시킨다. 그렇게 몸값이 형성된다. 돈 많은 남자들은 유곽을 계속 들락거리며 마음에 드는 유녀의 몸값을 빚 탕감이라는 말로 바꿔 지불하고 첩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남자들이 갑이고 유녀들이 을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왕대인이 쩔쩔 매는 모습에서 엿볼 수 있듯 오히려 그 반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백히 돈을 지불하고 사 오는 구조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존재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 앞에서는 제아무리 지체 높고 돈 많은 남자라도 을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일상물인 동사에 로맨스물이라 할 만하다. 당시 유곽에서의 지극한 일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보여주려는 데 여념이 없다. 그 일상의 태반에 남과 여가 있으니 로맨스가 없을 수 없다. 다만 아름답고 눈물짓는 로맨스라기보다 치졸하고 지질한 로맨스의 면이 보인다.

지루함마저 계산된 미학

이 영화, <해상화>의 미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했듯 단 38번의 테이크만으로 구성했는데, 장소는 오롯이 유곽 안이니 만큼 지루하기 짝이 없다. 특별한 사건이랄 만한 게 없으니 말이다. 그걸 사전에 알았을 게 분명한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미학 형식적 실험이 빛나는 것이다. 과연 누가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을까.

그런가 하면, 미장센에서도 출중한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시각적 배경과 더불어 복장, 연기톤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를테면, 19세기 상하이의 소극장에서 유곽 이야기의 연극 한 편을 감상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그만큼 이질적인 면을 찾아보기 힘들다.

허우샤오시엔 감독과 양조위의 두 번째 만남, 그리고 이가흔과 유가령, 고첩의 출연 등이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 영화를 역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뽑는 매체도 더러 보이는 바, 28년 만의 국내 최초 개봉에 의의를 더할 것 같다. 큰 스크린으로 보면 색다른 면모를 보일지 또 모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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