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왼손잡이 소녀>

타이베이로 향하는 세 모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엄마 슈펀은 야시장에 작은 국숫집을 마련한다. 먹고살아야 하니 뭐라도 해야 한다. 큰딸 이안은 엄마 몰래 빈랑 가게에서 알바를 시작한다. 야하게 옷을 입고 고객들을 유치해선 빈랑에 향료를 넣어 판매한다. 작은딸 이징은 야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상인들의 이쁨을 독차지한다.
하지만 슈펀은 장사가 잘 되지 않는지 월세 내는 것도 힘들어 보인다. 그러기 싫지만 그녀는 부모님을 찾아간다. 알고 보니 이안은 본래 타이베이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유명한 우등생에 퀸카였다고 한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왼손잡이 이징은 할아버지에게 호되게 혼이 난다. 왼손은 악마의 손이라며.
슈펀에겐 죽어가는 남편이 있는데 그 때문에 가족이 힘들게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보살피고 장례식까지 치러주려 한다. 이안은 일련의 사건으로 일을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는다. 한편 이징은 악마의 왼손으로 야시장 곳곳의 물건을 훔치기 시작하는데… 세 모녀에게 찬란한 빛이 비칠까?
션 베이커 스타일, 대만이라는 새로운 얼굴
영화 <왼손잡이 소녀>는 미국 독립영화계 최전선에서 활약 중인 ‘션 베이커’의 이름이 눈에 띈다. 그가 영화의 제작, 각본, 편집 등을 도맡았다. 그럼 연출은 누가 했을까 들여다보니, 션 베이커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대만계 미국인 프로듀서 쩌우스칭이다. 둘의 역할을 바꾸고 베경을 미국에서 대만으로 옮겼다.
스타일만 바뀌지 않고 그대로다. 이른바 ‘션 베이커 스타일’ 말이다. 세 모녀의 이야기인 걸 보니, 대만판 <플로리다 프로젝트>라고 할 만하다. 희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박한 현실이지만 마냥 사랑스럽다. 분명 잘못된 선택들의 연속이 낳은 결과겠지만 그들을 탓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사회에 화살을 돌리지도 않으니 그저 현실을 살아내려 할 뿐이다.
영화는 대만,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합작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다만 공식적으로는 대만 영화이기에 2026년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상의 대만 후보로 확정되어 본격적으로 오스카 레이스를 시작했다. 일찌감치 칸 영화제에 초청되어 극찬을 받았고 이후 유수의 영화제들에 초청되어 몇 차례 수상하기도 했던 바, 2025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우뚝 설 만하다.
타이베이 야시장에 내려앉은 삶의 온기
‘사랑스러운 절망’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세 모녀의 타이베이 재입성기를 보고 있으면, 인생의 아이러니가 떠오른다. 수많은 선택을 하고 수많은 상황에 맞닥뜨리며 수많은 감정이 오가는 와중에, 무수한 아이러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한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들이 동시에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슈펀의 경우 국숫집이 잘 안 되지만 바로 옆에서 만물 장사를 하는 조니의 진심 어린 보살핌을 받는다. 그의 한결같은 진심이 그녀를 어떤 길로 이끌까. 이징의 경우 만인의 사랑을 받을 정도로 활달하건만 할아버지의 한마디에 크게 동요되어 악마의 왼손을 부정한다. 더 이상 왼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서.
이안의 경우만 유독 절망이 계속되는 것 같다. 빈랑 가게에서 소위 ‘막 나가는’ 일을 저지르고 자칫 인생이 크게 바뀔 수 있는 기로에 선다. 과거에도 일련의 큰일을 겪으며 인생의 행로가 크게 바뀐 것으로 보이는데 또다시 그런 일을 겪고 마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을까.
사랑스러운 절망, 그리고 왼손의 의미
그렇다, 세 모녀는 따로 또 같이 부정당한다. 상황은 제각각이나 절망적인 건 마찬가지다. 당장 생계가 걱정이고, 과거에 발목 잡혀 미래가 불투명하며, 나라는 존재가 부정당한다. 젊은 엄마, 어른 첫째, 아이 둘째의 세 모녀가 각자 감당하기 너무나도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다. 더군다나 서로 돌보기가 어려운 부분들이다.
영화는 마냥 덮어놓고 희망을 전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실을 시궁창처럼 처절하게 그리지도 않는다. 마치 누구나 이 정도의 어려움은 겪으며 살아간다고 생각하게끔 한다. 고로 인생을 부정하지 않고 사랑하게 만든다. 심지어 인생이라는 게 아름답게도 느껴진다. 결국 괜찮아질 거고 좋아질 거라는 믿음.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일이 희미한 기억의 일부분으로 남을 뿐이다. 그렇다는 건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 나와 우리가 생생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며 느낄 수 있는 일들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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