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봄밤>

영경과 수환은 친구의 재혼식 뒤풀이에서 처음으로 조우한다. 안주 없이 소주만 들이붓고 있는 영경의 곁으로 세상 온갖 시름을 짊어진 듯한 수환이 다가온다. 술을 못 이기고 고꾸라진 영경은 이내 일어나 수환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통성명을 한다. 수환이 영경을 업고 집으로 데려다준다. 영경은 수환의 등에 업힌 채 김수영의 시 <봄밤>을 중얼거린다.
둘은 다시 만나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데, 과거로부터 오는 후회가 깃든 슬픔이 그들을 따로 또 같이 지배한다. 영경은 교사로 살다가 결혼했는데 오래지 않아 이혼한 후 100일 된 아이를 전 남편이 몰래 데려갔다. 그녀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의 길로 들어섰다. 수환은 철공소를 운영하며 잘된 때도 있었지만 결국 부도가 났고 신용불량자에 건강보험도 가입하지 못해 병을 치료하지 못했다. 그는 류머티즘을 앓으며 죽어가고 있다.
그래도 영경은 몸 하나 건사할 만큼의 돈은 있다. 집도 있었고.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수환에게 다 청산하고 자기 집에 들어와 살라고 한다. 그는 수줍은 듯 영경의 명령 같은 제안을 받아들인다. 동거에 들어간 둘은 오래지 않아 요양병원에 함께 입원해야 했다. 이젠 침상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 수환, 금단 현상으로 힘들어하는 영경. 둘에게 해 뜰 날이 찾아올까?
살아갈 길 아닌 죽을 길
권여선 소설가의 단편소설 <봄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봄밤>에는 영경의 나직한 목소리를 통해 김수영의 시 <봄밤>이 들려온다. 그렇게 읊조려지는 시는 그녀가 처한 상황과 대조되기에 오히려 그녀를 대변하는 것 같다. 그녀가 얼마나 애타고 당황스럽고 무거우며, 혼자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 말이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 봄이여.”
그들의 만남은 우연으로 시작되었지만 필연으로 나아간다. 서로의 고장 난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또 받아들일 뿐 고치려 하지 않는다. 영경이 '살아갈 길'이 없다고 하자 수환이 '죽을 길'은 있다며 고통과 슬픔의 길을 그저 함께 갈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찾을 때 서로가 서로의 안식처가 되어줄 뿐이다.
삶의 끝에서 빛나는 사랑
영화는 70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영경과 수환의 삶이 아닌 '사랑'을 들여다본다. 둘은 서로를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서로에게 자신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내보인다. 영경은 금단 현상의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하곤 술을 찾는다. 반면 수환은 하염없이 침잠될 뿐이다. 수환은 술을 찾아 외출하려는 영경을 기다리고, 영경은 굳어가는 수환의 곁에 있어주려 한다.
이토록 처연한 영화를 본 적이 있던가. 영화는 '반복'으로 처연함을 표현하려 했다. 영경은 무섭도록 술을 들이켜고 수환은 말도 행동도 없다. 수환은 영경을 업고 영경은 <봄밤>을 읊조린다. 영경은 술을 찾으러 외출하고 수환은 영경을 기다린다.
서사다운 서사가 없고 한없이 밑으로 안으로 침잠하는 반복만 있으니 자칫 지루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의 정체도 그들이 처한 상황도 알 수 없는 초반이 불친절한 편인데, 초반을 지나 어느 정도 해소되면 비로소 '사랑'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둘만의 사랑 말이다.
차갑고 쓸쓸한 가운데 오직 서로만 보는 두 아픈 연인이 빛난다. 그래서 영화는 의외로 처절하지 않다. 비록 삶의 끝에 다다랐지만 사랑으로 빛나는 둘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인생에서 결국 남는 건 사랑일 테니 죽도록 고통스럽고 하염없이 슬픈 그들이 부럽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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