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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인간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를 이토록 상스러우면서도 고급스럽게 말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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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아노라>

 

영화 <아노라> 포스터. ⓒUPI 코리아

 

2025년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종 승자(?)이자 주인공은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였다. 속칭 'BIG 5'로 불리는 5개 주요 부문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니 말이다. 비록 제77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으며 화제를 일으켰지만 <아노라>가 주요 부문을 휩쓸다시피 할 거라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1970년대생의 젊은 감독 션 베이커는 2000년부터 활동하여 이 작품이 어느덧 8번째 장편이다. 우리에겐 네 번째 작품 <스타렛>부터 소개되었고 <탠저린>과 <플로리다 프로젝트>로 이름을 알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거의 모든 작품을 직접 제작, 연출, 각본, 편집하고 촬영까지 도맡아 하는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미국 '독립영화'의 표본.

그의 작품들은 대체로 소위 '하위계층' 또는 '소외계층'을 주인공으로 둔다. '비주류계층'이라고 해도 맞겠다. 또 리얼리즘에 입각한 블랙코미디 장르가 주를 이루는 바 <아노라>도 비슷할 거라는 걸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성 노동자다. 리얼리즘에 입각한다 했으니 야할 수밖에. 그런데 보고 나면 기억나는 건 몸이 아니라 사람이다.

 

러시아 재벌 2세와 결혼한 뉴욕의 스트리퍼

 

애니라고 불리는 아노라 메이헤바는 뉴욕의 한 스트립 바에서 스트리퍼로 일하고 있다. 가게의 매출을 책임지는 에이스로 현란한 솜씨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녀는 가게를 찾은 뭇남성들에게 다가가 "힐링하러 왔다"는 그들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녹여 버린다. 하지만 가게 밖의 그녀는 평범 그 자체.

어느 날, 어리디 어린 러시아인 남자 이반 자카로프가 그녀에게 푹 빠진다. 그는 자신을 바냐라고 부르라 한다. 그녀의 솜씨에 완전히 반해 버렸는지 파티에 초대한다. 또 한 번 반했는지 이번엔 일주일간 여자친구 행세를 해달라고 한다. 1만 5천 달러로 딜. 그렇게 애니와 바냐는 각자 황홀한 일주일을 보냈는데 갑자기 바냐가 애니에게 청혼을 한다.

애니는 바냐의 진심을 묻고 확신을 얻었는지 청혼을 받아들인 후 곧바로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된다. 정식 등록 절차도 밟아 버린다. 그렇게 계속되는 행복. 사실 바냐는 러시아 재벌 2세였는데 돈 씀씀이가 이루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딱히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바냐, 곧 그의 부모 귀에 소식이 전해지고 하수인 3명이 애니와 바냐의 결혼을 무효화하고자 쳐들어오는데…

 

인간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

 

<아노라>의 제목이 사람의 이름인 이유, 그것도 자신을 굳이 '애니'라고 불러달라는 아노라 메이헤바의 이름인 이유는 뭘까.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인간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 말이다. 바냐가 애니에게 진심 어린 눈빛으로 청혼하고 애니가 받아들여 둘은 결혼하지만 어딘지 불안하다. 바냐는 여전히 별 생각이 없어 보이고 애니의 동료 중 하나는 악담을 퍼붓는다.

그리고 바냐 부모의 하수인 토로스가 출동하니 그야말로 애니를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는다. 애니는 자신을 바냐의 아내로 소개하며 악다구니를 치지만 토로스는 꿈쩍도 하지 않고 이혼도 아닌 결혼 취소만을 주장한다. 결정적인 건 바냐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다는 사실이다. 몸만 어른이지 여전히 철부지 아이에 불과한 그는 애니의 몸만 탐했을 뿐 애니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인간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찾아볼 수 없는 광경, 애니를 둘러싼 거의 모든 이가 그녀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녀가 시종일관 ‘나 여기 있다’며 에너지를 뿜어대고 소리치고 악다구니를 부려도 말이다. 와중에 단 한 사람만이 그녀를 사람으로 대한다. 토로스가 데려온 하수인 막내 이고르다.

그는 애니를 제압하지만 이내 선량한 표정으로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토로스와 하수인 둘째가 애니는 아랑곳도 하지 않은 채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애니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이것저것 챙겨준다. '애니'가 아닌 본래 이름 '아노라'가 더 예쁘다며 그녀로 하여금 인간의 격을 갖추게 한다. 물론 그녀는 그를 잡놈 보듯 하지만 그는 그 격한 표현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사랑, 결혼, 이혼 이야기지만...

 

영화는 애니와 바냐의 사랑 이야기, 애니와 바냐의 이혼 이야기로 거칠게 나눠볼 수 있다. 앞의 이야기에는 성 노동자로서의 애니가 다뤄지고 뒤의 이야기에는 도망간 바냐를 찾으러 떠난 애니, 토로스와 하수인들의 여정이 주를 이룬다. 앞엣것이 상당히 야한 반면 뒤엣것은 상당히 코믹하다. 연출, 각본, 편집, 연기 등이 탁월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완벽하게 차려진 만찬을 먹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장소는 오성급 호텔의 레스토랑이나 파인다이닝이 아니다.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묘하게 끌리는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최고의 음식들을 맛본다고 할까. 이 영화의 시놉시스 요약을 보면 흥미가 돋긴 하겠으나 뭘 얻을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와중에 영화는 애니에 집중한다. '성 노동자'라는 지울 수도 고칠 수도 없는 딱지, 어느 누구도 긍정적으로는 보기 힘든 꼬리표가 애니를 따라다닌다. 그녀도 의식하는 듯, '아노라'라는 이름 대신 애니라고 불리길 원하는 것 같다. 성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애니라는 이름 하에 따로 두고 싶은 마음. 아마도 그녀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를 것이다. 자신이 성 노동자라는 걸 딱히 인지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으니까.

하여 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한 게 아니라 하나로 귀결된다. '인간'으로 말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고 대할 것, 인간 객체를 대할 때 예의를 지킬 것, 인간을 향한 예의에 있어 최선을 다하진 못하더라고 최소한을 보일 것. 아노라가 자신을 '애니'라고 불러달라고 할 때 '아노라'라는 이름을 궁금해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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